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세상에 3만큼 완벽하게 조화롭고 균형 잡힌 숫자가 또 있을까. 고기, 해물, 김치라는, 이름도 조화로운 삼합.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삼위일체.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 여러 색을 만들어내는 기본색은 삼원색. 논리는 삼단논법, 수행은 삼보일배. 야구는 삼진아웃, 심지어 당구도 쓰리쿠션. 그리고 우리집엔 엄마, 언니, 나, 세 모녀.
어색함을 풀기 위해 으레 서로의 형제를 물어볼 때 언니가 있다고 하면, 형제가 없거나 오빠만 있고 자매가 없거나 동생만 있는 여성분들은 대개 부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들이 말하는 부러움은 이런 거다. 서로 옷을 빌려 입을 수 있다, 같이 편하게 여행을 다닐 수 있다, 등등 주로 성별이 같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장점들. 모두 120% 동의하는 말이다. 하지만 의외로 언니가 가장 소중해지는 순간은 엄마와 함께 있을 때이다. 엄마와 함께 있으나 이제는 조금 떨어지고 싶을 때. (엄마 미안)
우리 엄마는 조금 질리는 스타일이다. (엄마 또 미안) ‘팔자로 걷지 마라’부터 시작해 ‘눈이 부었는데 신장이 안 좋아진 거 아니냐’까지 눈에 띄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하여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하고, 엄마의 요즘 고민을 반복해서 늘어놓는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너무 피곤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상대의 눈치를 보면서도 멈추지 못한다는 점과 혼자를 어려워한다는 점이 환장 포인트다.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상관없는데, 이미 어떤 일에 시달린 뒤이거나 기력이 달릴 때면, 귀는 열려 있으나 뇌는 멈춘 ‘여긴 누구, 나는 어디’ 같은 상태가 된다. 사실, 한 공간에 함께 있은 지 3일째에 접어들면 좋았던 컨디션도 나빠진다. (역시 마성의 숫자 3!) 하지만 또 너무 안 듣는 티를 내면 나가서 눈치 보는 사람 안에서도 눈치 보게 만드는 기분이라 마음이 편치 않은데,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언니 찬스다. 찬스 이용법은 간단하다. 메신저 한 통. “언니, 엄마한테 전화 좀”
스포츠 만화로 처음 ‘전담마크(한 사람을 전문적으로 맡아서 필요한 행동을 취하는 것)’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는데, 그건 언니와 내가 이미 하고 있는 행위였다. 엄마와의 관계에 정성을 다하다가 지칠 때쯤 언니는 나와, 나는 언니와 교대한다. 전담마크를 하려면 상대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언니와 나는 엄마의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버튼과 그 버튼을 잠재울 화제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가정이라는 내밀한 사정 안에 비슷한 위계의 형제가 있으면 이런 점이 좋다. 마치 인수인계 자료 없이도 인계가 가능하달까? (이렇게 설명하니 생각보다도 더 좋은 일처럼 느껴진다!)
유청소년기에는 언니가 따로 살아서 내가 엄마와 붙어살았고, 지금은 내가 따로 살아서 언니가 엄마와 붙어 지낸다. 잘은 몰라도 머리 커서 함께 사는 일이 더 어려울 테다. 그래서 메신저로 오는 언니의 S.O.S 신호를 빨리 알아채는 건 기본이요, 본가에 자주 가서 3의 구도를 완성시키거나, 바깥에서 엄마와 둘이 데이트하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언니와 서로 빚지고 또 갚고 지고 또 갚고를 반복하다가 결국 재기를 그만두었다…라고 하면 좋으련만 인간이 얼마나 졸렬한지, 머릿속으로 자꾸 횟수와 시간을 잰다. 지난주에 내가 엄마와 시간을 보냈으니 이번 주는 언니에게 좀 더 부탁해도 되겠지? 최근에 엄마랑 둘이 여행을 다녀왔으니 당분간은 내 할 몫은 다 한 거겠지? 그래도 나은 것은, 이제는 언니도 나도 바통 터치가 능수능란하다는 점. 엄마 딸 관계라는 레이스를 멈추고 싶지 않을 때 필요한 것은, 언니와 나의 선수 교대로 완성되는 삼자평화다.
이정연(도서MD)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
디자이너홍진
2020.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