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상상으로 문명을 창조해 낸 호메로스
호메로스는 서사시의 상상을 통해 먼 옛날의 전쟁과 영웅들을 마치 어제의 인물들처럼 불러내고, 이를 배경으로 인간과 신,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의 얼굴들을 그려냈습니다.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2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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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의 출현 과정, 내용, 수용 과정 등을 살펴보는 일은 과학과 기술이 하지 않는 것, 즉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입니다. 저는 이런 회고적 성찰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필요한 서사적 상상이 어떤 것이고, 우리의 공동체적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호메로스는 어떻게 전체 그리스의 교사가 될 수 있었을까? 건축, 조각, 회화 등 그리스 문명을 대표하는 어떤 분야도 과거를 바탕으로 한 호메로스의 상상 세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일리아스』, 호메로스의 상상 세계』는 문명의 창시자 호메로스를 밝혀내는 동시에, 서양 지성의 시원이 된 『일리아스』에 대한 하나의 완결된 상을 제시하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최초로, “완전한 적대 관계”라고 불리는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관계를 조명하며 문학으로 철학을, 철학으로 문학을 이해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한다. 상반된 기억에서 비롯된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플라톤의 철학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 이 책을 쓴 조대호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이 책을 통해 호메로스와 그가 그려 낸 그리스 서사시들이 서양 문화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쉽고 명쾌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을 『『일리아스』, 호메로스의 상상 세계』로 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특히, 제목 속 “상상 세계”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인간은 ‘상상하는 동물’입니다. 우리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뛰어난 상상력 덕분에 이미 지나간 과거를 기억해 내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희망합니다. 이렇게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오가는 정신의 능력인 ‘상상력’이 없었다면, 인간의 삶은 지금처럼 다채로운 모습을 갖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리아스』는 과거에 대한 상상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서사시입니다. 호메로스는 서사시의 상상을 통해 먼 옛날의 전쟁과 영웅들을 마치 어제의 인물들처럼 불러내고, 이를 배경으로 인간과 신,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의 얼굴들을 그려냈습니다. 그리스 문명에 터전을 제공하고, 나아가 서양 문명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일리아스』의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삶에서 이야기 속의 상상이 갖는 엄청난 힘을 강조하기 위해서 ‘호메로스의 상상 세계’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 책은 『일리아스』와 『국가』를 비교하며,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플라톤의 철학을 함께 조명하는 기획의 첫 권입니다. “완전한 적대 관계”라고 불릴 만큼 다른 세계관을 가진 시인 호메로스와 철학자 플라톤의 관계를 다루는 국내 최초의 책일 텐데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신 계기가 있을까요?

저는 30대를 독일에서 보내면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호메로스를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또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 건물 출입문 양쪽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좌상과 호메로스의 좌상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지요. 호메로스에 대한 관심은 그때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서양고전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세미나와 강의에서 호메로스를 자주 다루었습니다. 또, 제 논문을 지도하셨던 볼프강 쿨만 교수님은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호메로스 연구에서 일가를 이룬 최고의 학자셨기 때문에 이분이 개설한 컬로퀴엄에서 많은 동료들이 호메로스에 대해 발표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호메로스에 대한 책을 쓸 생각은 하기 어려웠습니다. 귀국 후 주로 철학 분야의 강의와 연구를 하는 상황에서 호메로스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들을 섭렵하고 새로운 주제를 찾아내어 연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호메로스에 대해 쓴 좋은 책을 번역하면 그 정도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7~8년 전부터 기억과 상상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플라톤 철학과 비교하면 새로운 연구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진리에 대한 인식을 기억의 되살림, 즉 ‘상기’라고 부르면서 이 기억의 대상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이데아의 세계에서 찾습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철학은 역사적 과거의 세계를 기억과 상상의 대상으로 삼아 서사시 속에서 재현한 호메로스의 문학과 다릅니다. 그리고 그런 차이는 세계관의 대립으로 이어집니다. 그동안 플라톤의 대화편들과 호메로스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이런 ‘가설’에 대해 검토했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연구와 생각들을 모아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플라톤과 호메로스 사이의 대립 관계를 다룬 연구가 국내는 물론 국외에도 전혀 없다는 사실도 연구의 의욕을 자극했습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호메로스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대립 관계를 다룬 연구가 없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제 프로젝트의 목적은 ‘기억 투쟁’, ‘서사적 상상과 철학적 상상의 대립’을 배경으로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관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플라톤을 통해서 호메로스를, 호메로스를 통해서 플라톤을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문학을 통해서 철학을, 철학을 통해서 문학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상호조명을 통해서 서양 사상사의 두 가지 큰 흐름을 갈라낼 수 있고, 나아가 이 흐름들이 21세기 인간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재현되는지를 읽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안에서의 고전 읽기에서 벗어나, 구술 서사시 전통으로부터 『일리아스』가 어떻게 출현했는지, 올륌포스 신들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신앙은 어떠했는지, 작품의 핵심이 되는 영웅주의와 죽음 이후의 세계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등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어 흥미로운 독서였는데요. 선생님께서 집필하시면서 가장 집중하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듯이 책의 모든 부분이 치열한 고민의 결과이고, 그래서 모두 소중합니다. 하지만 특히 공을 들인 부분을 꼽자면, 「덧말: 『일리아스』의 트로이아 전쟁, 역사인가 상상인가?」를 고를 수 있겠네요. 트로이아 전쟁의 역사성을 놓고 그동안 많은 논쟁이 있었고 트로이아의 고고학적 발굴 연구도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그 많은 논쟁과 연구의 핵심을 추려 내어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많은 자료를 정리하면서 어떻게 트로이아 전쟁의 시점을 기원전 1180년 무렵으로 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자 했는데, 이 부분을 쓰는 동안 마치 추리 소설을 쓰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한 부분을 더 들자면, III장의 내용 중 여인들과 여신들에 대한 부분을 고르고 싶습니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호메로스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에서 여인들과 여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다루어지지 않은 편이라, 글을 쓰면서 전쟁 속 여인들의 상황에 이입해 보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얽매인 삶을 살던 여인들이 여신들의 모습에서 어떻게 해방감을 느꼈을지를 상상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일이었습니다.

“호메로스가 전체 그리스를 가르쳤다”는 플라톤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호메로스를 둘러싼 많은 이슈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메로스와 그가 남긴 작품이 오랫동안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 책의 VI장에서 썼듯이, 『일리아스』는 후대 그리스인들에게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이 작품에서 영웅들의 탐욕과 오만, 명성과 몰락을 바라보았고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신적인 힘들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이집트 탈출 이야기가 있었다면, 그리스인들에게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 일궈 낸 성과들 가운데 호메로스의 유산이 아니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호메로스 이후의 문학, 예술, 건축 등 모든 성취가 호메로스의 상상 세계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스의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호메로스 비판이 철학의 시작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일리아스』가 그리스 세계를 넘어서 서양 사상 전체에 걸쳐 영향을 미친 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리아스』는 그리스 군대의 원정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폐쇄적인 민족 서사시가 아닙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타자에 대한 적대감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많은 독자들은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보다 트로이아의 헥토르에게 더 매력을 느낍니다. 100명의 독자들 중 트로이아의 늙은 왕 프리아모스보다 그리스 군대의 총수 아가멤논에게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리아스』를 폭력과 전쟁의 이야기, 명예를 위해 싸우는 영웅들의 서사시로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핵심은 승리한 원정 전쟁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도, 위대한 영웅들에 대한 찬양도 아닙니다. 『일리아스』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비극의 드라마입니다. 이 비극은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보여 줍니다. 명예를 위한 경쟁이 갈등으로 심화되고 적과 친구의 경계가 무너지며 과도한 명예욕이 파멸을 부르고 타인의 죽음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일리아스』의 사건들은 곧 우리 삶의 사건들입니다. 2700년 전 작품이 가진 이런 영원한 현재성이야말로 『일리아스』가 후대에 미친 영향력의 원인일 겁니다.

여러 매체와 대학 강단에서 사람들에게 고전을 소개하고 알리는 직업을 가지고 계신데요. 빠르게 변화하는 과학과 기술의 시대, 현대를 사는 우리가 고전―이미 과거의 시인이요 철학자인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세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과학과 기술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편리함과 피로가 공존합니다. 우리는 늘 낯선 곳을 찾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유랑민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니까요. 이런 유랑의 삶에는 한 가지 큰 위험이 따릅니다. 공동체를 묶는 유대의 끈이 느슨해진다는 겁니다. 21세기의 정치적 혼란, 빈부의 격차, 세대 갈등 등이 공동체 삶의 위기를 보여 주는 징후일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 속도가 지금처럼 빠르지 않았지만, 그 세계에 살았던 사람들 역시 ‘유동 사회’를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에게해와 지중해 전역에 흩어져 살면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의 공동체 의식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호메로스의 서사시 덕분입니다. 『일리아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말과 생각, 기억과 상상을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일리아스』의 출현 과정, 내용, 수용 과정 등을 살펴보는 일은 과학과 기술이 하지 않는 것, 즉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입니다. 저는 이런 회고적 성찰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필요한 서사적 상상이 어떤 것이고, 우리의 공동체적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리아스』, 호메로스의 상상 세계』를 읽을 때 어떤 부분을 유의하면서 읽으면 더 재미있는 독서가 될지 궁금합니다. 다음 권으로 기획하고 계신 『『국가』, 플라톤의 이상 세계』와의 연관 선상에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국가』, 플라톤의 이상 세계』의 책 소개도 괜찮습니다.)

『일리아스』에 대한 독자의 이해 정도에 따라서 접근 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I장은 서사시에 대한 이론적 논의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이 어려운 분들은 I장 끝부분에 실린 「도표: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보는 『일리아스』」를 보시면서, 『일리아스』의 전체 흐름을 요약한 부분(69~87쪽)을 먼저 읽는 게 좋을 겁니다. 그다음에 III, IV, V장 가운데 관심이 가는 부분을 읽어나가면 되겠지요.

『국가』에서 플라톤은 현실의 타락한 국가를 대체할 이상적인 국가를 상상해 냅니다. 이 상상 속에서 새로운 유형의 수호자들, 가족의 해체와 여성들의 정치 참여, 엘리트 집단이 따라야 할 도덕적 기준으로서 이데아들, 죽음 이후의 삶과 윤회의 이야기를 펼쳐 냅니다. 이런 내용을 중심에 두고 보면 『국가』의 주요 이론들은 모두 이번 책의 III, IV, V장에서 다룬 내용에 대한 전면적인 반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호메로스에 대한 반박을 철학의 과제로 삼았는지, 그가 호메로스의 영웅관, 신관, 내세관 등을 반박하면서 어떻게 서사시의 상상을 철학의 상상으로 대체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 『『국가』, 플라톤의 이상 세계』의 주요 내용이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이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이 자유롭게, 원하는 부분을 펼쳐서 읽으시면 됩니다. 물론 낯선 고유명사들과 용어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읽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그건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니 큰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의 전체적인 의도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담겼으니, 이 부분에 공감하시는 독자분들이라면 더 흥미롭게 책을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벽돌처럼 두꺼운 『일리아스』를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신 분들도 이 책을 안내자로 삼아 원전 읽기를 다시 시도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조대호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주요 관심 분야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생물학, 윤리학과 행동 이론, 기억 이론 등이다. 저서로 Ousia und Eidos in der aristotelischen Metaphysik und Biologie(2003),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2004), Aristoteles-Handbuch(공저 2011) 등이, 역서로 『고대 사회와 최초의 철학자들』(1992), 『파이드로스』(2008), 『형이상학』(2012) 등이, 논문으로 “Drei Aspekte des aristotelischen Begriffs der Essenz”(2005), “Bestaendigkeit und Veraenderlichkeit der Spezies in der Biologie des Aristoteles”(2009), “Lautaeusserungen der Voegel in der aristotelischen Historia animalium”(2012) 등이 있다.



『일리아스』, 호메로스의 상상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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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