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재의 네덜란드 일기] 시작하는 힘
매일 보아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메마른 나무에 어느 순간 푸른 기운이 돌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은 어느 날이 맑은 오후였다.
글ㆍ사진 이제재(시인)
2022.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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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글라스드 아이즈』로 독자를 만났던 이제재 시인이 네덜란드에서의 일상을 에세이로 전합니다. 새로운 장소에서 시인은 자신을 3인칭으로 바라보며 ‘내’가 변화하는 순간들을 관찰합니다. 짧은 소설처럼 흘러가는 이 에세이는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2022년 1월 15일

그래, 사람이 한 번에 바뀌진 않겠지. 이제재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늘어뜨린 채 좌우를 둘러 보았다. 양옆으로 길게 이어진 책상과 외국인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매번 도서관에 올 때마다 동양인은 그를 포함해 한 명 또는 두 명 정도인 이 공간에서 딴짓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간단한 식사를 해결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엎드려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웨이크 업. 여긴 자는 곳이 아니야.

도서관에 막 적응을 할 무렵, 한번은 졸다가 잠이 든 그를 도서관 직원이 깨우러 온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는 빨개진 귀로 좌우를 둘러 보았는데, 이곳 사람들은 누구도 피곤에 지친 얼굴로 도서관에 앉아 있지 않았다. 언젠가 이곳에서 유학 생활을 한 친구의 얘기에 의하면, 정해진 시간만 일하고 잘 쉬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너무 일찍 도서관에 가는 일을 피했고 다만, 지금처럼 눈앞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한 문서 파일이 열려 있을 때면 잠으로도, 딴짓으로도 도망가지 못하는 스스로의 상태를 견뎌야 했다. 글이 쓰여지지 않으면 책을 읽는 것이 안되었고, 그러면 그 외의 무수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가 언젠가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도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한참 전부터 고대하던 자전거를 타고 이 주변 일대를 탐색하는 일이나, 지금도 백팩 속에 들어 있는 그의 시집을 도서관 한구석에 꽂아두는 일은, 모두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는 일이었다. 네덜란드에 도착한 후 내내 그의 몸을 감싸던 무기력에도 힘을 내어 도서관에 온 이유는 이곳에 오면 무엇이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결과였다. 

무언가, 생명력이 부족하다.

노트북 옆에 펼쳐진 작은 메모장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몸을 틀었다. 같은 층인 2층의 화장실이 아니라 0층에 있는 화장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며 그는 화장실 변기 위에서 조금 시간을 끌다 최대한 천천히, 꼼꼼히 손을 씻고 핸드타월을 만지작거릴 스스로를 미리 그려보았다. 거울을 보면 어쩐지 색조가 빠져 보이는 회색조의 얼굴이 보일 것이고 사람이 없다면 한번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볼 것이지만, 어쨌든 그는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을 보낸 뒤 화장실에서 나올 것이었다. 지친 마음으로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러 갈 것이었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곳에서는 0층이 한국의 1층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3층에 가려고 하는 것이니까 2층 버튼을 누르자, 계산하며 버튼을 누를 것이었다.

잠시 뒤의 그는 놀라울 것도 없이 예상대로 움직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화장실이 아니라 엘리베이터의 거울을 보고 미소를 지어보았다는 것이 유일하게 그의 예측과 다른 점이었다.



2022년 1월 25일

그가 린든나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도서관의 1층에서였다. 그의 짐이 있는 2층을 피해 그의 몸이 향한 1층에는 여섯 사람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직사각형의 테이블이 하나 있었고 테이블을 중심으로 뒤쪽 벽에는 원형의 시계 4개가 움직이고 있었다. 4개의 시계는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고 같은 속도로 시계 침을 이동시키고 있었는데, 그는 멍하니 네 개의 분침이 한 번에 자리를 옮기는 것을 확인한 뒤 책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그가 머물고 있는 틸뷔르흐에 대한 책들이 있었고 한 책장 아랫칸에는 같은 제목의 책들이 시리즈인 듯 죽 늘어서 있었다. ‘DE LINDEBOOM’. 번역기로 검색해보니 그것은 린든나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무에 대한 책이 아니었다. 한 권 펼쳐 목차를 번역해보면 틸뷔르흐의 역사 연보들이 죽 나열되어 있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 

그가 린든나무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Tilburg - vijf eeuwen rond een “heilige” Linde(틸뷔르흐- 신성한 린든나무를 둘러싼 5세기)』라는 책의 표지에는 양산 모양을 한 거대한 나무 한 그루의 사진이 있었다. 그 나무는 1994년 벌목되기 전까지 틸뷔르흐의 중심부인 Huvel 거리의 성당 옆에 800년쯤 서 있었고 사람들은 그 나무를 신성한 나무라고 부르며 그 아래에서 결혼하고 서로를 축복하며 축제를 즐겼다. 책에 따르면 틸뷔르흐의 틸Til은 린든나무의 라틴어 학명인 Tilia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종종 그 나무를 생명의 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다.

생명력.

중심 시가지 개발을 위해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 당국이 린든나무를 잘라냈을 때, 그 나무는 이미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5미터의 둘레를 절단하자 나무의 텅 빈 중심이 드러났고, 사람들은 곧 그 안에서 자라나고 있던 어린나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어린나무는 틸뷔르흐의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지만 그곳에서 살아남지 못한 듯했다. 

그는 거기까지 번역기를 돌려본 뒤 책을 덮었다. 누군가 그의 짐을 훔쳐가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오래 자리를 비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몸은 쉽사리 그의 자리가 있는 2층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0층의 화장실에 들렸고 엘리베이터 버튼 앞에서 3층을 누르는 사소한 계산 실수를 했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그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지만 다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꼭대기 층인 3층에는 교실 4개 정도의 빈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입구에 놓인 팸플릿을 보니 가끔 무언가를 전시하는 형태로 쓰이는 공간인 듯했다. 3면을 둘러싼 유리로 된 벽 아래를 내려다보면 수백 대의 자전거를 보관할 수 있는 자전거 보관소가 보였고, 그 옆으로 펼쳐진 틸뷔르흐역이 보였다. 그가 그곳에 있는 동안 두 대의 기차가 역에 멈춰 섰다가 지나갔고, 그는 그 모습을 보며 그가 서 있는 도서관이 한때 기관차 격납고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도서관 1층 벽의 한편에 붙어 있던 사진 중에는 공중에 매달린 기관차들의 사진도 몇몇 있었다. 이 공간 안에서 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좀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크레인 몇 대가 보이기도 했고 엇비슷한 높이의 네덜란드식 건물 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현대적인 빌딩이 보이기도 했다. 그 사이로 어떤 성당의 꼭대기 부분이 보였는데 그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저 성당이 그 옛날 린든나무 옆에 서 있던 Huvel 거리의 성당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신성한 나무도, 그 옆에 있었다던 교수대도 사라졌지만 성당은 살아남아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 이 도시 곳곳의 성당에서 때마다 울리는 종소리를 떠올리고 있었고 마치 종이 울리는 것처럼 손을 모았다. 그 종소리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시간을 알리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소리는 신에게 기도할 시간을 알려주는 소리였다.

다음 순간, 그는 2층의 짐을 챙겨 자전거 보관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자전거를 챙겨 입구로 가자 보관소 직원이 그림처럼 웃으며 하이, 하고 인사했고 그는 왜 웃는지도 모르고 그를 따라 미소 지으며 출입카드를 내밀었다. 다시 카드를 돌려주는 직원의 입에서 해브어나이스데이, 하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입구를 벗어날 그의 자전거를 타고 그는 멀리, 가보지 않은 곳으로 산책을 다녀올 것이었다.


2022년 2월 23일

오전 10시에 자전거를 타고 기찻길 옆으로 펼쳐진 산책로를 따라가면 어느 순간 그의 앞에는 휠체어를 탄 중년의 남자와 개가 등장했다. 그들은 쉬지 않고 움직였고 완벽하게 서로의 속도에 맞춰나가는 듯했다. 그들의 뒤를 놓치지 않으며, 앞서 가지도 않은 채 그는 페달을 밟고 있었고 그런 그들의 오른쪽에는 작은 호수가 펼쳐졌다. 오전의 빛으로 반짝이는 호숫가 근처에는 네덜란드식 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바람이 불면 호수는 유화처럼 집들을 되비추고 있었다.

자전거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의 집 건물과 옆 건물 사이에는 누군가 이미 주차해놓은 자전거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앞으로는 철조망이 놓여 있고, 그 너머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매일 보아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메마른 나무에 어느 순간 푸른 기운이 돌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은 어느 날이 맑은 오후였다.  

글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미래의 어느 날 그는 알아차릴 것이었다. 생활은 스스로 시작되고 있었다.




글라스드 아이즈
글라스드 아이즈
이제재 저
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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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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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justhyuk

2022.05.05

그런 것 같아요. 매번 무언 가를 하기 전에, 무언 가를 하려고 하기 전에, 나는 무언가를 이미 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더 빨랐을 지언정 느린적이 있었나 싶어요. 글을 읽으면서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스스로 꾸준히 태어나는 나무를 본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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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재(시인)

1993년 3월 4일생. 생년월일이 같은 아이를 두 번 만난 적 있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글라스드 아이즈』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