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지금만나>의 한 장면
* 영화 <기생충>(2019)과 <우리 지금 만나 >(2018)의 경미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생충>의 예고편에서 문광(이정은)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1차 예고편과 2차 예고편을 다 합쳐도 그의 분량은 7초 남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이정은을 이야기한다. 대외적으로는 신흥부자 박사장(이선균)네 가족 안에 몰락한 중산층 기택(송강호)의 가족이 침투해 들어간다고 알려진 영화지만, 두 가족이 직접 만나기 위해서는 박사장네 집에 상주하는 가사도우미 문광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벨을 누른 기우(최우식)의 신원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는 것도 문광이고, 박사장네 부부보다 그 집의 역사를 더 오래 알고 있는 것 또한 문광이다. "생긴 건 둥글둥글한데 속은 아주 능구렁이야." 기정(박소담)의 말처럼, 문광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인물이다. 극과 극의 두 가족이 충돌하는 <기생충>의 서사 한 가운데에, 그 모든 변곡의 중심에 문광이 있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모난 곳 없이 둥근 얼굴과 순한 인상 덕에, 이정은은 어디에 어떤 캐릭터로 가져다 두어도 이질감 없이 녹아 드는 배우다.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어디에나 있는 탓에 그 어느 곳에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중년 여성 노동자의 얼굴에 가깝다. 그래서 이정은은 보는 이들의 시야에 쉽게 침투하면서도, tvN <미스터 션샤인>(2018)의 함안댁 정도를 제외하면 자신이 맡은 배역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 흔한 인상 뒤에 이정은은 늘 묵직한 한 방을 숨겨두고 있었다. 카르푸-홈에버 투쟁을 다룬 영화 <카트>(2014)에서 이정은의 배역이름은 ‘계산원1’이었지만, 집단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직원들 중 제일 처음으로 ‘점장이 직접 나와서 설명하라’고 외치고 ‘최소한 계약기간은 채워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한 인물이었다. JTBC <눈이 부시게>(2019) 속 정은 또한 혜자(김혜자)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비밀을 담담한 표정으로 껴안은 강인한 인물이었다. 등장에서 퇴장까지 2분 남짓한 시간 동안 유머에서 공포 사이를 오가게 만든 <미성년>(2019) 속 ‘방파제 아줌마’는 어떤가? 한국사회가 가장 쉽게 무시하는 집단인 ‘아줌마’들에게 모두 저마다의 개성과 자아가 존재하듯, 이정은은 대명사의 배역 이름을 받고도 그 모호함을 훌쩍 뛰어넘는 독자성을 표현해 왔다.
서사의 변두리에서도 언제나 표면에 균열을 내는 역할을 맡아온 이가,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의 서사를 지니면 어떤 에너지를 보여줄까? 옴니버스 영화 <우리 지금 만나>의 세 번째 에피소드인 부지영 감독의 <여보세요>에서, 이정은은 식당 노동과 청소노동을 병행하며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간병하는 여성 노동자 ‘정은’ 역으로 첫 단독주연을 맡았다. 남한으로 내려온 아들을 찾기 위해 중국 휴대폰으로 몰래 건 북한여성(이상희)의 전화가 정은의 번호로 잘못 도착하면서, 묵묵히 일만 하던 정은의 삶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문광이 선사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관객이라면, 이정은의 인도를 믿고 <우리 지금 만나>를 보러 가도 좋을 것이다. ‘아줌마’라는 집단명사로 축약된 채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중년 여성 노동자들의 얼굴 뒤에 숨겨져 있던, 구비구비 접혀진 개별의 서사를 만날 수 있을 테니.
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
YUYU
2020.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