김상훈 : 이번 주가 추석인데요. K-명절을 앞두고 스트레스 받는 것 없으신가요?
이혜민 : 늘 있죠. 우선 추석 선물 올해는 뭘로 해야하나 고민이에요. 전에는 선물 세트 과대 포장이 심하고 별로인 것 같아서, 작지만 질 좋은 음식을 사서 갔는데 어른들은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시더라고요. 저희 세대랑 또 달라서 양손 가득 두둑하게 들고 오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아, 또 명절 되면 친척들을 만나잖아요.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인 경우는 늘 어색해요. 장판만 보고 있습니다. 또 여성들은 가서 뭐라도 거들어야 하나 그런 것도 늘 고민이고요.
김상훈 : 기혼 여성으로서 느끼는 스트레스가 훨씬 많으실 거 같아요. 다행히 저희는 음식을 직접 하지 않고 사다 먹거나 나가서 먹거나 하고, 명절 때 설날과 추석 중 한 번만 모이는 식으로 조정이 되었는데 이것도 큰어머니와 큰사촌형수님이 집안 남성들과 투쟁해서 이뤄낸 것으로 알아요. 무엇보다 명절에는 어른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긴 하는 것 같아요. 입시, 취업, 결혼, 임신과 출산 계획 등 늘 물어보는 것들 있잖아요? 그리고 명절만큼 위계가 분명해지는 순간이 없죠. 아랫사람과 윗사람. 여기는 K구나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에요.
이혜민 : 오늘의 산책 가이드 상훈님, 오늘 산책할 길도 이런 이야기와 관련이 있나요?
김상훈 : 그럼요. 오늘의 산책길은 '평어, 동등한 관계를 만드는 언어'예요. 존댓말, 반말 즉 존비어체계로 이뤄진 K-언어를 다시 생각해보고 그 대안을 찾아보는 길이에요. 이번에도 질문을 드려볼게요. 우선 혜민님은 누구에게 존댓말을, 또 누구에게 반말을 사용하시나요?
이혜민 : 보통 사회에서 만난 분들에게는 나이에 상관없이 존댓말을 하는 것 같아요. 반말은 가족이나 학교 친구 같이 오래된 친구들에게 쓰는 것 같고요. 간혹 사회에서 만났다가 나이가 같고 잘 맞아서 서로 반말을 하기로 합의한 경우 반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제 주변에 지금은 서로 존댓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김상훈 : 그러면 존댓말, 반말 중 어떤 말을 사용하는 관계가 더 편하신가요?
이혜민 : 사실 반말을 하는 사이가 언뜻 봤을 때 더 편해서 반말을 하는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사회에서 만난 지 오래됐지만 줄곧 존대를 하는 친구도 있는데, 오히려 지금의 저를 더 잘 이해하고 있고 말도 잘 통하는 거 보면 더 편한 것 같기도 해요. 동창들과는 오랜만에 만나도 반말을 하는 사이이긴 하지만, 이제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 같아서 만나면 좀 불편하더라고요.
김상훈 : 그러면 만약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위아래가 없는 언어가 생긴다면 그걸 사용하실 것 같은가요?
이혜민 : 와 그런 게 있나요? 그게 뭔지 좀 알고 싶네요. 사실 제가 관계가 애매해서 말을 못 거는 사람이 있거든요. 아주 가까운 사이라면 가까운 사이이고 자주 보는 사이이기도 한데요. 이거 참 호칭도 어려워요. 공식적 호칭은 '도련님'이죠. 제 남편의 남동생인데요. 호칭을 한 번도 안써봤어요. 이름을 그냥 부르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도련님이라니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요. 주말에 종종 시가에 들러서 밥을 먹기 때문에 자주 보긴 하거든요. 만나면 그냥 서로 인사하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궁금한 게 있으면 약간 에둘러서 물어본다든가 하고요. 분명 저보다 어리고 이름이 있는데도 왜 나는 부르지 못하는가 고민이에요.
김상훈 : 오늘 산책길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이혜민 : 오늘도 지도가 있나요?
김상훈 : 있죠. 오늘은 우선 사전을 찾아 보았습니다. 사전 역시 우리의 지도가 되겠지요? 존댓말, 반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어요. 국어 사전에 따르면 존댓말은 "사람이나 사물을 높여서 이르는 말. '아버님', '선생님' 따위의 직접 높임말, '진지', '따님', '아드님' 따위의 간접 높임말, '뵙다', '여쭙다', '드리다' 따위의 객체 높임말이 있다"라고 나와있어요. 그리고 반말은 "손아랫사람에게 하듯 낮추어 하는 말"이래요. 또 두산백과에 따르면, 존댓말 대신에 경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렇게 설명해요.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인물이나 이야기를 듣는 상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쓰는 언어 표현" 어쨌든 상대를 높이고 나를 낮추는 언어이죠.
한편으로는 요즘 이정재, 정우성 배우의 기사가 언론에 많이 나오는데, 두 분은 24년 친구인데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 보니 오히려 존댓말이 편하다고 둘은 말하는데요. 이런 것도 하나의 대안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지금의 존댓말, 반말 체계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대안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 아닐까요?
이혜민 : 그러면 오늘의 산책을 위하여 산 책을 소개해 주실까요?
김상훈 : 『예의 있는 반말』이라는 책이에요. 예의 있는 반말은 곧 '평어'를 의미하는데요.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서로 동등한 관계임을 전제하고 사용하는 언어, 즉 평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경험담을 밝힌 책이에요.
이혜민 : 저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김상훈 : 이성민 님을 포함하여 15명의 저자인데요. 디자인 커뮤니티이자 대안 학교인 '디학'의 선생님과 학생들입니다. '나이, 성별, 직업 등과 관계없이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디자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교유하고 있다'고 해요. 이 학교에서는 모두가 '평어'를 사용한다고 하고요.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서도요. 이들은 디자인 학교답게, 평어 역시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의 한 결과물로서, 새로운 언어를 디자인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혜민 : 오늘의 산책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나요?
김상훈 : 한국어의 기존 존댓말, 반말 체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 사이의 동등한 관계를 만드는 언어로 평어라는 것을 새로이 디자인하고, 실제 그것을 커뮤니티 내에서 사용하며 느낀 경험까지 모두 담겨 있다 보니까, 오늘의 산책길에 딱 걸맞죠.
이혜민 :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나요?
김상훈 : 평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하실 것 같아요. 저자 중 '이성민'님은 이 디학의 선생님이자 평어를 디자인하고 제안한 사람인데요. '들어서기'라는 첫 챕터에 이성민 님의 생각이 정리되어 있어요. 우선 예시로, 상대에게 밥을 먹자고 하는 대화의 상황을 5개의 형식으로 보여줍니다.
1. 먹어.
2. 밥 먹어.
3. 연두야 밥을 먹자.
4. 연두 씨 밥을 먹어요.
5. 연두 선생님 진지 드세요.
1단계는 상대를 하대하거나 명령하는 느낌이고 5단계는 상대를 최고로 높인 말이죠? 3단계 정도가 우리가 흔히 친구에게 하는 반말 정도인데요. 이성민 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평어는 말의 모든 골격이 갖추어졌으면서도, 가장 소통도 빠르고 격식도 없는 3단계 정도의 말 (연두야 밥을 먹자)를 고른 뒤, 호칭에 토시를 생략해 상대방의 이름을 친근히 부르지만 약간의 격식과 예의를 갖춘 반말을 쓰는 방식으로 디자인되었다. 이러한 평어 가이드라인을 대화에 적용하게 되면 '연두, 밥을 먹자'라고 말하게 된다."
이성민 님은 최봉영이라는 한국학 연구자의 이론을 빌어서, 우리말의 '존비어체계'는 한국인들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달성했으면서도 여전히 '유사 신분 관계' 속에 살아가도록 만드는 언어라고 말해요. 존비어체계는 나이든 지위든 간에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명확히 나누고 그것을 언어 속에서 드러내게 함으로써, 재차 그 위계에 대한 인식을 강화시키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제안하는 평어는 존비어체계를 지운 상태에서 상호 동등한 우호 관계로서 적극적으로 서로 반말 하듯 자연스럽게 친근하게 대화하면서도 형, 누나 등의 위계 호칭은 빼고 서로의 이름 그대로 부르면서 예의와 거리를 유지하는 방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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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나답게 읽고 쓰고 말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