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축구, 술, K-축제. 지금까지 작가 김혼비가 다룬 주제다. 어쩌면 비주류로 여겨질 소재를 펄펄 뛰는 월척으로 담아낸 김혼비의 글맛. 그의 네 번째 글감이 ‘다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짐작하건대 가장 김혼비다운 이야기이겠다고 생각했다. 『다정소감』은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작은 감상이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김혼비가 다정한 마음으로 쓴 산문들을 그러모은 책. 재밌게도 이 책을 쓰는 동안 김혼비는 또 다른 편집자에게 ‘다정’을 주제로 책을 써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가식을 응원하고 싶다
김혼비와 다정이라니! 출간 소식을 듣고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부담감도 있지 않았나요? 사람들에게 더 다정히 다가가야 할 것 같은 책임이랄까요.
부담 이전에, 책을 만들 때 편집자님이 주제와 소재가 제각각인 산문들 속에서 ‘다정’이라는 키워드를 바로 집어내셨고, 책에도 ‘다정’이라는 단어를 딱 박게 됐는데요. 정작 제가 다정한 사람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산문집을 낸다는 것 자체가 두려웠어요. 그동안 늘 하나의 주제를 향한 책만 써와서 이렇게 여러 주제를 아우르는 책은 감이 안 왔어요. 심심한 것 같다가도 산만해보이고, 너무 진지하기만 한 건 아닌가 싶다가도 너무 가볍지 않나 싶고.
하지만 김혼비의 다정을 여러 번 목격한 사람이 많아요. 짧은 문자, 짧은 이메일에서 또 팟캐스트 녹음 현장에서도요.
앗, 그런가요? 이 인터뷰가 나가고 나서부터야말로 진짜 책임감을 가져야겠네요(웃음) 문득 생각났는데 『다정소감』을 한창 쓰던 중에 추천사 때문에 어느 편집자 분과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요. 마침 저에게 ‘다정’을 주제로 책을 써보자고 제안하셨던 신기한 우연이 있었어요. 심지어 '다정소감'이라는 제목을 확정지은 지 정말 며칠 안 지났을 때였는데.
여자 축구, 술, 전국 축제 등 그간 써온 글을 보면 모두 주제가 선명했잖아요. 다정은 좀 다른 느낌이에요. 어쩌면 더 비주류인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오히려 ‘다정’이라는 키워드가 이미 많이 나왔다고 생각해서, 특히 에세이 분야에서는 약간 포화상태가 아닌가 싶어서 고민이 많았어요. 조금 다른 결의 다정을 담고 싶었어요.
기억에 남는 리뷰가 있나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때부터 저를 굉장히 응원해주셔서 마음속에서는 이미 친구처럼 느끼고 있는 N이라는 독자가 계신데요. 그분이 최근에 『다정소감』을 읽고 이런 글을 써주셨어요. “누구에게나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는 감정적 태도가 ‘다정’의 전제라면 다정한 내 의도가 받는 이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겸손이 ‘소감’이라는 행위를 결정한다”라고. 이 말이 되게 좋았어요. 이걸 앞으로 삶의 모토로 삼아도 좋겠다 싶을 만큼이요.
「가식에 관하여」라는 글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식은 어쩌면 필수 조건인데 자괴감이 들 때가 많죠.
고민 상담을 듣다 보면 “내가 사라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스스로를 너무 가식적이고 위선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게 좀 안타까워요. 가만히 듣다보면 사실 잘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스스로가 사라지는 느낌을 안 가지려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는데, 주변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그렇게 못하잖아요. 삶은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지 않지만 굳이 단순화시켜서 표현했을 때 선과 악의 두 갈래 길에서 가식일지언정 선한 선택을 하면, 그리고 그런 가식적인 선택들이 계속 쌓이면, 점점 자기 안에서 선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붙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종류의 가식은 계속 응원하고 싶어요.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있나요?
잠을 잘 자려고 노력해요. 저에게는 여기서부터가 시작인 것 같아요. 몸과 마음이 피곤하지 않고 여유 있는 것. 갑자기 누군가에게 달려갈 일이 생기거나 밤을 새워도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와줘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있는 상태였으면 좋겠어요.
기본적으로는 건조하게 살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선배로서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평소에는 별 존재감 없다가 필요할 때 손 뻗으면 늘 있는 곽 티슈 같은 사람이요. 선배의 역할은 딱 그 정도가 적절한 것 같아요. 아니 그 정도만 되어도 무척 훌륭하죠.
스스로를 까칠하고 다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까칠함은 ‘정확하게 다정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자질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에 두루두루 다정하다 보면 때로는 그 어떤 것도 지켜낼 수 없어요. A에게 다정하기 위해서, A라는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서 A가 아닌 다른 어떤 것들에 까칠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거든요. 『다정소감』의 어떤 글들도, 어떤 위치에 서서 보느냐에 따라 다정하기도 하지만 무척 까칠하기도 한 것처럼요. 제가 지금 까칠하게 굴어서 지켜내거나 바꿔가는 어떤 관습이나 규율이 제 뒤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세계의 토대를 만들 수 있기도 하고요. 위악에 가까운 까칠함이나 목적 없는 까칠함은 주변도 본인도 해칠 수 있지만, 넓은 틀 안에서 따져봤을 때, 나의 까칠함이 누군가에게 다정한 세계를 만들어주는 미래를 조금이라도 떠받치고 있다면, 까칠함으로서 다정하고 있다고 믿으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 까칠함들에 진 빚들이 정말 많고, 그래서 저는 목적 있는 까칠함들에 진심으로 고마워요.
조언이 점점 터부시되는 게 불안해요
프로필 문구에 “여전히 백지 앞에서 낯을 많이 가린다”고 쓰셨어요.
기본적으로 글을 무서워해요. 완성하기까지 오래 걸리고요. 글이 무서워서 항상 예전에 쓴 원고(파일)를 열어서 그 위에 덮어 써요. 은유적인 표현만이 아니라 시각적인 두려움이 있어요.
문장에 관한 고민도 하나요?
글쓰기 책에서 이렇게 쓰지 말라고 하는 것들을 너무 많이 쓰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웃음) 예전에 글쓰기 강좌들을 다녀봤는데요. 항상 지적을 많이 받았어요. 너무 쓸데없는 말장난도 많고 비유도 많고 문장부호도 턱턱 쓰고 만연체라고. 피드백이 항상 좋지 않았어요.
고쳐본 적도 있나요?
그럼요. 그런데 시키는 대로 쓰니까 재미가 없더라고요. 글쓰기 강좌에 다닐 때는 딱히 작품을 쓰고 싶다거나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고, 그냥 지금보다 조금 더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다녔던 건데요, 재밌자고 쓰던 글이 글쓰기 선생님들의 조언을 다 수용해서 문장도 짧게 끊어 쓰고, 접속사 부사 형용사 비유 드립 다 빼고 쓰려니까 재미가 없는 거예요. 굳이 이렇게 써야 한다면 꼭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싶어서 언젠가부터 강좌를 안 나갔어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은 김혼비의 문장을 고쳤으면 나오지 않았을 책이에요.
첫 책의 초고를 편집자께 보낼 때 걱정이 많았어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를 만들어준 분이 서효인 편집자인데 시인이고 또 문장을 명징하게 쓰는 분이라서요. 내 글에 엄청 빨간 줄이 그어져서 오겠구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개성이라 여기고 살려 주셨어요.(웃음) 저의 군더더기 많은 세계관을 스타일로 존중해주시고 보존해 주셨죠.
『다정소감』도 같이 만드셨고요.
네, 저에게는 되게 고마운 사람이에요. 첫 책에서 깊이 신뢰하는 누군가로부터 내 글이 책의 언어로 통과될 수 있다는 걸 겪지 못했다면 아무 책도 쓰지 못했을 거예요. 덕분에 두 번째 책도 제 개성에 관해 좀 더 믿고 신나게 쓸 수 있었어요.
독자로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김혼비식 유머를 살려 주셔서.
(웃음) 저는 확실히 B급 느낌이 묻어나는 A급 문장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요. 누가 보면 “B급이야, 유치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리고 “뭐 한두 문장이면 될 걸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써?”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런 장치를 일부러 넣는 게 좋아요. 추천했다가 원망을 사곤 하는 책이기는 하지만(웃음) 기타오지 기미코의 글을 정말 좋아해요. 딱히 교훈도 메시지도 없고 정말 사소한 이야기를 만담처럼 장황하게 가끔은 좀 과하다 싶게 익살을 부리며 쓰는데 사실 저는 이런 글을 쓰고 싶고 이런 글에 굉장히 끌려요.
『다정소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어요. “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할 만큼 두렵다.”(75쪽) 평소 충고, 조언을 듣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네. 저는 조언을 정말 받고 싶어요. 제 커다란 콤플렉스이자 단점이기도 한데요. 저는 주로 제 의견에 대해서 자신이 있기보다는 ‘어, 내가 틀렸나?’ ‘내가 놓친 게 있나?’라는 불안을 먼저 갖는 편이에요. 확신을 갖기까지 레퍼런스를 많이 찾아야하는 타입이고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 의견을 가능한 많이 모으고 싶어 해요. ‘확신의 외주화’라고 할까요? 그래서 조언이 점점 터부시되는 게 불안해요. 받아들이든 아니든 일단 소스는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현재 직장을 다니면서 글을 쓰고 계시잖아요. 전업 작가를 해볼 생각은 안 하셨나요?
오히려 반대예요. 저는 아직도 글을 쓰는 일이 제 직업이라기보다 제 인생의 어느 특정 시기에 잠깐 하고 있는 어떤 이벤트 같은 느낌을 갖고 있어요. 이를테면 제가 한때는 팬픽을 열심히 썼지만 그 시기가 지나가고 나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것처럼, 관심사가 완전히 다른 곳으로 넘어간 것처럼 에세이를 쓰는 일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싶고. 글 쓰는 일은 언젠가 끝점이 있을 것만 같고. 가끔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선뜻 답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내가 3~4년 후에도 글을 쓰고 있을까?’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이 없어서예요.
꼭 쓰고 싶은 책이 인터뷰집이라고요.
네, 예전에 그렇게 말했었는데요. 근데 사실 제가 하고 싶은 게 인터뷰인지, 인터뷰집을 쓰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이 두 가지는 커다란 차이여서 계속 고민해보고 있어요.
코로나가 끝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다른 지역의 축제에 가고 싶어요. 축제장 특유의 분위기가 너무 그리워요.
*김혼비 여전히 백지 앞에서 낯을 많이 가린다.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고 싶어서 자꾸 그 위에 뭘 쓰는 것 같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전국축제자랑』 등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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