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음색’이라는 단어가 흔해졌다.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들이 예민한 촉이나 취향의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이 단어는 이제는 여신이나 깡패 같은, 같이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명사와 함께 묶여 목소리에 대한 최상급 칭찬으로 절찬리에 활용 중이다. 꽤 흥미로운 변화였다. 특히 ‘누가 더 높이 올라가나’로 가창력을 논하는 데 익숙한 대한민국에서 깨끗한 고음이 아닌 음색으로 가수의 역량을 평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놀라웠다. 3옥타브 이상을 육성으로 내지를 수 있는 가수가 여전히 명창인 건 변함 없었지만, 그 곁에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나만의 음색을 가진 좋은 보컬리스트의 자리가 새롭게 만들어진 셈이었다.
이제야 균형이 맞춰진 듯한 그 세상에, 블랙핑크의 메인 보컬 로제가 있다. 로제는 최근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역 아이돌 가운데 유독 독보적인 음색으로 유명하다.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말 그대로 ‘듣는 순간 귀에 꽂히는’ 로제의 목소리는 그대로 블랙핑크라는 그룹의 음악적 이미지를 규정했다. 여기에 하나 더, ‘YG 메인 보컬’로서의 역량이라는 장점이 더해진다. 특히 환희나 희열보다는 비애나 애수에 어울리는 로제의 허스키한 톤은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의 인장이 뚜렷하게 찍힌 곡들을 소화하기에 여러모로 탁월한 속성을 지녔다. 풍부한 공간감 탓에 여리게 느껴지면서도 속을 들여다보면 누구보다 꽉 찬 심지를 자랑하는 목소리는 성대를 최대한 납작하게 눌러 밀도를 높이는, 마치 압축 스펀지 같은 YG식 발성에 여러모로 최적화되어 있다.
로제의 목소리가 단순한 감탄을 넘어 재미있어지는 건 지금부터다. 바로 YG식 가사 때문이다. 창사 이래 줄곧 ‘즐기는 무대’를 목표로 삼았던 YG의 사풍은 무대 위에서는 견줄 데 없이 강하고 아름답지만, 가사에서만큼은 미련과 찌질이 뚝뚝 떨어지는 반전을 가진 아티스트를 다수 배출했다. 로제의 목소리는 압축률이 높은 만큼 묵직한 한 방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이어져 온 YG 특유의 통속을 모조리 튕겨낸다. ‘우리 엄만 매일 내게 말했어 / 언제나 남자조심 하라고’(‘불장난’), ‘넌 쉽지 않은 걸 그래서 더 끌려’(‘마지막처럼’) 같은 다소 낯 뜨거워지는 가사들은 로제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삽시간에 사랑에 빠졌건 지금 막 헤어지고 오는 길이건, 로제의 목소리가 노래하는 건 오로지 지금의 나와 터질 것 같은 에너지뿐이다. 쉽게 웃어주는 건 날 위한 거니 착각하지 말라고(‘뚜두뚜두’), 내 전부를 너란 세상에 다 던지고 싶다고(‘불장난’), 오늘은 그저 너와 춤추고 싶다고(‘붐바야’). 로제의 목소리는 세상과 상대에게 끝없이 경고장을 던질 뿐이다.
로제의 목소리가 가진 이 개성은 결국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로 대표되는 블랙핑크의 대표 이미지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소속사의 전통을 성실히 잇는 것은 물론 타고 난 음색마저 뛰어난 동시에, 고유한 이미지와 서사를 만들어내는데도 탁월한 목소리인 것이다. 이 탁월함은 ‘드디어’라는 수사가 어울리는 로제의 첫 솔로곡 ‘On The Ground’의 자기 고백적 서사에 자연스러운 깊이를 만든다. 대망의 첫 솔로치고는 어딘가 허전하다 싶다가도, 직설적인 만큼 솔직하개 느껴지는 가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다시 로제의 목소리가 가진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누가 봐도 저 높은 구름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내가 필요한 모든 건 내게 있다는 걸(Everything I Need Is On The Ground)’ 노래하는 생명력 넘치는 목소리를 외면하기는 어렵다. 그 민낯이 위태롭도록 강한 것을 알기에 더욱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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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