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이후 많은 것들이 달라졌고 이에 적응하는 사람들의 정신건강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겸손한 공감』를 쓴 저자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는 변화무쌍한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에 주목하였고 그 탐구의 기록을 글로 엮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은 혼란과 변화라는 단어에 익숙해졌지만 반대로 변하지 않는 삶의 가치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계기로 저자는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살펴보고 세상을 관찰했다.
김병수 저자는 제일 먼저 정신과 의사로서 무엇을 해왔고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성찰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 얘기인 듯 아닌 듯한 내담자들의 사연과 의사로서 공감이 듬뿍 느껴진다.
겸손한 공감이란 무엇을 뜻하나요?
저도 공감이란 말을 자주 쓰지만 “내가 공감을 잘 하고 있나?”하고 스스로를 돌아볼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상대가 만족할 만큼 공감하지 못할 때도 드물지 않게 있습니다. 무엇보다 완벽한 공감이란,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에너지가 필요한데, 바쁘고 지치면 공감하기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감을 너무 자주, 많이 하다 보면 공감 피로라는 현상에 빠지기도 하고요. 이렇게 공감이란 저를 비롯한 보통의 사람들이 언제나 쉽게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에게 공감했다, 이렇게 하면 공감을 잘 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의 심정에 공감합니다…”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죠.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솔직히 좀 거북합니다. 나 자신을 더 돌아보게 되는데, 충분히 공감했다고 언제나 자신할 수 없다는 걸 잘 아니까요. 그래서 공감하려는 자세도 겸손해야 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해도 완벽한 공감에는 절대 이를 수 없다는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아야 하며, 공감했다고 느껴지더라도 공감에 실패했을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공감을 방해하는 가장 큰 방해물은 권위입니다. 스스로 높은 위치에 있고 힘이 있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죠.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으셨나요?
이런 저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라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글을 쓴 건 아닙니다. 심리 이론과 기법, 가설에 불과한 이론과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하루 하루를 살며 순간 순간 느끼고 떠오르는 생각과 행동 속에서 우연히 발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통찰만이 자신과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그저 일상을 보내고 하루 하루 진료하면서 떠올랐던 생각, 깨달음, 느낌들을 모아 보고 싶었습니다. 주의를 기울이고 글로 남겨 놓지 않았으면 사라졌을 이야기를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진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서문에 쓴 것처럼 글을 쓰고 책으로 엮는 일의 목적은 환자들과 함께 하는 동안 벼락처럼 찾아왔던 지혜를 그분들께 되돌려 드리기 위함입니다. 공짜로 얻은 보물을 혼자만 꿰차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이기도 하고요.
마음은 몸과 달라 언제 병원을 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 아파야 정신건강의학과를 가는 게 좋은가요?
이전에 어렵지 않게 하던 일상, 즉 일이나 학업, 대인관계가 어렵다고 느껴지고 실제로 잘 못 하게 되면 정신과에서 상담해야 합니다. 단지 우울하다, 불안하다, 라는 느낌만 있다면 급하게 병원을 찾지 말고 우선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습니다. 증상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상황을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연인과 이별하고 직장에서 스트레스받으면 우울한 게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우울하고 힘든 것은 당연하죠. 스스로 괴롭기는 하지만 잠 잘 자고, 잘 먹고, 일이나 공부를 그럭저럭 해내고 있다면 정신과적인 문제가 생긴 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주관적인 느낌에만 의존하지 말고 자기 상태나 상황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 친구나 가족과 대화를 먼저 나눠보세요.
이야기하다 보면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판단이 들 수도 있고, 주변에서 보기에도 걱정이 된다며 진료를 권유할 수도 있거든요. 문제가 있는데도 자신이 잘 모르겠다면 병원을 바로 찾기 보다는 자기를 잘 아는 친구나 가족과 먼저 대화를 나누세요. 이런 방식이 우리 인류가 보편적으로 해온 진단 및 치료 방법입니다.
20년 가까이 내담자들을 만나오셨는데요,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예전과 많이 달라진 점이 있나요?
많이 달라졌어요.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처음 정신과 의사를 할 때는 조현병, 조울증, 그리고 우울증도 중증 환자들이 정신과 진료실에 많았어요. 물론 불면증이나 불안장애 등도 있었지만 증상이 심각한 환자들이 많았죠. 하지만 요즘은 가벼운 우울증, 질환과 정상 사이의 경계에 걸친 문제를 가진 이들도 많이 정신과를 찾습니다. 무엇보다 정신질환이 아닌 문제들로 정신과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직장 스트레스, 대인관계 문제, 학업이나 진로로 혼란에 빠진 청년, 삶의 의미를 되찾고 싶어 하는 실존적 과제를 들고 오는 경우도 있고요. 현실적인 스트레스가 없는데도 공허한 느낌이 견디기 힘들어서 오는 사례도 있고요. 정작 본인은 문제가 없지만 정신적으로 힘든 친구와 가족을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지 상담하러 오는 경우도 있고요. 이런 저런 상담 사례들을 모아 보면 정신과에 오는 이유는 “자기 삶을 제대로 살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나는 누구인가?’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하셨는데요, 선생님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하신다면요?
저도 계속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하면서, 그 답이 상황과 나이에 따라서 계속 변하고 있어요. 요즘 이런 질문을 받으면 “더 많은 것을 체험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해요. 다양한 일을 하고, 더 많은 곳을 여행하는 것도 더 많은 것을 체험하는 삶이죠. 실제로 이렇게 몸을 움직여서 더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믿어요. 경험에 개방적이고 호기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삶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그 안으로 뛰어들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실제 경험의 폭을 넓히고 나이가 들더라도 새로운 경험에 뛰어들고 싶어요.
동시에 체험을 더 깊게 하는 것도 중요해요. 팬데믹으로 우리 삶이 어쩔 수 없이 좁아졌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여러 나라를 여행 다닐 수도 없고, 무턱대로 자신을 노출할 수도 없게 되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실제 경험의 폭은 줄어들 수밖에 없지만 더 깊게 느끼고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소소한 일상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식사도 조금 더 맛을 음미하려고 노력하고, 음악을 들을 때도 더 섬세해지려고 해요. 미술을 볼 때도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고 애쓰고요. 이렇게 감각 경험을 더 깊게 하려는 노력, 섬세하게 감각을 단련하며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삶의 또 다른 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힘든 일을 겪으실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매번 하는 말이라 좀 식상하기는 한데… 우선은 제 몸을 좀 괴롭혀요. 더 많이 걷고 더 많이 뛰어요. 운동을 일부러 조금 더 하는 거죠. 정신적으로, 혹은 상황적으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혹은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닥쳤다면 그럴 때는 생각을 줄이고 몸을 더 많이 움직이는 게 좋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자세는, 도망치거나 주저앉는 게 아니라 그런 고통 앞에서도 일상을 꿋꿋이 유지하는 게 가장 존엄한 모습이거든요. 물론 이게 쉽지 않다는 걸 압니다. 저도 잘 안 될 때가 있었고요. 하지만 이런 원칙을 잊지 않고, 상기하고, 실천하려고 꾸준히 노력합니다. 잠시 잘 안 되더라도 알아차리고 바로 제자리로 돌아오려는 노력하는 거죠.
끝으로 일상에서 행복을 자주 느낄 수 있는 팁을 주신다면요?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큰 성취를 하고 가진 것이 정말 많은 사람인데 “나는 행복하지 않다, 삶이 공허하다”고 호소하는 분을 종종 봐요. 겉으로만 보면 정신과 의사인 내가 봐도 부러울 정도의 사람인데도요. 물론 사람마다 나름의 이유가 따로 있기는 하지만 이런 고통에 시달리는 이유 중에 공통적인 요소는 삶에 대한 호기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어요. 무엇으로도 기쁘지 않다, 뭘 해도 만족스럽지 않다며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심조차 사라져 버린 것이 불행의 원인이었어요. 평소에도 항상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신문에서 신기한 가십도 눈여겨봐요. 거대한 정치 이야기보다 해외 토픽에 더 관심을 기울여요.
봄이 되면 벚꽃도 보는데, 이걸 낮에도 보고 밤에도 보고, 비가 오면 어떻게 떨어지고 떨어진 꽃잎은 어디로 흘러가서 어떻게 사라져 가는 지도 알고 싶어요. 우리는 모두 꽃이 핀 것에만 관심을 갖지만 그것 너머에도 호기심을 갖는 거죠. 또 뭐가 있을까요? 한끼 요리도 새로운 방식으로, 예를 들면 소금을 조금 더 치기도 하고 적게 치기도 하고, 고춧가루 대신 핫소스도 뿌려보고... 새로운 음악을 찾아 다니는 것도 저의 큰 기쁨 중에 하나예요. 지금 이 순간에도 뮤직앱에 또 어떤 새로운 노래가 나와 있을까, 하고 궁금해해요. 들어 보고 싶고요. 뇌로 가는 감각 통로를 열어 놓고, 그 통로에 익숙한 것만 통과하지 않도록, 새로운 경험에 나를 열어 놓으려고 애써요.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삶은 알 수 없어서 불안하기도 하지만, 알 수 없기 때문에 궁금증이 생기는 거거든요. 호기심을 갖고 “내 인생에 또 다른 뭐가 찾아올까?”라고 호기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행복은 완벽히 보장 못 해도) 적어도 불행하다, 공허하다, 무의미하다고 느끼지 않게 막아줄 수는 있어요.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원장. 직장인의 스트레스, 중년 여성의 우울, 마흔의 사춘기 등 한국적 특성에 기초한 세대별, 상황별 아픔에 주목하며 특히 팬데믹 이후로 변화된 정신건강 패턴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다. 정신과 의사로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마음가짐과 꾸준한 태도를 선호한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임상교수로 근무했고 같은 병원 건강증진센터의 스트레스 클리닉에서 진료했으며 대한우울조울병학회, 한국정신신체의학회,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등에서 임원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서울 교대역 사거리에 있는 작은 의원에서 내담자들의 마음을 치유하며 다섯 번째 해를 보내는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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