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작가에게 “지금은 어디 계신가요?”라는 질문을 던진 건, ‘본캐’와 ‘부캐’의 알리바이를 미리 알고 싶어서였다. 어느 인터뷰에서 ‘한국에서는 번역을, 외국에서는 소설을 쓴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떠올라서. “모처에서 소설을 쓰고 있어요”라는 답에서 짐작컨대, 작가는 현재 ‘본캐’에 충실한 상황으로 보인다. 1993년 소설가로 데뷔한 작가가, 굳이 나누면 ‘부캐’인 번역가로서 이름을 올린 건 2004년. 독일 작가 야콥 하인의 책을 번역하면서부터다. “번역가의 가장 큰 기쁨은 발견에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놀라운 작품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유일한 아름다움과 독창성, 그리고 비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을 번역하기 위해 출판사를 설득할 수 있을 때, 번역한 후에 책을 읽은 독자들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때, 그건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죠.” 한국 작가 중 가장 독특한 문체와 스타일로 호명되는 작품을 꾸준히 생산하면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외국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에도 누구보다 성실한 번역가 배수아의 배경 에너지다. 그 발견의 기쁨 속에서 페르난두 페소아와 로베르트 발저와 W.G.제발트와 클라리시 리스펙트로가 우리에게 왔다.
굳이 이름 붙이면, ‘부캐’로 입문한 2004년 첫 번역서를 마무리했을 때의 소회가 궁금합니다.
아, 이런 식으로 나의 독일어 공부가 시작되는구나 생각했어요. 그 공부는 지금도 진행 중이고요. 똑똑하거나 두뇌 회전이 빠른 편이 아니라서 뭘 잘하거나 빨리 배우는 편은 아니거든요.
‘소설 문학을 좋아하는 내 취향이나 주관이 편향적인 편’이라는 고백을 하신 적이 있어요. 번역하신 책 중 그런 기준점이 가장 높았던 책이 있다면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G.H.에 따른 수난』, 그리고 올 연말에 번역하게 될 아글라야 베터라니의 책입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G.H.에 따른 수난』은 가장 최근에 번역한 책입니다. 지난해 번역한 『달걀과 닭』 역시 같은 작가 작품이고요. 지난 2년은 온전히 리스펙토르에 사로잡힌 시간인 셈인데, 어떤 점이 번역가 배수아를 사로잡은 건가요?
이런 질문은 곤란합니다.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사로잡힌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한동안 나는 다른 작가의 책을 읽을 수 없었어요.
창작의 시간과 번역의 시간을 운용하는 나름의 내적 가이드 라인이 있을까요?
과거에는 창작과 번역에 절반씩 시간을 할애하려고 했어요. 이제는 조금 바뀌었는데, 앞으로 번역은 정말 ‘추락하듯이 뛰어든’ 작품만 골라서 하기로 했어요. 그런 작품을 많이 만나면 좋을 것 같고요. 반면에 글을 쓰기 위해선 장소가 무척 중요해요. 내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무슨 글을 쓸지 결정하거든요. 그래서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어딘가에’ 있어야 합니다.
‘제발디언’이라는 용어를 연착륙시킨 제발트, 페소아, 발저 등 ‘배수아 번역본’에 대한 독자들의 애정이 깊습니다.
감사한 일이지만, 이 작가들은 한국어로 번역되기 전부터 이미 문학사에서 이름난 뛰어난 작가들이며 작품 또한 번역자와 상관없이 그 가치를 인정받는 사례들이에요. 특정 번역가가 번역했기 때문에 사랑받은 건 아니에요. 반면에 한국에서 유명세가 없거나 무명이고, 또 텍스트 자체의 진입 장벽이 높아서 독자들의 시선에서 비켜난 작가나 작품이 있죠. 나는 그런 작품에 더 큰 애정을 느끼는 편입니다. 『G.H.에 따른 수난』이 그런 예입니다.
요즘 말로 소설가 배수아는 본캐, 번역가 배수아는 부캐입니다. 창작과 번역 외에 작가님이 꿈꾸는 또 다른 부캐가 있을까요?
『뱀과 물』 출간 이후에 낭송극 공연을 여러 번 했어요. 리스펙토르의 『달걀과 닭』으로도 여러 차례 무대에 섰고요. 전문 배우도 아니고 서툴지만 낭송은 이미 글의 일부로서 텍스트와 함께 탄생했기 때문에 반드시 해보고 싶은 일이었어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청각예술 장르인 오디오 낭송극을 만들고 싶기도 해요. 무대는 일회성이고, 다시 들을 수 없으니까요.
“훌륭한 번역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두말할 필요 없이 어학실력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름의 편파적인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루키 잡문집에 실린 문장입니다. 리스펙토르 이후 편파적인 사랑에 빠진 작가가 있다면 『월간 채널예스』 독자들에게 살짝 귀띔해주실 수 있나요?
나는 어학 실력은 참으로 부실하지만 편파적인 사랑은 차고 넘칩니다. 리스펙토르 이후 또 다른 몇몇 작가를 향한 사랑에 빠져 있어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언어를 만나는 일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나는 A의 글을 무척 사랑하고, 그의 책을 펼치고 문득 눈에 들어온 한 구절을 읽기를 좋아합니다. 그의 모든 것이 번득여요. 하지만 그의 아방가르드 작품들을 번역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릅니다. 그리고 나는 B의 시도 좋아해요. 지금 같은 고요한 저녁이면 종종 그야말로 나 자신을 위해 연애시를 번역하는데, 열정이 넘치는 뜨겁고 심플한 B의 언어는 그런 목적에 아주 적합하죠, 이제 곧 번역하게 될 C의 책도 항상 손 닿는 곳에 있습니다. A, B, C 모두가 여성인 것이 정말 기쁩니다. 그들은 썼고, 살았고, 살고 있고, 그리고 살아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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