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시인
시대를 앞서가는 이들에게 세상은 친절하지 않다. 그를 폄훼하고, 곤궁 속에 밀어 넣고, 제대로 된 발언권을 주지 않는다. 그를 잃은 후에야 세상은 긴 탄식을 내뱉는다. 이 비극적인 운명을 비껴갈 수 없었던 이들 중에 시인 이상이 있다. 지금까지도 난해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그의 글들은 1930년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사람들은 ‘좀처럼 그 뜻을 알 수 없는’ 글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이상은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는 지식인 청년으로 매도됐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 꿈이 꺾이고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는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을까.
뮤지컬 <스모크> 는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 제15호」에서 모티프를 얻어 만들어졌다. 추정화 연출가는 이 작품이 한편의 스릴러처럼 느껴졌다 말한다. “나를 쫓는 나, 나를 위조한 나, 나와 떨어질 수 없는 나를 놓고 펼쳐지는 이야기” 같았다고. 이상은 “나는지금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나는드디어거울속의나에게자살을권유하기로결심하였다. 나는그에게시야도없는들창을가리키었다. 그들창은자살만을위한들창이다. 그러나내가자살하지아니하면그가자살할수없음을그는내게가르친다. 거울속의나는불사조에가깝다”고 덧붙였다. 뮤지컬 <스모크> 는 끝내 자신과 화해할 수 없었던 청년,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시인의 삶을 무대 위에 재현한다.
낯설지 않은 고통
시를 쓰는 ‘초’와 그림을 그리는 ‘해’. 두 사람은 바다를 꿈꾼다. 그곳에 가면 다시 한 번 날아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그들은 가진 것이 없었고, 바다로 가기 위해 ‘홍’을 납치한다. 그녀가 미츠코시 백화점을 운영하는 집안의 딸이라고 말한 ‘초’는 몸값을 요구하는 전보를 치기 위해 떠난다. ‘홍’과 단둘이 아지트에 남겨진 ‘해’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초’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홍’을 결박에서 풀어준다. 그녀는 ‘초’를 향해 묻는다. 자신을 알지 않느냐고.
세 사람의 관계는 비밀에 싸여있고, 얽히고설킨 감정은 뜨겁게 충돌한다. 꿈꾸는 자가 있고, 절망을 끝내려는 자가 있으며, 끝날 때까지 계속 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 <스모크> 는 이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따라가면서 시인 이상이 느꼈을 법한 절망,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고통 받았을 한 인물의 내면을 비춘다. 작품에 담긴 천재 시인의 이야기는 관객의 삶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추정화 연출가가 말했듯 “천재는 내게 멀었으나 고통은 나에게도 넉넉했으니까”. 꿈, 좌절, 희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덮쳐오는 감정은 이상의 것과 관객의 것이 다르지 않다.
<스모크> 는 2016년 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트라이 아웃을 거쳐, 이상 시인 서거 80주년인 지난해 완성도 높은 미스터리 스릴러 뮤지컬로 탄생했다. 초연임에도 불구하고 객석 유료점유율 86%라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으며 이번 재연에서는 새로워진 무대와 대사, 전 곡에 가까운 편곡을 거쳐 완성된 음악을 선보인다. 작품 곳곳에는 「오감도」, 「건축무한육면각체」, 「거울」, 「회한의 장」 같은 시와 소설 「날개」, 수필 「권태」 등 이상의 대표작이 절묘하게 녹아들어 있다.
배우 김재범과 김종구, 김경수와 임병근이 시 쓰는 청년 ‘초’를 연기하고, 그의 곁에서 함께 바다를 꿈꾸는 ‘해’는 박한근, 황찬성, 윤소호, 강은일이 맡았다. ‘해’에게는 한없이 따뜻하지만 그렇기에 ‘초’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는 ‘홍’ 역할에는 김소향, 정연, 유주혜가 캐스팅됐다.
뮤지컬 <스모크> 는 7월 15일까지,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에서 만날 수 있다.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