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완의 북디자인은 수학적이다. 글자들의 관계와 질서를 순수형식주의적으로 탐구해간다. 그러면서도 시인 같다. 글자의 생물적인 속성을 활유화하고, 몸이 발생시키는 오류의 불가피성을 작업의 소재로 끌어들인다.
전용완의 Desktop
전용완의 데스크톱에는 수학자의 태도가 보인다. 기계에 밝은 디자이너 중에서도 새롭고 화려한 최첨단 그래픽 기술로 눈길을 사로잡는 디자이너들이 공학자나 의학자 같다면, 전용완은 텍스트를 조판하기 위한 기계가 구축하는 질서와 본질을 탐구하는 수학자 같았다. 수학자들이 눈에 보이는 감각 세계 배후의 질서를 탐구한다면, 그는 글자들이 작용하는 배후의 질서를 탐색해 규칙을 구축한다. 그렇기에 프로그램의 메커니즘을 잘 활용하면서도, 그의 디자인은 수수하고 단정하다.
‘봄날의책 세계시인선’은 지면 조판 계획서로 전집의 본문 디자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글자는pt(포인트) 대신 Q단위를 쓴다. Q는 미터법에 기반한 단위 체계로, 종이와 글자의 단위를 미터법으로 일치시킨 것이다. 지정한 판면에 정해진 글자 크기로 최대 28행이 들어가게 하려면 행간은 글자 크기 대비 182.34%가 된다. 17.574pt에 해당하는 행간은 이렇게 도출된다.
시집 『처음 가는 마을』 중 본문 디자인 작업 데스크톱을 보면, 오른쪽 면 ‘오솔길’과 ‘홀로’ 사이는 두 칸 가까이 띄어져 있다. 일본어 조판에는 띄어쓰기가 없지만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은 시적 허용처럼 간혹 띄어 쓴다. 그래서 한국어 조판은 일반적인 한 칸과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 전각 공백, 두 가지 너비의 공백을 갖게 했다. 얼핏 편집 실수로 보여 일반적인 시집에서는 기피할 방식이지만, 전용완은 논리적인 완결성을 택한다.
시 「이웃나라 언어의 숲」은 일본어 원문과 한국어 번역이 한 펼침면 위에 나란히 놓였다. 여기서 그는 본문 글자 위에 작은 글자로 외국어 발음을 올렸다. 일문 원문대로 처리한 것이긴 하지만, 국문 조판에서는 이런 경우 대개 괄호를 쓴다. 작은 글자는 오늘날에는 일본에서 많이 쓰이나, 사실 오래전부터 한국의 고서적에서도 자주 보이던 방식이다. 음절을 조형 단위로 하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섞이는 데에 적당한 해결책으로, 동아시아 말과 글의 이웃들은 마주 찍혀 소리와 모양을 나누면서 정답게 이웃한다.
텍스트와 번역은 타이포그래피로 완결된다. 전용완은 흔히 쓰지는 않는 인디자인 내부의 여러기능들까지 그 존재 양상과 필연성, 맥락, 질서를 총체적으로 파악해 논리적으로 적용하곤 한다.
김뉘연의 시집 『모눈 지우개』는 2020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10권으로 당선됐다. 김뉘연·전용완의 출판사인 외밀에서 출간한 첫 책이기도 하다. 「모눈」, ‘너는 동그라미를 두려워 하니까’, ‘네모를 쓰기 / 네모에 대해 / 네모의 형태를 (…)’ 이런 시구들과 현대적이고 형식 실험적인 창작 방식을 보면, 확실히 이 시들은 명조체가 아닌 고딕체의 외관과 태도에 담기는 편이 적절하다. 그렇게 시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본문 전체에 고딕체를 썼다. 산돌고딕네오1을 택한 판단도 합당하다. 사각형의 마모가 가장 덜하고 각이 잡힌 한글 고딕체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모눈의 기하학적인 공간에 반듯한 상태로만 머물러 있지 않다. 저자 김뉘연과 디자이너 전용완은 각각 문학과 미술에서 언어를 재료로 활동한다. 시와 타이포그래피는 시집에서 중첩되고, 김뉘연의 시와 전용완의 타이포그래피에서는 말의 활유화가 일어난다. 김뉘연의 시 「베개」에서 굴러가는 것은 베개라는 사물이 아니라 말이다. ‘부른다, / 베개, / 굴러간다,/ 어디로, / 베개라는 말이.’ 이런 점에서 전용완의 북디자인 역시 현대시 같다. 말과 글은 의미와 소리와 모양을 가지며 몸에 닿아 있어서, 말자체가 외부 사물에 종속되지 않는 물질적이고 생물적인 속성이 있다. 시인과 디자이너는 이 속성을 일으킨다. 텍스트를 보고 읽는 사람의 편의보다, 텍스트 자체의 목소리와 기본 속성에 충실하다.
다시 전용완의 수학적 규칙의 세계로 돌아와 ‘모눈종이’의 디자인을 보자. 유어마인드의 ‘뭔가 적을 수만 있으면’ 행사를 위해 제작한 20면의 노트다. 뒤로 갈수록 규칙에 어긋나는 것 같지만, 사실 ‘모눈종이’로서의 규칙은 모든 면에서 정확히 지켜지고 있다. 그는 하얀 줄을 썼다. 모눈의 줄을 그은 것일까 지운 것일까? 줄들의 굵기를 달리하면 지면을 덮는 패턴의 가능성이 무한대로 확장된다. 그는 단순한 규칙이 품을 수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들에 질문을 던진다.
전용완의 Desk
이제 책의 제작은 인쇄소로 넘어간다. 그곳에도 기계는 있지만 그 기계를 다루는 것은 타인의 손과 몸과 판단이다. 규칙이 온전히 가서 닿을 수 없는 곳에 들어선다. 여기서 수학적인 규칙은 물리적인 물성으로, 비트는 아톰으로, 질서는 효과로, 순수 형식 논리는 손으로, 그 세계와 영역이 달라진다. 그는 때로 제어할 수 없는 오류 발생의 가능성을 오히려 우연의 효과로 극대화한다.
『모눈 지우개』는 기계의 복제를 통한 대량 생산 인쇄본인데도 표지가 모두 다르다. 작업 지시는 하나지만 다양하게 변주된다. 같은 시를 세 번 부분적으로 겹치도록 수동 박으로 찍게 해서, 시들의 위치가 책마다 달라지고 무아레 같은 무늬가 생겨난다.
전용완이 작성한 『모눈 지우개』의 제작 발주서에는 ‘정미’니 ‘여분’이니 하는 단어들이 보인다.주문한 종이와 필요한 종이, 그리고 여분의 종이 각각의 수량을 표시한 것이다. 『시간의 각인』 제작 발주서에는 종이결의 방향에 맞춰 표지를 앉힌 그림을 넣었다. 특히 하드 커버를 감싼 종이에서 결이 안 맞는 책들이 시중에 많다. 결은 방향이 하나니까 책도 방향에 맞게 배열해야 하는데, 종이를 아끼느라 가로로 배열해야 할 책을 세로로 배열하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 이렇듯 원치 않는 오류에 대해서는 정확히 피하기 위한 지시를 한다.
『처음 가는 마을』 표지 디자인에 찍힌 시에는 글자가 멍울져 있었다. 먹 인쇄를 한 것 같지만 사실 먹박으로 찍혔기에 나오게 된 효과다. 박은 볼록판 인쇄라는 원리가 금속활자와 같아서 활자 조판을 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효과가 아름답게 창조될 때면 책은 호소력있게 완성된다.
김뉘연과 전용완의 문학과 디자인은 전반적으로는 개념적이다. 개념 예술은 상당히 훈련된 감상자와 독자가 아니면 종잡을 수 없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학술지 논문처럼 전문가 평가로 지지되는 외로운 영역이기도 하다. 이런 지대를 지키는 그에게는 강한 지지대가 있었다. 인생과 창작의 동반자인 김뉘연이 있고, 그가 존경하는 전문가 동료들의 두텁고 신실한 인정이 있다. 이 둘을 자양분으로, 그는 자신의 영토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전용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한국 북디자인의 지형에 부재했을 그 영토에, 그는 흔들림 없이 곧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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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원(디자이너)
글문화연구소 소장, 디자이너,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작가. 『글자 풍경』, 『뉴턴의 아틀리에』를 썼다.
powerdream
2021.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