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있습니다.
“우린 언어가 같아요.” 사랑의 여러 고백 중 ‘언어가 같다’는 말은 특별하게 들린다. 나를 오해하는 세상에서 즉각적으로 나의 깊은 뜻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 어떤 외부적 장애물이 있을지언정, 두 사람의 소통을 만들 수 있다면 로맨스는 성공이다. 그래서인지 로맨스는 같은 국적, 비슷한 처지의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성공적으로 안착한다. 온통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라면 더욱 불꽃이 튄다. 도쿄에서 만난 남녀의 사랑을 그린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역설적으로 통역이 필요하지 않다. 두 사람은 낯선 일본에 떨어진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조건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보고 사랑에 빠져든다.
동일한 언어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사랑의 대화. 로맨스의 조건은 역으로 우리가 지닌 사랑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보수적인지를 보여준다. 물론 외국인과의 사랑을 다루는 무수한 영화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도 ‘로맨스의 보정’이 작용한다. 마치 필터를 씌운 것처럼, 우리는 외국 배우가 현지의 말을 유창하게 써주길 기대한다. 아마 <헤어질 결심>의 탕웨이의 외국어 연기에서 우리가 기대한 바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단번에 이해되는 매끄럽고 유창한 한국어.
그러나 <헤어질 결심>이 특이한 로맨스가 되는 건, 바로 ‘부서진 언어(broken language)’ 덕분이다. 탕웨이가 연기하는 ‘서래’는 중국인이며 그래서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은 캐릭터다. 그녀는 취조 와중에도 서툰 한국어를 할 때마다 자신이 없어 웃는다.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 서래의 그런 행동은 바로 편견으로 이어진다. 그 신호를 놓치지 않고, 유리벽 바깥의 형사는 해석한다. “저 여자 웃는데요?” 그렇게 남편이 죽어도 웃는 미스터리한 여자라는 프레임 아래, 서래는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여기서 ‘해준’은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의 직업적 자부심은 ‘편견 없는 수사’에서 온다. 해준은 그를 유죄라고 단정 짓지 않고 서래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표면에 떠올라 관객에게도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조건들, 즉 이방인이며 남편을 죽인 치명적인 여자라는 인상은, 해준의 필터를 거치며 흐릿하게 가라앉는다. 여기서 해준이 특히 신경 쓰는 것이 ‘언어’라는 점에 주목하자. 그는 누구보다 서래의 눈높이에서 쉬운 말로 설명하려 애쓰는 사람이며, 서래의 단어를 그녀의 맥락에서 해석하려는 사람이다.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은 대등해지며 ‘로맨스’는 비로소 시작된다.
영화가 서래와 해준의 사회적, 계급적 조건을 드러낼지언정 그것을 인물의 내적 고뇌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자. 해준은 서래가 자신보다 계급적, 사회적 위치가 낮다는 점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그녀를 향한 사랑과 자신의 직업적 자부심이 충돌하는 것을 괴로워한다. 서래 역시 “당신 같은 사람과 한마디라도 하려면 살인사건 정도는 일어나야죠”라고 하며 자신의 조건을 의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꼿꼿하게’ 사랑을 향한 욕망으로 걸어간다. 그렇다면, 영화는 현실적 제약을 애써 무시한 채 만들어진 허구의 로맨스일까.
역설적으로 이 조건 속에서 로맨스를 피워내기 위해, 현실적 조건은 더욱 섬세하게 고려된다. <헤어질 결심>의 각본을 공동으로 쓴 정서경 작가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방인인 서래의 처지를 나타내기 위해, 짝짓기 원리에 스며든 한국 사회의 계층을 생각했다고. “밑바닥에 있는 중국인 여자는 어떤 사람을 만날까?” 실제로 서래는 자신에게 폭력을 일삼는 남자들과 결혼하며, 자신에게 유일하게 친절했던 사람 해준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
한편, 배우 박해일이 ‘해준’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참조했던 것 역시 현실에서 일어나는 정반대의 사건이다. 그는 “생존이 중요했던 어떤 여성이 자신을 조사하던 경찰에게 의지하며 감정을 주고받다가, 나중에 형사가 여자에게 돈을 요구하며 협박했다”는 기사를 읽고 <헤어질 결심>을 다시 생각했다고 말했다. 해준이 서래에게 친절해야 하는 사회적 측면을 떠올린 것이다. 쉽게 착취하고 권력을 남용할 수 있는 상황을 의식하며, 해준은 자신의 원칙을 지킨다. <헤어질 결심>은 인물이 쉬운 길을 택하지 않기에 성립되는 로맨스다.
다시, 탕웨이가 서툰 한국어를 사용하고 웃는 장면으로 돌아와 보자. “한국말을 못한다고 여성 캐릭터를 어린애처럼 만들지는 말자”는 원칙이 있었다는 정서경 작가의 말처럼, 서래를 ‘단일한’ 사람으로 만드는 조건은 부서진 언어가 가리키는 불평등한 조건을 환상이나 편견으로 감싸지 않는 것이다. 작가는 중국에서 유창하게 중국말을 하는, 사납고 생명력 있는 서래의 모습도 함께 떠올렸다고 한다. 격정적인 사랑의 순간엔 중국어로 표현하는 여자. 우리는 서래의 언어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치 안갯속에서 헤매듯이, 관객 역시도 영화를 보는 내내 미끄러지며 로맨스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참고 기사
'헤어질 결심' 배우 탕웨이, 박해일 "모든 것이 완벽했던" (cine21.com)
'헤어질 결심' 정서경 작가 "'헤어질 결심'은 100% 관객에게 가닿았다" (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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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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