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깊은 우울을 겪은 적이 있다. 내가 저지른 일들의 후과라 다른 이를 탓할 수도 없었고, 막상 주위를 돌아보니 속내를 털어놓고 위로를 구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힘을 낼 수가 없어서, 스스로 ‘힘 좀 내자’라고 주문을 걸 수도 없었다. 두려움과 막막함이 나를 지배했던 그때, 옆에서 보다 못한 아내가 내게 조언했다. “씻고 움직이지 그래?” 눈앞의 당장 해결해야만 할 일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를 잘게 쪼개어 하나하나 잘 마치는 일. 미하일 엔데의 『모모』에 나오는 청소부 베포의 조언처럼 말이다.
도로 청소부 베포가 친구 모모에게 느릿느릿 지혜가 가득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고는 다시 말을 멈춘 후 한참 동안 생각을 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 해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 거야.” 그러고는 다시 한번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말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
내가 스스로 허물어버린 공든 탑을 돌아보는 일은 괴로웠다. 탑의 잔해 전체를 보지 않고 흩어진 파편들을 하나씩 수습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큰 계획을 세우려 하지 않고, 과거의 잘못을 곱씹는 일을 멈추어야 했다. 오늘 하루의 단순한 일과와 주어진 과제들만 생각했다. 지금 몰두하는 이 무의미해 보이는 일들이 어떻게 미래와 연결될까 따위의 걱정은 멈추었다. 의미를 찾고 설명을 하려 들면 다시 의기소침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날들이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매일 같은 하루의 반복이었다. 의미 없음이 나를 짓눌렀다. 같은 하루가 계속 반복되는 성촉절의 마법에 걸린 필(빌 머레이가 맡은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주인공 이름이다)처럼 죽을 수 없어 사는 인생이지만, 그 지루한 반복의 과정을 계속하고, 지금 바로 눈앞의 일을 잘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난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으며, 할 수 있는 일은 매일을 살아내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 단순한 일상을 성실히 반복하는 동안, 터널을 벗어났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돌아볼 수 있었다.
나탈리 크납은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을 빌려 이미 발생한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불확실한 삶의 시기를 통과하기 위한 생의 안전벨트로서 말이다. “에픽테토스의 가장 중요한 충고는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별하라는 것”이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면 훨씬 더 행복해진다고” 말이다. 이미 발생한 삶의 불행한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이후를 살아가는 것. 이는 삶을 위해 갖추어야 할 평정심이기도 하며 인내심이기도 하다. 내가 실수하기 이전의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 애타고 안타까워하는 한 우리는 불행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후회가 나의 삶을 갉아먹지 않게 하려면 지금 막막하고 우울하다면 내가 바꾸고 통제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다.
제시간에 일어나 깨끗이 씻고, 제시간에 퇴근해 집으로 들어와 밥을 먹고 씻고,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어가는 일.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반복하는 일에 숫자를 매기며 숫자 하나가 커졌다는 것에 성취를 느끼고 위로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반복이 쌓여 일상이 단단해지고, 다른 일을 할 힘이 조금씩 쌓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청소부 베포의 말처럼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견디고 통과해야 할 삶의 어떤 한 시절을 지나왔다는 것을 불현듯 느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형보(어크로스 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