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엉뚱한 질문을 하나 해보려고 한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맨발로 바깥에서 뛰어 본 적이 있는가? 더운 여름 평소보다 날렵한 신발을 신어서 발이 드러난 적은 있겠지만, 그 또한 온전히 맨발인 채는 아니었을 거다. 실제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대부분 우리는 맨발로 걷거나 달리지 않을 것이다. 의식주는 인간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단위라고 배웠으니까.
그런데 여기, 종종 온전히 신발을 벗고 맨발로 뛰는 여인 로즈가 있다. 로즈는 전 남편이 자살한 후 여성스러운 행동으로 ‘게이’라는 놀림을 받는 아들과 어렵게 살아가던 중 목장 운영자 조지를 만나 재혼한다. 재혼과 동시에 로즈는 더 이상 무례한 손님들을 견디며 식당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무성영화관에서 종일 피아노를 치던 그 아름다운 시절로 되돌아가면 된다. 그런 로즈의 삶을 축복이라도 하듯 조지는 그녀의 만류에도 그랜드 피아노를 선물한다. 그러나 한 무리의 카우보이들이 옮기는 피아노를 보는 로즈의 눈빛은 어쩐지 불안하기만 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로즈의 알 수 없는 불안은 점차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알코올 의존으로 구체화 된다.
사실 로즈는 원래 알코올의존증이 아니었다. 이는 목장 안에 있는 또 다른 인물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점차 위태로워지는 로즈를 보며 비웃음짓는 그 누군가는, 제국 같은 거대 목장의 카우보이들을 통솔하는 조지의 형 필이다. 카우보이들은 젠틀한 조지보다 필의 폭력적인 언행에 호응하고 그의 명령에 즉각 반응한다. 그리고 이 숨은 권력자가 로즈를 잠식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에게 로즈는 위대한 서부 카우보이들이 건설한 목장의 돈을 노리고 들어온 좀도둑 같은 존재기 때문이다. 이런 필이 로즈를 괴롭히는 방법은 교묘하고 다양하다. “무성영화관이나 주지사 앞이나 별반 다를 것 없잖아?” 이것은 중요한 초대 손님인 주지사 부부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지 못한 로즈를 두고 필이 하는 말로써, 얼핏 기죽을 필요없다는 격려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이 그 말을 함으로써 로즈는 되레 권력 앞에 벌벌 떠는 인간으로 확정된다. 필과 로즈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듯, 영화 속에서 대부분 필은 로즈를 내려다보고 있다. 로즈가 어설프게나마 피아노를 연습할 때도 필은 윗층에서 로즈를 현란한 악기 연주로 로즈를 무안 준다. 필 때문에 불안해진 로즈가 술을 찾을 때도 그는 한 계단 위에서 말없이 로즈를 내려다본다, 마치 죄 많은 침입자를 처벌하려는 정직한 대법관처럼 말이다. 그렇게 로즈를 내려다보는 권력자 필의 발에는 항상 ‘이것’이 신겨져 있다.
바로, 부츠. 서부 개척기 인디언들의 땅을 짓밟고 자연을 훼손시키던 정복자의 발에 신겨져 있던 그 부츠는 필의 발에도 그대로 신겨져 있다. 이 부츠는 카우보이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영화 중반 이후 자신과 유사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로즈의 아들 피터에게도 ‘부츠를 신을 것’을 강조하기도 하는 장면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필의 부츠와 로즈의 맨발이 갖는 대비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극대화된다. 영화의 말미, 자신의 아들인 피터를 욕망하는 필에게 로즈는 작은 복수라도 해보고자 그가 애지중지하는 가죽을 인디언에게 팔아버린다. 가죽을 팔기 위해 인디언을 따라가면서 로즈는 신발을 내던지듯 벗어버린다. 그런데 이 맨발의 로즈가 불러온 나비효과는 생각지도 못한 결말을 가져온다. 그것은 필과 피터의 사랑의 맹세도 아니고 로즈와 조지의 파탄도 아니다. 그것은 필의 죽음이다.
사실 로즈가 팔아버린 가죽은 필이 피터에게 건넬 밧줄을 만들 재료였다. 그로 인해 필은 더욱더 로즈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는데, 이를 지켜보던 로즈의 아들이자 필의 사랑(으로 추측되는)인 피터는 필에게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소가죽을 건넨다. 필은 밤새 피터가 건넨 가죽을 맨손으로 만지며 밧줄을 만든다. 다음 날, 필은 쉽게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목장이 아닌 병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때 그의 발엔 부츠가 아닌 구두가 신겨져 있다. 죽음 앞에서야 부츠를 벗게 된 그의 발. 만약 로즈가 구두를 벗어던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떠나는 인디언에게 가죽을 팔지 않았더라면 영화 속에서 필은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영화를 본 모두가 알다시피 그의 발에서 부츠를 벗긴 것은 로즈가 아니다. 필의 감염원으로 추측되는 것은 의학을 전공하여 손으로 전파되는 병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던,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욕망이 삶을 앞서고 있는 필을 궤뚫고 있던 피터가 건넨 가죽이다. ‘토끼를 좋아하지만 필요하면 해부할 수도 있는’ 피터는 자신 또한 필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을지언정 그에게 굴복하지는 않는다. 피터는 필이 가진 남성성을 답습하는 것보다는 그 반대편에서 가스라이팅 당하는 로즈를 구출하는 것을 선택한다. 물론 그 방법은 칼이나 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멋대로 장악한 곳에서 훼손된 동물의 사체를 만지게 하는 것뿐. 그래, 그렇다면. 결국 이 정복자의 부츠를 벗긴 것은 인간의 ‘사랑’이었을까.
헌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터가 읽는 성서의 한 구절을 들으며 나는 퍼뜩 피터가 개의 형상을 한 산과 산 사이에서 소의 사체를 발견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째서일까, 그 소의 사체는 필이라는 정복자의 발아래서 불안에 떨던 로즈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랜 시간 편견과 혐오로 가득 찬 인간의 역사에서 반복시킨 고정된 이미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 말했듯이, 훼손당한 동물의 신체는 주로 장애를 입은 인간의 신체에 비유되었고 이는 비 인간/여성의 신체와도 연결되어 왔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필의 부츠를 벗긴 실체가 무엇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의학적으로 필을 죽음으로 몬 것은, 결국 로즈도 피터도 아닌 소의 가죽이었으니까. 결국 정복자의 부츠는 그들이 정복했다고 믿었던 ‘무엇’이었다. 그것이 사랑이든, 자연이든 항상 정복자들이 ‘정복’했다고 떠들어대는 것으로부터 그들의 부츠는 벗겨졌고 그들은 결국 무너졌다. 이 영화에서 최후의 사랑을 쟁취한 것은 정복자의 반대편이다.
*이는 ‘남성성/들’에서 주지하듯, 남성성 중에서도 유독 지배적인 위치를 갖는 패권적 남성성이 존재하며, 이 남성성은 다양한 '위기' 국면에서도 끊임없이 재구성되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켜 왔다고 가리키는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필은 자신이 동경하고 사랑했던 남성의 가르침을 그대로 답습하였고 다시 이것을 피터에게 학습시키려 한다. 특정한 복장을 통한 이 구분짓기는 가령 1차 세계대전 당시 트렌치코트를 예로 들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영국 엘리트 군인들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트렌치코트는 전쟁이 끝난 후 일반/비 엘리트/ 여성들에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다. 이 ‘복장’을 착용함으로써 일반/비 엘리트/여성들이 나라를 위해 전쟁을 참여했다는 칭송을 받는 엘리트 남성 군인들의 세계에 동참할 수 있는 정서적인 승인이 함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영화에서 필이 피터에게 부츠를 신기를, 말을 타기를 강조하는 것을 남성성의 계승으로만 보기 조심스러운 것은 클로짓 게이인 필에게 이 구분/구별 짓기는 정체성 드러내기의 한 과정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방향성의 한계로 양해해주시길 부탁드린다. |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한정현(소설가)
한정현 소설가.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