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마음이 곧고 착해서 규제가 없어도 죄를 짓지 아니할 사람을 우리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라면 법이 없다고 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테니까 굳이 법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법이 필요한 사람이 아닐까. ‘법이 없으면 큰일 낼 사람’ 들이 끼치는 해를 그들이 온전히 받아야 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법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내용이고 어떤 이유와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일반인이 알기란 어렵다. 게다가 나쁜 짓을 저지른 이들은 죄보다 너무 가볍게 처벌받고, 법이 보호해야 할 사람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조선 시대에도 같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던 사람이 있으니, 실학자로 잘 알려진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약용이다. 그는 당시 혼란했던 정치를 개혁하고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당시 서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유배 길에 오르게 된다. 이때 저술한 유명한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가 있는데, 그 중 「경세유표」는 조선의 정치 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을 제안하는 책이고, 「목민심서」는 지방 관리들의 폭정과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방안을 담고 있다. 그리고 「흠흠신서」는 형벌, 법 행정, 살인사건 판례와 그에 대한 비평을 실은 책이다.
이번에 읽은 『다산이 말한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 은 그중에서 「흠흠신서」를 읽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주로 살인 사건 판례를 통해서 그 당시에 어떻게 범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어떤 기준으로 처벌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약 200년 전의 세상은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옛날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현재와 그렇게 먼 시간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당시의 세태와 범죄와 형벌에 대한 인식은 어떤 면에서는 지금에 와서도 되새겨 볼 수 있을 만큼 높은 수준으로 느껴지는 한편, 어떤 부분은 전근대적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한다.
조선 시대는 왕이 권력의 정점으로서 판결하더라도 백성들을 납득시킬만한 판결을 해야만 했다. 신하들의 상소문을 가볍게 뿌리치지 못하는 조선 시대 사극을 보며 어느 정도 왕이 권력을 행사하는데 제약이 많았고 명분이 중요하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도 납득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상당히 전향적으로 느껴진다. 또한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여러 번 검시하여 판결의 객관성을 높이려 하였다. 표준적인 자를 이용해 상처를 검시하고 은비녀 등으로 독물에 의한 사망 여부도 파악할 정도였다. 이런 부분들은 드라마 <별순검> 등에서 조선시대 과학수사에 대한 내용으로 다루기도 했으니 관심이 있다면 찾아보면 좋겠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상은 그렇게 희망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권력이 있거나 공권력과 결탁한 자들이 범죄를 은폐하는 일이 흔하게 벌어졌고, 지방 수령이 직접 행정과 사법을 행해 전문성이 부족했고 해당 고을의 아전들의 비리와 부정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또한 죄를 다스림에 있어서 여성들에게 더욱 가혹했는데, 아내가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때려죽여도 형장 100대만 선고하거나, 부부싸움 끝에 아내를 죽이면 살인죄임에도 감형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왕이었던 정조는 가능하면 형벌을 감해주려 하는 온정주의적인 태도로 백성을 위하려 했지만 다산은 법 집행의 정당성과 일관성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엄격하지 못한 법 집행이 연약한 백성들을 더 큰 피해자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어떻게 하면 법을 더 잘 집행하고, 억울한 이가 없을까’ 하는 다산의 고민이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지방 수령과 암행어사로 근무하고, 유배지에서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고민했던 그의 문제의식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다. 오늘날에도 부조리한 제도와 기득권에 유리한 사회 질서로 인해서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밴드 ‘눈뜨고 코베인’의 노래 「스카이워커」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이들이 절망적으로 노래한다. ‘하늘로 올라가야만 해, 우린 이제 여기 있을 수 없으니까’ 라고. ‘하늘을 걷는 사람’ 이라는 원래의 뜻에서 조금 더 나아가 ‘땅 위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이 노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도망칠 수단이 없는 이들의 심정을 담담하고 처연하게 그려내고 있다. 내가 아는 한국어로 된 노래 중에서 이보다 절망적인 상황을 잘 표현한 곡은 없었던 것 같다.
‘눈뜨고 코베인’ 은 외계인, (해체된)가족, 죽음(혹은 살인), 좌절된 연애를 연상시키는 곡들을 통해서 기괴하지만 현실적인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특유의 위악적이면서도 환상적인 가사 내용은 이들의 단단한 개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오히려 몇몇 곡에서 간혹 튀어나오는 솔직한 감정의 토로는 때로 더 깊은 한숨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이들의 4집 앨범 <스카이랜드> 에 수록된 이 곡은 그중에서도 더욱 처절한 기분을 불러오는 곡이다.
만약 다산 정약용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백성들의 노래를 들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음악을 틀어놓은 채로 책을 마지막까지 읽어 내려갔다.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도처에 있는 ‘스카이워커’ 들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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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산다는 것 정약용 저/오세진 역 | 홍익출판사
정조 대왕이 직접 심리했던 사건의 구체적인 이야기와 진상을 밝히는 과정, 판결의 법률적 논리, 그리고 다산 정약용의 의견이 서로 얽히고설켜 한 권의 소설처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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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고 코베인 4집 - 스카이랜드 (Skyland) 눈뜨고 코베인 노래 | 비스킷 사운드
한 가지 정서로 끝까지 가는 것을 터부시한다는 깜악귀로서는 이례적으로 한 커플의 절망이라는 테마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만들어낸 “눈뜨고코베인이 최초로 시도하는 본격 발라드풍의 노래”다.
윤덕원
뮤지션. 인디계의 국민 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1대 리더. 브로콜리너마저의 모든 곡과 가사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