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의 창작과 독서] ‘결국은 인간 이야기’라는 말 (2)
부재함으로써 마침내 존재를 증명하는 어떤 존재들, 그것은 반드시 인간을 닮은 존재일 필요는 없다.
글ㆍ사진 김초엽
202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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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 존재를 중심에 놓기

배명훈 소설가의 단편 『안녕, 인공존재!』에는 조약돌처럼 생긴 인공존재 ‘조약’이 등장한다. 천재 공학자 신우정 박사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이 제품에는 아무런 입출력 장치가 없다. 전원을 연결해도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조약은 내부의 특수한 회로를 통해 존재를 추출한다고 (난해한 설명서를 통해) 주장하지만, 그것을 검증할 방법은 없다. 이경수는 품질검사를 부탁한다는 메모와 함께 친구의 유작을 전달받고, 이 쓸모없고 무신경한 기계에서 정말로 존재가 발생하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조약은 인공적인 존재이지만 인격적인 존재라고는 할 수 없다. 돌멩이 안에서 추출된 존재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존재하지만 외부와 어떤 감각 자극도 주고받지 않는다. 조약은 외롭고 고독하지만 그것이 조약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건 아니다. 인간만 외롭게 태어난 건 아니니까. 그러나 조약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님에도, 그 자체로 조약 바깥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조약을 통해 존재란 무엇인지 생각한다. 조약을 보며 어떤 존재를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존재가 부재하는 순간, 우주에는 균열이 발생한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나는 대학생 때 ‘대중문학의 이해’라는 수업에서 이 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외로운 인공존재에게 반해버린 나머지 감상문을 평소보다 훨씬 길게, 정성 들여 써서 제출했다. (그 감상문은 ‘다소 과한 해석인 것 같습니다’라는 교수님의 코멘트와 함께 A를 받았다. 아니, A0였나?) 그 이후에도 한참이나 마음에 인공존재를 품고 다녔다. 부재함으로써 마침내 존재를 증명하는 어떤 존재들, 그것은 반드시 인간을 닮은 존재일 필요는 없다.

열흘 전 작업실 이사를 준비하며 책장을 비웠는데, 텅 빈 책장을 보자 갑자기 이 작업실이 완전히 작업실이 아닌 곳으로 변모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책을 빼놓고도 며칠 더 작업실을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책상 앞에 앉아도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예전과 같은 공간이 아니었다. 책들의 부재를 깨달은 다음에야 책이 그 공간을 꽉 채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책의 존재가 작업실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경수 씨의 말을 빌려오자면 이런 거다. 



“존재라는 게 제자리에 있을 때는 있는지 없는지 눈치도 못 채던 거였는데, 사라지고 나서 그게 차지하고 있던 빈자리의 크기가 드러나니까 겨우 그게 뭐였는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는 거잖아요.”  _배명훈, 『안녕, 인공존재!』, 북하우스, 2010.

SF는 비인간 존재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에 탁월한 장르다. 세계를 이루는 어떤 구성요소―기술이든 시스템이든, 한 부유한 노인의 집에 살고 있던 깡통 로봇이든―를 없애거나 더하거나 비틀거나 부풀려서, 그러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존재감을 부각한다. 그것이 비인간 존재들을 인간처럼 여기거나 인격을 부여한다는 의미는 아님을 한 번 더 짚고 싶다. 우리는 지구, 행성, 동물, 기계 따위를 인격체로 상상하는 오랜 습성을 갖고 있지만, 그들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 위해 반드시 인간성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가장 인간을 닮도록 만든 기계들조차도 그렇다. 언젠가 로봇이 인간을 사랑하게 될지, 인공지능이 마음을 갖게 될지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어쩌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알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들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마음을 준다. 그럼으로써 그 존재들은 인간에게 막대한 위력을 행사한다.

첫 장편소설을 구상하면서 나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비인간과 인간은 항상 쌍방향으로 얽힌다. 인간이 만든 스마트폰은 다시 인간이 행동하고 관계 맺는 방식을 바꾼다. 팬데믹이 덮친 세계에서 마스크, 백신, 치료제, 진단 기술, 비대면 플랫폼은 감염을 통제하고 희생을 줄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사람들 사이 제대로 된 합의와 제도 없이는 기술과 도구도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여기서 인간과 기술 둘 중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무게를 실어주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불필요한 것 같다. 모든 테크놀로지는 인간과 함께 복잡한 연결망 위에서 작동한다. 



『지구 끝의 온실』을 쓸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장면도 그랬다.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같이 지구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점과 점 사이를 잇는 무수한 실선들의 이미지. 왜 그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왜 사람들은 무언가를 가지고 원래 살던 곳을 떠났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나중에야 덧붙었다. 그물망처럼 엮인 선들이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증명하는 이야기, 그것이 소설로 이어진 처음의 발상이었다.

멸망한 지구를 뒤덮을 비인간 존재는 무엇일지 정해야 했다. 추상적인 것보다는 실체가 있는, 물리적 형상을 지닌 무언가이기를 바랐다. 벌레, 박테리아, 곰팡이를 고려해봤지만 벌레는 너무 징그럽고 박테리아와 곰팡이는 너무 작았다. 그래도 식물은 여전히 나중 순위였는데, 일단 내가 식물에 별 관심이 없었고, 예전에 생물 수업을 들을 때도 식물 파트가 제일 지루했고, 관심 없는 것을 공부해서 쓸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인간 없는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번성할까?’

답은 분명했다. 불모지, 폐허, 무인도를 뒤덮어버리는 식물들. 식물은 이끼뿐인 황무지에서도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생산하며 환경을 만드는 개척자들이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물이 식물들에게 빚지고 있다. 일단 식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자, 내가 식물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내내 떠나지 않았다. 비인간 존재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하면서도, 정작 나도 그들의 힘을 제대로 알 생각이 없었다니.




소설에 등장하는 ‘모스바나’는 어디까지나 가상의 식물이지만, 그래도 나는 가장 있을 법한 형태로 이 식물을 묘사하고 싶었다. 일단 가상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이후, 밖에 나갈 때마다 예전에는 관심도 없던 잡초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식물 사진을 찍으면 정보를 알려주는 앱을 구독하고, 어떤 식물이 무성히 자라나 있는 장소라면 무조건 카메라를 들이댔다. 예전에는 ‘많이 자랐네’ 하고 무신경하게 지나쳐 갔던 풀들의 이름도 하나둘 알게 되었다. 식물 학명을 그럴싸하게 만들고 싶어서 『정원사를 위한 라틴어 수업』 같은 책을 뒤적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세밀화로 가득한 『식물 - 대백과사전』을 사서 책장 잘 보이는 곳에 자랑스레 꽂아두었다. 물론 그 아름답고 무거운 책은 집필에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래도 과정을 즐기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마침 제주로 두 번의 출장이 예정되어 있었던 터라, 식물원 탐방도 했다. 사실 SF는 가상의 장소를 배경으로 할 때가 많아서 자료 조사 명목으로 진짜 있는 장소를 방문할 기회는 흔치 않다. 마음 같아서는 말레이시아로 가는 티켓을 당장 끊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코로나19로 떠날 수 없어서 국내의 식물원, 특히 열대우림 식물들을 볼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녔다. 열대우림을 재현한 온실에 한참 머물면서, 자그만 팻말에 적힌 식물 이름을 휴대폰으로 메모해가면서, 쏟아지는 인공폭포 옆에서 축축하고 따가운 물소리를 들으며, 실내 가득한 풀과 흙의 냄새를 맡으며 소설 속 장면을 그려보았던 그 순간들. 분명 그전에도 식물원에는 여러 번 가보았는데, 완전히 달랐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세계의 어떤 풍경 하나가 나에게 문을 열어준 것만 같았다.

장편소설을 쓰는 동안 작업실 베란다를 차지했던(지금은 이사 때문에 부모님 집으로 옮겨진) 화분은 딱 세 개뿐이다. 테이블야자, 몬스테라, 아이비. 초보자가 키우기 쉽다는 종류로만 특별히 엄선된 그 식물들은 인간에게 막대한 위력을 행사한다고 하기에는 다소 소박한 모습으로, 물이나 햇볕을 과다하게 요구하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소설을 쓰면서 나는 매일 그들을 들여다봤다.

어느 날 몬스테라 줄기에 연두색 새순이 삐죽 올라왔다. 처음에는 하루가 다르게 쭉쭉 길어지는 것 같았는데, 뭉뚝하던 줄기 끝이 말린 잎사귀 모양으로 변하고, 잎이 천천히 느릿느릿 펼쳐지고, 다른 잎들만큼 색이 짙어지는 데에는 거의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식물을 직접 기르는 것이 처음이어서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말린 잎의 모양이 궁금해서 손으로 슬쩍 펼쳐볼까 하다가 가만히 놔두었다. 잎을 낸 건 몬스테라인데 왜 내가 이렇게 뿌듯해하는지. 작업실로 출근하면 곧바로 베란다 문부터 열고 새 잎을 구경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낯선 생물이, 한 달에 걸쳐서 나에게 단 한마디의 말을 건네온다면,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에는 이렇게나 다른 시간 규모가 존재한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던 그 사실을, 나는 한 달 동안 매일매일 몬스테라 화분을 들여다보고서야 실감했다.

만약 인간과 다른 시간 규모를 지닌, 아주 빠른 시계를 가진 외계인이 지구에 도착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이 자신의 기준으로는 지구인이 너무나 느리게 움직이고 거의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지구인은 불활성 물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지구인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착취한다면 그 얼마나 부당한 일일까.



*이 에피소드는 『매혹하는 식물의 뇌』를 쓴 스테파노 만쿠소가 지인에게 해준 이야기로, 실제로는 <스타트렉>의 한 에피소드―내적 시계가 극단적으로 가속화되어 있는 ‘스칼로시안’이라는 종족이 등장하는―가 저자의 기억 속에서 무작위로 재구성된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 이야기가 마치 인간이 식물을 대하는 것과도 같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지금 창밖에 보이는 저 정적인 나무들조차도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인간은 아주 한정된 시공간 규모 안에서 살아가는, 그 규모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감지하지도 못하는, 작은 행성의 조그만 한 종족에 불과한 것이다.

어쩌면 좀 과다하게 부풀려온 인간존재의 중요성을 조심스레 축소해 제자리에 되돌려놓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지각과 감각의 한계를 잠깐이라도 넘어보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SF는 인간중심주의라는 우리의 오랜 천동설을 뒤집는다. 지동설의 등장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아니, 지구가 움직인다니, 고작 수많은 천체 중 하나에 불과하다니, 그게 말이 돼? 그래도 저 하늘이 우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태양이 움직이고 별들이 움직이는데. 그걸 내 눈으로 봤는데…… 마찬가지로 SF를 읽으며 인간이 잠시 변두리에 놓이는 경험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우리는 인간이 비인간 존재들과 동등하게 다뤄지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다가도, 그래도 이건 결국 인간 이야기인데…… 하며 아늑한 천동설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게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고, 우리는 거기서 완전히 떠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SF가 수행하는 그 불완전한 시도들을 좋아한다. 지구의 밤하늘에만 달이 뜨는 것이 아니라, 달의 하늘에 지구가 뜰 수도 있음을 알았을 때, 그 장면을 사람들이 사진으로라도 직접 목격했을 때 그들이 지녔던 지구에 대한 인식은 약간은 반드시 변했을 것이다. 강한 중력이 몸을 납작하게 만드는 행성에서의 삶을 상상하는 것, 땅속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의 관점을 경험하는 것, 아주 낯선 모습의 외계 생명체와 최초의 접촉을 하는 것, 그런 간접경험들은 우리가 발 디딘 이 지상에서 한 번쯤 떠나게 만든다. 한 번이라도 떠났다 돌아오는 것과 아주 떠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일단 저 밖에 있는 세계를 경험하고 오면, 남은 평생 인간의 관점에 매여 살아간다고 해도, 적어도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연결망의 한 점으로, 조그만 구성요소로, 수천 수만 가지 현실의 단면 중 오직 일부만을 감각하는 한 종으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생각하게 된다.

우주에서 바라본 작고 푸른 점, 행성 지구에 관해 칼 세이건이 했던 말을 나는 자주 떠올린다. “그 작은 점을 대하면 누구라도 인간이 이 우주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유일한 존재라는 환상이 헛됨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위대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단지 이 작은 행성의 일부에 불과하기에, 살아가는 동안 이 행성의 이웃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기에, 우리가 지닌 좁은 이해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히고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방법을, 상상하고 또 읽는다.


*스테파노 만쿠소, 알레산드라 비올라, 『매혹하는 식물의 뇌』, 양병찬 옮김, 행성B, 2016. 마이클 폴란 추천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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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소설가. 1993년생. 포스텍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생화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2017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쓴 책으로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원통 안의 소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