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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의 영화적인 순간]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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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맹목적인 쿠미코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우리는 이것이 궁금하다. 그래서 영화 속 쿠미코는 현실의 이야기와는 달리 천신만고 끝에 돈을 찾아냈을 것인가? (2022.01.04)

영화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의 한 장면

“아이 원 투 고 파고”  

_ 영화 <쿠미코, 더 트레저 헌터>의 대사 중


고도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니까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말이다. 나는 20대 때 <고도를 기다리며>를 네 번 정도 보았다. 워낙에 긴 연극이기도 하고, 또 의자가 아닌 바닥에 앉아야만 하는 산울림소극장이었기에 매번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늘 고도를 기다렸다. 왜 그랬을까, 거의 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고도라는 인물을 나 또한 기다린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사무엘 베케트는 이 작품을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이 끝나길 기다리던 자신의 모습에 착안하여 썼다고 한다. 그러니 고도, 그것은 단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어떤 희망과 꿈, 마음의 다른 호명이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 또한 나만의 고도를 간절히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이것 또한 안다.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 누구도 고도를 보지 못했기에 오히려 모두가 고도를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전쟁이 끝난 후의 베케트라면 더 이상 고도를 기다리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 당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베케트는 그저 고도를 ‘기다릴 수’ 있었겠지만, 아직 희망이라는 선택지가 있던 20대의 나는 고도를 ‘기다릴 수도’ 있었겠지만, 2021년 현재를 사는 나는 이제 그저 고도를 기다릴 수가 없다. 2021년 『고도를 기다리며』가 다시 쓰인다면, 아마도 고도가 오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던 길 위에서 주인공은 달려오는 무리에 치이거나 고도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을 앞지르기 위해 가쁜 숨을 참아내는 것이 2021년 새로운 고도를 기다리며의 결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를 사는 나에게, 우리에게 이제 ‘기다리는’ 선택지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역시, <쿠미코, 더 트레저 헌터>의 쿠미코가 자신을 압박하는 삶 속에서 더는 희망을 바라지 않고 영화 <파고>의 보물을 찾으러 간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아주 먼 이야기만은 아닌 셈이다. 

짐작했겠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쿠미코이다. 그녀의 나이는 29세. 직업은 비서. 특이사항이라면, 서비스직이라 할 수 있는 비서직에 종사하지만 전혀 웃지 않는다는 것이랄까. 그런 그녀는 집에서 라면만 먹는다. 반려토끼에게도 라면을 먹인다. 저녁을 먹은 후엔 창문을 통해 건너편 집에서 춤을 추는 남녀의 모습을 길게 바라본다. 그리고 이쯤 등장하는 그녀의 진정한 특이사항이 있다. 쿠미코는 매일 밤 같은 영화를 본다. 쿠미코는 영화 <파고>의 비디오를 어느 동굴에서 주웠다. 쿠미코는 그 비디오를 돌려보았고, 또 돌려보는 중이다. 이유는 하나, 그녀는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라는 영화 <파고>의 소개글을 ‘현실이다’라는 것으로 잘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쿠미코가 ‘현실’이라고 믿는 <파고>의 내용은 이것이다, 미국의 어느 지역에 엄청난 돈이 묻혀 있다는 것. 쿠미코는 그곳이 실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다. 쿠미코는 돈이 필요했다.

전쟁이 끝나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평화를 원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쿠미코를 비꼬던 회장의 말처럼) 연애의 상대자가 나타나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쿠미코는 단 하나가 필요하다. 마음도, 미래도 아닌 오로지 돈. 그것도 현재의 돈이 말이다. 

왜냐면 쿠미코는 곧 직장에서 짤릴 예정이며 친구도 애인도 없고 당연히 모은 돈도 없다. 쿠미코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회장 앞에서조차 잘 웃지 않았고 사내 뒷담화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정도다. 게다가 쿠미코가 모시는 회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쿠미코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비서직에 이미 나이가 ‘너무’ 많은 사람이다. 회사 사람들은 쿠미코에게 대놓고 욕을 하거나 폭력을 가하진 않지만,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있다. 회사 사람들이 쿠미코를 ‘모욕’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렇다면 가족들은 어떠한가. 쿠미코의 엄마는 전화만 했다하면 결혼 언제 할 거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들어가지 않은 29세의 쿠미코에 대한 무시가 깔려 있다. 그러니까 그런 쿠미코에게 <파고>란, 아니, <파고>의 돈이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구원자이다. 평화, 이루지 못할 꿈, 희망, 더 나은 내일…… 고도는 그런 것을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 내일 회사에 짤리고 가족에게 돌아갈 수도 없는 쿠미코에게 소중한 것은 바로 <파고>에 등장하는 ‘돈’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쿠미코가 그 돈을 찾으러 가는 과정은 말 그대로 녹록지 않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회사 사람들이나 가족, 친구보다 쿠미코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호의가 한결같이 ‘따뜻한 집’,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과 같은 ‘보편적인 것으로의 편입’에 가깝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는 영화일 뿐이다”라는 도서관 보안 직원의 말에 쿠미코가 “사람에게 정해진 삶은 없다”라고 반문하게 될지라도, 적어도 그들은 쿠미코의 회사 사람들이나 가족들과 같이 보편적으로는 ‘가까운 관계’라고 규정된 사람들처럼 쿠미코에게 대놓고 폭력과 혐오를 내비치지 않는다. 그들은 쿠미코를 감싸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영화 <파고>가 허구의 미디어라는 사실 또한 알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무시와 혐오, 폭력의 그늘 속에 있던 탓일까. 처음으로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을 만나지만 쿠미코는 그들을 뒤로 하고 <파고>의 ‘돈’을 향해 나아간다. 따뜻한 집을 내어주겠다는 할머니의 말을 흘려 듣고, 옷을 사주겠다는 경찰관의 호의를 거절하며 쿠미코는 모텔 이불을 망토처럼 두르고 눈밭을 헤맨다. 오로지 영화 <파고>의 돈이 묻혔다는 그곳을 향해 말이다. 


영화 <쿠미코, 더 트레저 헌터> 공식 포스터

이 영화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는 실제 미국에서 영화 <파고>를 보고 돈을 찾으러 여행을 떠났다가 실종된 일본인 여성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다루고 있다. 물론 그 일본인 여성의 이야기는 훗날 미국 경찰이 잘못된 정보를 흘린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딱히 증거를 대며 밝힌 것도 아닌 경찰의 말을 모두가 믿었다는 사실은, 누군가 생존을 위해 돈을 찾으러 목숨까지 각오하며 오지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지금 이 시대에 결코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자, 그렇다면. 

이 맹목적인 쿠미코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우리는 이것이 궁금하다. 그래서 영화 속 쿠미코는 현실의 이야기와는 달리 천신만고 끝에 돈을 찾아냈을 것인가?

영화의 말미, 온전히 본인의 힘으로 나아간 그 눈밭에서 쿠미코는 결국 미소 짓는다. 물론 그 미소가 가리킨 것이 실제 묻혀있던 돈을 발견한 덕분인지 아니면 그제서야 자신이 ‘생존’이 아닌 ‘죽음’을 향해 달려왔다는 걸 깨달은 까닭인지는 오로지 쿠미코 자신만이 알 것이다. 다만 단 하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이것일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던, 기다릴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저물어버렸다는 것.

아니, ‘쿠미코’ 같은 사람에겐 애당초 그 어떤 선택지도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쿠미코가 스물아홉인 것이, 잘 웃지 않는 여자라는 것이, 결혼을 안 한 사람이라는 것이, 사회생활을 잘 못 한다는 것이 실은 쿠미코의 잘못이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사회의 기준인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위협하지도 않았고 회사에 누를 끼치지도 않았으며 가족에게 독립하지 못한 것도 아닌 쿠미코가 그저 사회의 기준에 미달이라는 이유로 결국엔 차가운 눈밭으로 내몰려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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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정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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