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것뿐인데, 미래(최성은)는 왜 자신이 죄인이 되어야 하는 줄 모르겠다. 이러다가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건 아닐까, 갈수록 두렵기만 하다. 임신 11주 차만 해도 임신과 출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남자 친구 윤호(서영주)에게 소식을 전해도, 산부인과를 찾아 의사와 대화를 나눠도, 중절 수술을 할까 고민을 해봐도,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서른 살이 목전인 스물아홉의 프로그램 개발자 미래에게는 자아실현이 우선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임신 사실에 결혼 생각도 없고, 아이 계획도 없었던 미래의 미래(future)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십 개월의 혼돈에 빠져버렸다. 윤호에게, 의사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기대고 싶었던 건데 대부분 자기의 사회적 입장만 중요하게 내세운다. 미래는 이들에게 방해물처럼 인식되어 어떤 선택이 자신을 위해 더 나은지 종잡을 수 없게 됐다. 그러면서 시간은 흘러 미래는 출산에 직면한다.
<82년생 김지영>(2019)의 내용을 여성의 임신과 출산 편에 집중해 더 깊이 파고든 듯한 인상의 <십개월의 미래>는 남궁선 감독의 장편 연출 데뷔작이다. “막상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임신이 여성의 삶에 얼마나 큰 사건이 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의아했던 건 그 경험의 크기와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대중문화에서 온전히 주인공으로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당사자의 눈높이로 그려진 이야기 하나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남궁선 감독의 기획 의도는 보통의 여성이 겪는 보통의 임신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임신과 출산은 생명의 탄생과 결부하여 축복의 의미만 주목하기 마련이다. 그에 따르는 엄마의 희생을 모성과 동일 선상에 놓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는 한다. <십개월의 미래>는 미래가 임신 사실을 안 순간부터 당면하는 부조리와 그에 따른 고민의 과정을 11개의 소제목을 달아 상세하게 소개하는 구성을 취한다. 그 안에는 임신 여성의 경력 단절과 낙태 관련법 등 사회 이슈와 유축기를 몸에 매단 채 아이를 돌봐야 하는 육아 여성의 개인 존엄 문제까지 총망라되어 있다.
소제목만 따라가도 여성이 임신과 출산으로 겪는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된다. 여성과 엄마에게 모든 짐을 부과하는 ‘문제들’ 앞에서 장본인들은 감당하지 못할 ‘혼돈’을 느끼고 이 모든 게 자신들의 잘못인 것 같아 ‘죄인들’이 되어버리는 현실 앞에서 결국, ‘혼자’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불합리와 불공평으로 귀결된다. 그의 최종 결과처럼 제시되는 마지막 소제목은 ‘애도’이다. 이 에피소드에는 미래의 할아버지 죽음과 더불어 미래의 출산 장면이 배치되어 있다.
미래의 할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병환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신세였다. 미래 역시 임신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잃고 자아실현의 꿈이 높은 벽에 막혀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를 할아버지의 죽음과 미래의 아기 탄생으로 병치한 건 이 영화를 연출한 남궁선 감독이 세상의 모든 미래에게 말하려는 바를 함축한다. “미래는 매번 지혜롭지 않은 선택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계속해서 여러 벽에 부딪히고 다치는 미래에게 그 어떤 선택이나 결과도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고 싶었다”
<십개월의 미래>에는 실은 열두 번째 소제목이 하나 더 있다. ‘엄마에게 for my mother’이다. 내용은 없이 문구만 제시되어 있는데 꽤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일차적으로는 감독의 어머니를 향한 것이지만, 세상의 모든 엄마에게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의 여성들처럼 과거의 여성들 또한 임신과 출산을 향한 편견의 시선에 맞서 싸워온 역사가 있다. 현재는 과거의 엄마들이 당시 불합리한 현실에 맞서 일궈낸 결과다. 그게 완벽한 형태는 아니지만,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변화해왔다.
현재의 여성들 또한,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엄마 세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의 엄마들 또한 더 나은 삶을 향한 변화의 목소리를 높이며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는 똑같은 고통을 안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래의 남자 친구 윤호는 미래가 걱정을 드러낼 때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목소리를 높인다. 변화는 한 사람의 힘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참여할 때 가능해지는 가치다. <십개월의 미래>도 그렇다. 여성의 삶을 다뤘지만, 여성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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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