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해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고통의 근원에 다가설 수 있을까?’
스물셋 되던 해 아빠의 폭력을 못 이겨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할 때까지 피해자가 내내 품고 있던 질문이었다.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는 이 절박한 물음에서 시작되었지만 종국에는 묵직한 사회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 모두가 알지만 어떻게 분류하고 명명해야 할지 몰랐던 폭력 범죄. 훈육, 엄부(嚴父) 같은 단어 뒤에 숨기도 했던, 물리적으로 끔찍하며 여러 사람의 인생을 밑바닥부터 파괴하는 ‘아버지 폭력’이다. 이 책을 쓴 김가을 작가에게 ‘폭력의 반대편으로 기어이 가고자’ 했던 그간의 과정 속에서 얻은 생각들을 들어 보았다.
가족 간 벌어지는 폭력 사건이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피해자가 겪은 잔인한 고통에 다들 울분을 쏟아내곤 합니다. 이러한 비극이 너무도 자주 반복되고 있고요. 흔히 이런 사건들은 ‘가정폭력’이라 불리거나 피해자가 아동일 때는 ‘아동 학대’라고 말해집니다. 이 책에서는 지금껏 쓰이지 않았던 ‘아버지폭력’이라는 개념을 새로 만들어서 작가님이 겪은 폭력에 대한 기억과 고통을 서술하고 있으신데요. ‘아버지폭력’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이 새로운 개념이 우리 사회에 왜 필요한가요?
‘아버지폭력’이라는 개념은 편집자님과의 대화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여성과 아동은 성인 남성에 비해 신체적으로 약합니다. 아빠가 엄마 또는 아이들이었던 저와 동생들에게 물리적으로 폭력을 가하면 힘으로는 막아설 수 없었습니다. 은폐되어 잘 드러나진 않지만 공공연하게 존재하는 학력?소득 수준에 따른 차별 대우, 가부장제, 남아선호사상, 과거 학교·군대 내 폭력이 폭력적인 남성을 만들어냅니다, ‘아버지폭력’이라는 말이 폭력의 주된 가해자인 ‘아버지’가 상징하는 사회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정이야말로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 큰 사람이 작아지고 작은 사람이 커지는 곳”(H.G. 웰스)입니다. 집 밖에서 시달린 몸과 마음을 위로받아야 그곳에서, 누구보다 스스럼없이 사랑을 나눠야 할 가족 간에 벌어지는 폭력은 인간의 마지막 안식처마저 파괴하고, 가족 구성원들을 극한 상황으로 내몬다는 점에서 가장 잔인한 범죄입니다. 가정 내 폭력 더 정확히는 작가님이 쓰신 표현으론 아버지폭력은 왜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될까요?
폭력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저도 찾아가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그래도 답을 찾아보자면 우선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기연민, 자기기만을 뒤섞으면 타인을 해치는 것일지라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논리가 나옵니다. 질문을 던지는 것은 피해자와 그 주위 사람에게도 필요합니다. 제 주변에 ‘폭력이 계속된다는 점이 이상하지 않니? 멈춰져야 하지 않겠니?’ 묻고 변화하려는 사람이 많았다면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스스로의 폭력성, 타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학교, 직장, 군대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약자에 대한 강자들의 폭력이 줄기차게 발생합니다. 지속적인 폭력 상황은 그것을 겪은 피해자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며 인간성의 어떤 부분을 파괴하는지요? 20여 년 넘게 폭력의 굴레 속에 갇혀 지내셨고 마침내 그로부터 벗어나셨던 작가님의 경험을 중심으로 말씀 부탁 드립니다.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누군가에게 손을 먼저 내밀 의지도 없어질 뿐더러 온기를 건네는 사람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스스로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관계든 일이든 시작하기도 전에 원한 적 없었다는 식으로 지레 포기하거나, 약해 보이기 싫어서 강한 척을 하거나 폭력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인해 타인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상처 받고, 더 벽을 쌓고, 절망하고 뒤틀리는 일이 반복될 가능성도 높습니다. 타인에 대한 믿음을 잃고, 불의한 일에도 체념하게 되며 삶을 이끌어 갈 주체성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는 김가을 작가님의 자전적 서사여서 흡인력, 몰입감, 감정이입이 뛰어납니다. 폭력을 바라보는 작가님의 시선이 주관적 내면화에 머물지 않고, 상처와 거리 두면서 객관적으로 사회화하는 장면들에서 저도 크게 공감할 수 있었고요. 특히‘폭력의 대물림’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동생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자기 자신의 내면을 용기 있게 끄집어낸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님 내면에서 무수한 갈등이 있었으리라 짐작되는데요?
네, 맞습니다. 죽음밖에 더 바라는 게 없을 때, 그래서 내일도 없고 사람들과 이어질 관계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이 책의 초고를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2020년 5월 즈음으로 기억합니다. 내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빠에게 당한 폭력만큼이나 글을 통해 성찰하고 싶었던 건 동생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제 내면이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믿고 싶지 않은 충격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잊을 수 없었고 나 스스로를 심판대에 올려놓지 않고 타인, 사회 탓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훈련을 통해 공격성을 낮출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어느 정도 변화시킨 후에도 타고나지 않은 ‘선함’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는 생각에 거짓말하고 죄 짓는 기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고백하고 벌 받고 싶었던 것도 같습니다.
작가님은 아버지폭력에 의한 자신의 고통을 해석하고 상처를 극복하시는 데 무엇보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애덤 스미스, 에리히 프롬 같은 사상가들부터 김중혁, 정세랑, 황정은 같은 소설가들까지, 폭력의 반대편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 많은 작가들이 책에 등장합니다. 폭력의 고통 속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책읽기와 글쓰기는 어떻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지요?
책을 읽다 보면 무수한 질문이 날아옵니다.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내 안에 풀리지 않던 응어리들이 조금씩 풀어집니다. 자신을 극복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재밌습니다. 재미가 ‘더 살아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되고 희망이 다시 힘이 됩니다. 김영하 작가님의 산문 『읽다』를 보면, 환상에 빠져 현실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목소리에 대해 "오히려 현실에 너무 집착해 자기 내면의 정신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는 아닐까?"라고 반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로 들리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나의 내면세계, 마음, 정신적 현실을 돌볼 때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 삶을 지탱해줍니다.
스물셋이 되어서야 용기를 내어 아버지를 112에 신고하고 임시보호소에서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6개월간 생활하고 독립을 하시면서, 겨우 아버지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책에서도 그려지듯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들이 말끔히 사라진 것은 아니시지만요. 지금도 어딘가에는 김가을 작가님처럼 아버지 폭력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아동, 청소년들이 있을 텐데요.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으신 말씀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제가 상담 선생님께 찾아갔을 때 들었던 말을 돌려주고 싶습니다. ‘신고해도 괜찮아요.’ 폭력적인 환경으로부터 벗어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를 먼저 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집을 나온다고 걱정이 모두 사라지진 않습니다. 그건 나온 이후에 천천히 풀어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적인 환경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정말 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 받고, 사랑을 주고 태어나기 잘했다 싶은 순간이 많아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 바라는 일이기도 합니다.
항상 묵직한 백팩을 메고 다니시면서 시간 날 때마다 책을 펴서 읽고 메모를 하시던데요. 저자 소개에도 “언젠가 내가 만든 읽기 공간을 갖는 게 꿈이다.”라고 하셨고요. 아직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작가님이 꿈꾸는 읽기 공간은 어떤 풍경이고, 어떤 책들이 꽂혀 있고, 거기서 작가님은 무엇을 하고 있으실까요? 지금부터 맘껏 상상하셔서 언젠가 그 꿈을 꼭 이루시길 응원하는 맘으로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드립니다.
읽기 공간, 상상만 해도 행복하네요! 원목 책장, 식물, 고양이, 커피 머신, 큰 창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리를 끌어모아 책을 읽고 있을 거고 언제 나갈지, 내일은 무엇을 할지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지금만 존재하는 것처럼 마음이 가는 문장을 펜을 꾹꾹 눌러가며 필사하고 싶습니다. 책장에는 민음사, 문학동네, 열린책들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이 꽂혀 있을 거예요! 좋아하는 가수 앨범, 다큐멘터리, 인터뷰집도 한편에 모아두고 싶습니다.
김현의 『사라짐, 맺힘』에 “사람들이란 혼자 있을 때는 제법 사람 같은 생각을 하다가도 여럿이 있을 때는 금세 달라진다.”라는 문장이 있는데요. 책을 앞에 두고 혼자 설 때 가장 정직해지고, 생각이 많아지고 풍요로워집니다. 제 여러 모습 중 책 읽는 모습이 가장 좋습니다.
*김가을 1997년 4월 16일에 태어나서 숫자 4를 좋아한다. 세종 과학고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했으나 인문학 공부와 활동을 더 많이 했다. 소설을 좋아하며 책을 매개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언젠가 내가 만든 읽기 공간을 갖는 게 꿈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많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영혼과 호기심을 상징하는 프시케를 좋아한다. 프시케의 어원이 숨과 호흡이라는 점도 좋다. 나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사람,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 좋다. 스물둘부터 스물넷까지 쓴 글로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라는 책을 얻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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