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삶이 되려면 어찌해야 하나. 사랑하다가 너무 아프게 헤어져 인생이 망가지는 사람을 보았다. 사랑할 때 짐작하지 못했던 이별을 잘하는 법이 어디 있겠냐마는, 상실 이후의 삶은 그 이별의 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은 삶이 되어버린 사랑과 이별의 방식을 전해준다. 서른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연하의 청년과 ‘한물간’ 필름스타의 사랑 이야기는 두 배우, 아네트 베닝과 제이미 벨의 연기로 빈티지한 필름 톤의 영상 속에서 눈부시다. 이런 사랑 또 없어요,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아니 에르노라는 소설가가 내한한 적이 있다. 『단순한 열정』 , 『한 여자』 같이 자신의 연애담을 사소설 스타일로 쓴 작품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사랑의 열정이 종이를 뚫고 나오는 듯했는데, 소설가가 실제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작가를 직접 대면하고 놀랐다. 당시 오십이 넘은 그녀는 그야말로 ‘난 아름다워. 당신들은 나를 원하게 될 거야’라는 몸의 언어를 갖고 있었다. 중년 여성이 좌중을 유혹하는 관능미를 드러낸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존감이 높고 자신을 그대로 긍정해 당당하게 성적인 매력이 풍긴다고나 할까. 분명 독특한 느낌이었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의 글로리아가 그런 느낌이었다. 연하 청년과 사랑에 빠진 나이 든 여성, 실존 영화배우 글로리아 그레이엄을 연기하는 아네트 베닝이 딱 그러했다. 주름진 얼굴과 한물간 필름스타의 쇠락한 현실보다 돋보이는 건 여전히 연기에 대한 열정, 자존감. 천진함이 조화된 관능적인 모습이었다.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 진실이었다.
영드 <셜록> 시리즈로 유명한 폴 맥기건 감독은 고풍스럽고 정겨운 영상과 디스코 같은 음악을 결합시켜 1970년대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냈다. 뉴욕과 캘리포니아, 피터의 집이 있는 리버풀을 오가는 두 사람의 현실과 회상의 연결선은 매끄럽고, 서로가 비밀을 공유하는 순간의 바닷가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잘 매만진 허구처럼.
영화 <필름스타 인 리버풀>의 한 장면
하지만 이건 실화다. 영화는 피터가 1986년 출간한 회고록 『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제작자는 그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 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회고록을 보자마자 영화를 만들려고 기다렸다가 20년 훌쩍 넘어 영화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피터의 시각으로, 피터의 기억으로 고스란히 복원된 그들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는 연인 사이의 설렘, 환희, 오해, 화해가 애틋하다. 무엇보다 눈에 밟히는 건 이별하는 방식.
피터는 병이 깊은 글로리아를 안고 리버풀의 최고 극장, 플레이하우스 무대에 오른다. 관객은 없다. 글로리아를 위해 준비한 이별 의식이다. 그녀가 그토록 연기하고 싶어 했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1막 5장의 대사를 주고받는다. 모든 걸 불태우는 이별 연기. 이별은 불가능하기에 연기한다, 고 나는 읽는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에서 압권인 자료 화면이 있다. 오스카상 시상식 장면이다. 수상자로 호명되자, 특유의 매력적인 모습으로 단상으로 올라온 글로리아는 “고맙다”라는 한마디 말을 수줍게 남기고 마이크 앞에 잠시도 머물지 않고 총총걸음으로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글로리아는 사라지는 것의 아름다운 선수다. 집착 없이 미련 없이 천진하게. 글로리아의 마지막 사랑 피터가 삶을 잘 살아갈 수 있었던 건 이별의 방식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그건 이별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재확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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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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