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의 한 장면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 (감독 오멸, 2013년 작)는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하는 제주도 4.3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이 영화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아픈 사건의 하나인 4.3을 에두르지 않고 직접 조명하면서 민족의 비극을 담담하고 건조하게 바라보아 사실성을 더 높였다. 흑백으로 상영되는 영화는 빛과 어둠의 단순한 대비를 통해 역사의 명암을 뚜렷이 드러내는 한편, 화면을 매우 회화적이며 시적으로 표현하여 그 내용을 더욱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상업적 투자를 받지 않고 만들어진 독립영화지만, 저예산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완성도가 매우 높고 예술적이다.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까닭에 주제의식부터 영화적 표현 방법까지 뚝심 있게 밀어붙여 기존 상업영화에서 느끼기 어려웠던 깊은 울림이 전해진다.
<지슬-끝나지않은 세월2>의 배경, 11월 한라산 소개령
영화의 제목인 ‘지슬’은 제주도 방언으로 감자를 말한다. 영화는 이념에 젖어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슬, 즉 감자를 먹으며 이웃과 도란도란 삶을 나누던 제주도의 순박한 사람들이 4.3사건 속에서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를 아프게 보여준다.
4.3사건은 통상 19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발생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4.3은 상징적인 날짜일 뿐이고 4.3으로 대표되는 제주도민의 비극은 해방 직후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영화만 해도 4.3사건이 일어난 1948년 봄이 아니라 11월 말 이후를 배경으로 한다. 1948년 11월은 정부에 의해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소개령이 내려진 시기였다. 이때부터 이듬해 2월까지 4개월간 정부군과 서북청년단은 가장 극심하고 악랄하게 중산간 지역의 마을을 초토화하고 대다수의 마을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4.3사건의 희생자 대부분이 이 시기에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지슬> 은 제사의 의식에 따라 영화를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영화 첫 장면에서는 제사를 지내던 집안사람이 몰살된 듯 제기가 널브러진 방 안이 나온다. 학살을 지휘하고 행동에 옮긴 중사급의 군인 둘은 겁탈 후 죽였다고 보이는 여성의 시신 옆에서 제사상에 올렸을 배를 나눠 먹는다. 너무 담담하고 건조해서 처절한 도입부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지슬> 의 배경은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다. 1948년 11월의 중산간 소개령이 내려지고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던 시기, 이 마을 사람 120명은 토벌대를 피해 50여 일 동안 마을과 가까운 ‘큰넓궤’라는 동굴에 머문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영화 마지막에 소개되었듯 대부분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다.
4.3 사건의 발단 1947년 삼일절 기념식과 서북청년단
제주 4?3사건의 단초는 해방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식민지 해방 이후 기대했던 새 정부는 들어서지 않고 그 자리를 미군정이 대신하면서 제주도민들의 실망은 컸다. 미군정은 행정상 편의를 위해 제주도 사람들의 정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제에 부역한 경찰을 군정경찰로 그대로 둔갑시켰다. 독립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친일파가 군림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일제강점기에 징용 등으로 국외에 나가 있던 사람들이 귀환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많은 사람이 돌아오면서 섬이었던 제주도는 실업난과 생필품 부족을 겪었다.
영화에서도 등장인물들이 징용 다녀온 이야기를 나누는데 실제 일제강점기에 징용된 제주도민의 수는 육지에 비해 유난히 많았다. 제주도민들은 일제에 많은 핍박과 착취를 당했고 그랬기 때문에 독립 후 새로운 나라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다.
늘어난 인구에 연이은 흉년, 거기다 콜레라까지 창궐하면서 민심은 팍팍해졌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러한 제주도의 현실을 해결해주기보다는 방치하거나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 3월 1일 삼일절 28돌 기념대회 후 사람들이 미군정의 잘못된 행정에 항의하며 벌인 시위였다. 경찰은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했고 6명이 총에 맞아 희생당했다. 제주도의 민심은 그야말로 들끓었다. 그런 민심에 부응한 것이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노동당, 통칭 남로당이었다. 남로당은 ‘제주도 3?1사건 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제주도청을 비롯하여 민?관합동총파업을 단행하였는데 이 파업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호응이 매우 컸다. 그만큼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던 것이다. 대규모의 파업이 일어나자 미군정은 당황했다.
미군정은 제주도민의 말을 듣기보다는 강제진압을 선택했다. 파업이 공산주의 정당인 남로당 주도라는 점이 미군정을 자극한 점도 있었다. 미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파업 주도 세력 등 약 2,500명을 폭력을 사용하여 무더기로 검거했다.
영화에서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군인 우두머리 한 명이 북한 말씨를 쓰면서 빨갱이는 무조건 싫다고 하는데, 당시 제주도에 파업을 진압하러 온 사람 중에는 군인과 경찰 외에 서북청년단이 있었다. 서북청년단은 해방 이후 북한 지역이 공산화되면서 공산정권을 피해 월남한 이북 각 도별 청년단체가 모여 만든 극우 반공단체였다. 북한 공산정권하에서 부모를 잃거나 땅을 잃은 지주의 자제들이 중심이 된 단체인 만큼 공산주의라고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증오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속에 폭력적인 사람들도 많이 섞여 들어갔다. 서북청년단은 좌우익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우익 진영의 선봉에 서서 무자비하게 좌익을 진압하였다. 증오에 뿌리를 둔 이들은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는 사람은 앞뒤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공격했다. 미군정은 이들의 이러한 특징을 이용했다. 제주도 파업사건이 일어나자 서북청년단을 대거 제주도로 파견한 것이다. 서북청년단은 군인이나 경찰보다 앞장서서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살상했다. 영화에서는 서북청년단과 군인을 분리해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제주도에 들어온 진압세력의 성향과 구성을 고려해 북한 말씨의 캐릭터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1947년 3월의 시위 진압 이후에도 미군정의 파업세력에 대한 강경책은 심화되었고 많은 사람이 미군정의 공포정치를 피해 한라산으로 숨어들었다.
1948년 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 주민들.(출처: 위키피디아)
미군과 이승만 정부의 잔혹한 합동 작전
이듬해인 1948년에 남한단독정부수립이 추진되자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높았고 통일된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많았던 제주도민들에 대한 압박은 더욱 거세어졌다.
그러자 1948년 4월 3일 미군정을 피해 한라산으로 몸을 숨겼던 사람들이 무장항쟁을 시작하였다. 무장대 등 1500여 명이 그동안 제주도민들을 핍박하던 10여 개의 경찰서를 습격하고 우익단체의 요인을 공격하였다. 오늘날 4.3사건이라고 말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미군정은 군인들과 서북청년단을 증파하여 강경진압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김익렬 연대장은 진압을 거부하고 무장대와의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미군정은 김익렬을 해고하고 강경 일변도의 진압작전을 이어간다.
5.10선거로 1948년 8월 15일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의 진압은 더욱 잔혹해졌다. 남한단독정부수립 반대를 주도하던 남로당의 지휘 등으로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2개의 선거구가 과반수 투표 미달 사태가 나자 새로 들어선 남한정부와 미군은 손을 잡고 제주도민에 대한 학살을 시작한다.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내렸다. 조천면 교래리 주민 30명이 육지에서 파견된 군경토벌대에 총살되면서 소위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었다. 해변으로부터 5km가 넘어가는 지역에 있는 사람들, 즉 한라산 중턱 이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폭도로 간주하고 제거하겠다는 것이 새 정부의 입장이었다.
제주도에 출동하는 경비대 대원들을 격려하는 이승만.(출처: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돼지 치고, 감자 먹던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
영화에서 ‘무장대가 한라산에 올라가 고생한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실제 한라산에는 무장투쟁을 벌인 사람들이 숨어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극히 일부분이었고 그보다는 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중산간 지역에 마을을 만들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들은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그 어떤 이념도 정치색도 없이 돼지를 치고 농사를 지으며 감자를 나눠먹고 사는 순박한 민간인들이었다. 중산간에서 해안으로 내려가면 산에서 내려왔다고 빨갱이라고 죽이는 마당이니 내려가지도 못하고 그저 군경을 피해 몸을 숨기고 이 광기어린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 순진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학살은 모질고 독하게 4개월간 계속되었다. 중산간 지역의 초토화 작전으로 당시 이 지역에 있던 마을 95%가 사라졌고 2~3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4.3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은 1954년까지 계속되었다. 중산간 지역 초토화 후에 잠시 소강되었던 정부의 강경진압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때 시위에 동조하였던 사람들이 공산당에 붙을 수 있다 하여 다시금 시작되었다. 소위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끌고 가 학살하는 일이 다수 발생하였다. 제주도 사람들은 누가 자신을 빨갱이로 몰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숨죽여 살았다. 그 공포의 세월이 7년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라산에 숨어든 무장대가 거의 토벌된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에 대한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마침내 4.3사건은 종결을 맞았다.
4.3사건의 정확한 희생자 수는 오늘날까지 제대로 집계되고 있지 않다. 중산간 마을의 경우는 일가족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몰살되어 희생자 신고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민의 1/8, 즉 3만 명 이상이 살해 및 실종되었다고 추정된다.
4.3사건은 이토록 어이없이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데도 애초에 남로당이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대한민국 역사에서 배척당했다. 그래서 관련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죄 없이 숨죽이며 긴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4.3사건이 정부 차원에서 처음 언급된 것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CNN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는 발언을 하면서였다. 1999년 국회에서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 위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루어졌다. 2003년 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다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아직도 4.3사건의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다.
1949년 1월, 봉개리에서 벌어진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에 쫓겨 몸을 피하던 스물다섯 젊은 엄마 변병생 씨는 두 살배기 딸을 안고 오름으로 피신하지만 토벌대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모녀의 시신은 후일 눈 더미 속에서 발견된다. 제주 4.3평화공원에 설치된 억울하게 희생된 모녀의 모습을 기리는 ‘비설’이라는 작품이다.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 는 너무나 비극적이었으나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제주 4.3사건에 대한, 제주도에서, 제주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독립영화라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부제 ‘끝나지 않은 세월’은 아마도 이 비극적 사건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역사적인 평가를 온전히 받지 못하고 있기에 제주사람들의 비극이 끝나지 않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올해로 70주년이 된 4.3사건을 이제는 제대로 기념하고 아우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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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영화 시나리오 작가)
이화여자대학교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박사 과정 수료. 현재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공저), 『한 번에 읽는 역사인물사전』, 『한 번에 보는 세계인물사전』, 『천추태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한국사 영화관』 등을 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