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소확혐을 가지고 있다. 누구는 아주 적을 것이고 누구는 너무나 많을 것이다. 남들이 볼 때, 큰 사건은 아니고 사소한 일이지만 자신한테는 하루 종일 생각나고 몇 달이 흘러도 문득 떠오르는 사건이 소확혐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사소한 나쁜 기억이 쌓이면 그것이 트라우마가 된다. 인간은 나쁜 기억을 다시 겪지 않으려는 두려움 탓에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최연호 교수님의 『기억 안아주기』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 소확혐. 우리 모두는 저마다 그런 나쁜 기억을 하나 이상씩은 가지고 살죠. 그래서 힘든 순간도 번번이 찾아오고요. 최연호 교수님은 ‘나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좋은 기억이 없는 사람도 없다’고 말하는데요. 나쁜 기억을 어떻게 안아주고, 그것을 어떻게 좋은 ‘나쁜 기억’으로 바꿀 것인지, 최연호 교수님은 아이들을 진료하면서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성인들에게도 다양한 화두를 던지죠.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에 최연호 교수님을 모시고 『기억 안아주기』에서 말하는 ‘나를 완성시키는 좋은 ‘나쁜 기억’’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뷰 – 최연호 편>
오은: 지난 12월에 첫 책 『기억 안아주기』가 나왔어요. 책을 읽고, 기억이 참 어렵구나, 나의 불완전함과 편견이 기억에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구나, 그리고 그것이 순환하면서 내 인생을 구성하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책 제목처럼 기억을 잘 안아주면서 가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나저나 저희와 최연호 교수님 사이에 작지만 재미있는 연결고리가 있더라고요. 2020년 8월에 방송된 <어떤,책임> ‘밀레니얼의 갬성으로 고른 책’에서 프랑소와 엄님이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소개했거든요.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전홍진 선생님이 출판사와 최연호 교수님을 연결시켜주셨다고 들었어요.
최연호: 맞아요, 저는 소아청소년과 의사고 전홍진 교수님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예요. 그런데 저희 두 사람이 최근 몇 년 집중하던 분야가 같았던 것 같아요. 두 책이 매우 예민하고, 나쁜 기억을 많이 떠올리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책은 따로 쓰고 있었고요. 마침 전홍진 교수님이 책을 먼저 내셔서 나도 쓴 책이 있는데 어디에서 출판하면 좋을지 물었어요. 그랬더니 너무나 당연하게 글항아리 출판사의 이은혜 편집장님을 소개시켜주신 거죠.
오은: 이제 작가님 소개를 해드릴게요.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의사. 안 읽은 책들의 서재를 꿈꾸는 독서가. 엄한 부모님께 아프게 혼나기도 하고, 고등학교 수학여행에서는 선생님 몰래 친구들과 음주가무를 즐기다가 눈물 찔끔 날 정도로 혼나기도 했던 학창시절을 보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82학번. 소아청소년 크론병과 궤양성 대장염 치료의 명의로 꼽힌다. 의사 최연호는 환자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를 진단과 치료에 적용하기 위해서 증상이 발생한 배경은 무엇인지, 환자를 바라보는 보호자의 시선은 어떠한지, 환자와 보호자의 주변 환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심지어는 아이들의 심리상태가 어떤지 까지 살피는 휴머니즘 진료를 한다. 약 처방은 많이 하지 않는 편이며, 무엇보다 환자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최연호 교수가 연구하고, 발표한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과 철분결핍성빈혈 관계' 논문은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 받는 미국의 「소아위장관학 교과서」 2005년판에 정설로 채택되기도 했다. 국내 소아위장관학 관련 의료진의 연구논문이 해당 미국 교과서에 정설로 채택된 경우는 최연호 교수가 최초. 최연호 교수는 40명 정원의 의대생 이름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은 선생님이다. 제자들에게 늘 하는 말은 “의학 지식만으로 환자를 볼 수는 없다.” 이다. 2018년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으로 취임할 당시 “인성평가 점수가 부족하면, 다른 성적이 1등이라도 삼성서울병원 인턴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는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사의 자질이다.
한 달에 최소 2권 이상의 책을 읽는, 영화와 드라마도 좋아하는 사람. 최연호의 소확혐은 교통 정체이다. 교통 정체 구간이 나타나면 내비게이션에 손을 대고는 빨리 가는 길을 찾는 데만 열중하는 것이 최연호의 고치고 싶은 운전 습관이다.” 휴머니즘 진료란 어떤 것인지 궁금해요. 이것이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진행되는 진료 방법인지도 함께 설명해주세요.
최연호: 병원에 가면 진료를 받고요. 끝나면 꼭 의사들이 약을 주죠. 배 아프면 배 아프지 말란 약을 주고, 토하면 토하지 말란 약을 주고요. 진단명을 붙여서 약을 주려고 하는 게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적인 의사와 환자의 관계 같아요. 25년 진료를 하면서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저를 비롯해 많은 분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겠지만 처방을 안 하면 돈을 벌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처방이 나가게 되는 것 같거든요. 그러나 저는 대학에 있고, 교육자 입장이니 진실을 가르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을 했고, 그러면서 휴머니즘 진료에 관심도 많아졌어요. 부모나 주변 환경을 통해, 그리고 환자의 심리상태를 통해 보면 병이 아닌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약이 전혀 필요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나름의 실험도 많이 했고요. 그러면서 더욱 휴머니즘 진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오은: 흔히 플라시보 효과라고도 하는데, 병원에 갔다가 그냥 오면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할 것 같아요. 하다못해 비타민 같이 매일 섭취해야 하는 영양소라도 받아오면 왠지 몸이 나을 것 같은 기대심리가 있잖아요. 그런 이유로 처방을 해주실 법도 한데 그런 것도 아예 안 하시는 거죠?
최연호: 그걸 벗어나야 될 것 같아요. 그 생각을 벗어날 수 있는 국민과 의사가 된다면 우리나라 의료체계가 이렇게 얘깃거리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결국 계몽의 문제 같은데요. 한 번씩 겪고 극복해보면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 생각해요.
오은: 이제 『기억 안아주기』를 작가님께서 직접 소개해주시는 시간입니다. 이 책은 어떤 책인가요?
최연호: 이 책은 나쁜 기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제에 ‘소확혐’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데요. 이 단어는 눈치 채셨겠지만 ‘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을 의미합니다. 제가 만든 단어이고요. 힌트는 딸에게서 얻었어요. 맨날 조금만 뭐 하면 ‘극혐’이래요.(웃음) 제가 볼 때 전혀 극혐이 아니거든요. 일반적으로 잠깐 지나가는 일을 그렇게 표현하는 걸 보고 저건 아니다, 싶었고요. 좋은 단어를 만들다보니 ‘소확혐’이라는 말이 나오게 됐어요. 소확혐이 묘한데요. 지금은 손해가 아닌데 나쁜 경험을 한 기억 때문에 그 일이 또 벌어질까봐 과잉 대응을 하게 되고, 집착을 하게 돼요. 일종의 손실기피고요. 그로 인해 병이 아니지만 증상으로 표현되는 일들이 벌어져요. 그런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뒤에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다루었고요.
오은: 교수님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시잖아요. 그런데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는 게 무척 흥미로워요. 어떻게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가요?
최연호: 아이들이 기억 때문에 병원에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아주 오래됐는데요. 책을 쓰기 위해서 최근 3-4년 정도 데이터를 모았어요. 20년 전부터 기존 교과서에 쓰여 있는 진단과 치료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우선은 변비였어요. 6개월에서 돌 사이에 이유식을 시작하면 변이 최초로 딱딱해집니다. 아이는 생전 처음 딱딱한 변을 내보내려다 보니 통증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당연한 현상인데 이걸 몇 번 경험한 아이는 변 보는 게 무서워지죠. 그걸 기억으로 남깁니다. 그러면 그 나쁜 기억을 잘 넘겨주면 될 텐데 아이가 끙끙거리고 참으니까 부모가 접근하게 되는 거예요. 아이는 변을 안 보는 게 목표인데 부모는 변을 보게 하는 게 목표인 거죠.
오은: 걱정과 걱정이 만나서 일을 크게 만드는 셈이네요.
최연호: 그렇죠, 스스로 잘 이겨나가게 두면 좋을 것을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요. 의사가 하는 일은 관장이죠. 의학 교과서에 변이 장에 차면 딱딱해지고 못 나오니까 관장을 해서 미리 빼주고, 변을 묽게 하는 약을 써서 유지시키라고 나와 있거든요. 의사 입장에서는 치료예요. 부모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아이 입장에서 이것은 공포입니다. 제일 싫어하는 게 대변 보는 일인데 억지로 대변을 보게 되고, 결국 트라우마를 갖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 아이는 절대로 대변 안 봅니다.
오은: 요즘은 워낙 검색이 쉽고, 정보가 많아서 해당 키워드를 넣으면 엄청나게 많은 문서가 나오잖아요. 그러면서 불안감이 올라가고요. 이럴 때는 오히려 정보가 독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분들에게는 어떤 말씀을 해줄 수 있을까요?
최연호: 글쎄요, 정보 홍수 시대에 가장 피해를 입는 게 국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정보는 신호와 소음으로 이루어지잖아요. 신호만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신호를 주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죠. 변비라는 검색어를 넣으면 ‘선천성거대결장증’이라는 수술해야 하는 병 이름이 함께 나와요. 몇 가지 증상이 내 아이와 같으면 겁을 먹게 되고요. 그걸 알기 위해 병원에 가면 또 항문에 뭘 집어 넣어야 해요. 계속 악순환이죠.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은: 양질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할 것 같고요. 증상이 유사하다고 해도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는 것까지는 꼭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최연호: 네.
오은: 거절과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높은 사람이 스트레스에 더 취약하다고 하셨잖아요. 아마 많은 분들이 이 부분에 공감하실 것 같아요. 게다가 한국 특유의 눈치 문화 때문에 계속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워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싶거든요.
최연호: 워낙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고요. 그 안에서 안심하죠. 여럿 안에서 소속감을 느낄 때 행복을 느끼는 것 같은데요. 예민한 사람들은 편도체 활성화가 강한 사람이에요. 이들은 편도체를 통해서 스트레스 상황을 무서운 상황으로 받아들인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전전두엽이 몸통, 두려움을 느끼는 편도체가 꼬리인데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버리는 거죠. 그 때문에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거고요.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진다고 보시면 돼요.
오은: 어쨌든 나쁜 기억이 각자 있어요.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나쁜 기억을 어떻게 안아줄 수 있을까요? 많이 말씀하신 것이 ‘맥락찾기’인데요. 설명 부탁드려요.
최연호: 증상으로 드러나는 현상 이전에 중간에 이어져온 과정, 즉 맥락을 잘 살펴보면 왜 그 증상이 벌어졌는지를 알게 된다는 의미인데요. 빠진 과정을 어떻게 찾는가가 중요해요.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을 하는데요. 가령 배가 아프고, 화장실에 오래 있고, 학교에 늦고, 아침을 굶는 각 부분을 합을 보면 이 아이에게 과거의 어떤 기억 하나가 원인이었던 거을 발견할 수 있어요. 이를 테면 과거에 대변 실수를 했다든지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심리상태가 보인 거죠. 이런 이야기를 환자와 가족에게 해주면 그들은 맥락을 이해할 거고요. 맥락을 이해하면요. 사실 치료가 필요 없어집니다. 환자가 자각을 하면 말이에요.
오은: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을 드릴게요. 먼저 <책읽아웃> 청취자에게 영업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최연호: 인간의 심리와 불합리성을 볼 수 있는 좋은 책인데요. 『생각에 관한 생각』입니다.
오은: 두 번째 질문, 『기억 안아주기』가 한 권 있다면 누구에게 선물하고 싶으세요?
최연호: 팀장에게 주고 싶어요. 제일 어려운 게 팀원을 끌고 가는 거잖아요. 별별일들이 다 생기는데 팀장이 이 책을 읽고 나쁜 일이 벌어지는 현상을 알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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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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