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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스테롤 수치가 올랐네요.”
모니터의 숫자를 살펴보던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3개월 전의 LDL콜레스테롤(나쁜 콜레스테롤) 수치는 152였다. 이번 검사에선 171, 이전보다 20 가까이 올랐다.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의사의 말을 기다리던 최민구 씨는 결과를 확인하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분명 더 낮아질 거라 생각했는데요.”
“지난 번에 오셨을 때 운동을 시작했다고 하셨지요. 술자리도 줄이지 않으셨던가요?”
“운동은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연말 연초에 술자리가 늘긴 했지만 최대한 피했구요. 이전만큼 마시지는 않은 건 확실합니다.”
“체중은 지난번 방문 때와 비슷하네요. 직장에 다니는 분들은 연말이 지나면 체중이 늘어 오시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노력을 많이 하신 것 같군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던 최민구 씨의 표정이 의사의 칭찬에 조금은 밝아졌다.
“그래도 선생님이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송년회다 신년회다 술자리는 많은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도망 다니느라 싫은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허허.”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콜레스테롤 수치가 다시 오를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실은… 제가 한 달 전에 식단을 바꿨습니다.”
최민구 씨가 K건설 과장이 된 것은 3년 전이었다. 입사 이래 줄곧 영업 관련 부서에서 일하며 잔뼈가 굵어진 그였지만 최근에는 종종 업무가 버겁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건설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건설 업계의 사정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음에도 명예퇴직과 인력 감축으로 최민구 씨를 비롯한 과장급의 업무량은 이전보다 늘어났다. 잔업과 야근 외에 영업 업무의 특성상 잦았던 회식과 술자리도 그를 힘들게 하는 요인이었다. 체력은 타고났다 생각했고 감기에도 잘 안 걸리는 편이었지만 최근엔 건강에도 자신이 없어진 상태였다.
작년 가을 건강검진에서 받은 콜레스테롤 수치는 충격적이었다. LDL콜레스테롤 180. 정상은 130 미만이라는데 이전에는 한 번도 이상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으니 최소한 50 이상은 오른 것이다. 건강검진 결과지에 반듯하게 프린트된 ‘고지혈증’이란 단어를 보고 최민구 씨는 어느 건강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심장 혈관에 기름때가 끼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힘차게 박동하던 심장은 혈관 안쪽을 채운 노란 색깔의 기름때가 두꺼워지면서 혈색을 잃고 불규칙하게 헐떡거렸다. 겁이 덜컥 났다.
그는 5년 전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입원했던 때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등산을 워낙 좋아해 지리산 종주를 밥 먹듯이 하던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처음엔 믿기 어려웠다. 새벽 4시에 중부고속도로를 한달음에 달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아버지가 이미 중환자실로 이송된 뒤였다. 링거 줄을 주렁주렁 달고 갈비뼈를 드러낸 채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몸은 그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왜소했다. 대학병원의 의사는 그의 심장 기능이 이전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전과 같은 생활은 어려울 거라 했다. 아버지가 고지혈증 약을 먹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때였다. 한 달간의 입원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십 년쯤 늙어 보였다. 이후 아버지가 무수히 올랐던 지리산 정상의 공기를 다시 마시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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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심장에서 벌어졌던 일이 이미 진행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잠을 설치며 고민하던 그에게 상사인 김 부장이 권해준 곳이 반딧불의원이었다. 저녁에 여는 의원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마침 멀지 않은 곳이라 퇴근길에 들르기에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원장이 좀 까칠한 편이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야.” 반딧불의원에 대해 김 부장이 해준 말이었다. 허름한 종합 상가 3층에 있는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4개월 전이었다. 마른 얼굴에 반백의 의사는 들었던 바와 같이 무덤덤하고 딱딱한 태도였다. 건강검진 결과를 검토한 뒤 의사가 내린 처방은 다음과 같았다. 술자리를 줄이고 최대 주 2회를 넘지 않도록 할 것(그의 술자리 횟수는 주당 네 번 정도였다), 술을 마시더라도 안주를 먹지 말 것, 어떤 종류든 좋으니 규칙적으로 운동을 시작할 것, 그리고 한 달간 2킬로그램을 줄일 것.
최민구 씨가 피트니스 센터 회원권을 끊은 것은 의사를 만난 다음 날이었다. 본래 결심한 것은 바로 실천에 옮기는 성격이었다. 그는 집 근처에 있는 몇 개의 체육관 중에 아파트 단지 상가에 새로 생긴 센터를 선택했다. 아무래도 집에서 가까운 곳이어야 한 번이라도 더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내친 김에 1년치 비용을 선불로 결제한 그에게 탄탄한 몸매의 트레이너가 친절한 말투로 운동기구 사용법을 가르쳐주었다. 체육관 한쪽에선 쉴새 없이 움직이는 일곱 대의 러닝 머신 벨트 위에서 회원들이 땀에 젖은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최민구 씨는 탈의실 거울 안에서 본 퀭한 눈과 붓기가 가득한 얼굴의 자신을 떠올리며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첫날 운동을 마치고 그는 몇 년 새 튀어나온 배와 도드라진 옆구리 살을 만지며 지금이라도 건강검진 결과가 경종을 울려준 것을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달 동안 그는 의사의 처방을 착실히 이행했다. 술자리는 최대한 피하고 안주를 먹지 말 것. 규칙적인 운동을 할 것. 그리고 2킬로그램 감량. 그는 머릿속에서 밑줄을 그어가며 반복해 중얼거렸다. 반딧불 의원을 다시 방문했을 때 그의 콜레스테롤 수치는 30 정도 낮아져 있었다. 의사는 그의 노력을 칭찬했고 체중을 꾸준히 줄인다면 콜레스테롤 수치가 정상 범위까지도 떨어질 수 있을 거라 말했다. 영상 속에서 혈색 좋게 박동하던 심장의 움직임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의사의 전망은 적어도 날씨 예보나 주식시장 전망 보다는 정확할 것이었고,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12월과 1월은 체중을 줄이기 어려운 시기였다. 회식과 술자리가 늘어난 만큼 운동 횟수는 줄어들었다. 줄어가던 체중계의 숫자는 한동안 제자리에 머물렀다가 다시 슬금슬금 불어나고 있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급한 마음에 인터넷에서 체중 감량에 좋다는 방법을 찾던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이 있었다. 어느 블로그에 올라온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 관련 방송 내용이었다.
그는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방송의 내용은 놀라웠다. 건강에 나쁘다고 알려진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으면 오히려 체중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방송에 출연한 출연자들은 이 식단으로 수십 킬로그램까지도 줄였다고 했다. 마법과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버터로 범벅이 된 고기를 먹고, 삼겹살도 모자라 흘러나온 기름을 마시고, 추어탕에 치즈를 넣어 먹는, 기행에 가까운 영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교회를 나가본 적 없는 그였지만 영적 체험에 대한 간증을 보는 것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일반인만이 아니었다. 방송에 출연한 여러 전문가들이 이 식단의 장점과 과학적 근거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이 직접 그 효과를 체험하고 환자들에게 권하고 있다는 의사도 여럿이었다. 최민구 씨가 당장 이 식단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은 그의 성격을 고려할 때 당연한 일이었다.
방송에 나온 대로 따라 하는 건 쉽지 않았다.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는 탄수화물을 피하는 것이었다. 고기와 생선, 우유와 치즈, 채소 등의 음식으로만 식단을 짜야 했다. 요리할 때는 방송에서 강조했던 버터를 아낌없이 넣었고 기름은 올리브유만 사용했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을 때 메뉴를 고르는 것은 더 어려운 과제였다. 순수하게 탄수화물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는 일단 메뉴에 딸린 공기밥을 안 먹는 방법을 선택했다. 두 번째 문제는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번거로워진 것이었다. 아내와 아이들 모두가 같은 음식을 먹긴 어려워서 식사를 따로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정된 식재료로 질리지 않도록 식단을 짜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세 번째 문제는 이전보다 훨씬 늘어난 식비였다.
식단을 시작하고 일주일 뒤 체중은 1.5킬로그램이 줄어 있었다. 안 먹던 버터와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어서 속이 느글거렸지만 그래서인지 식욕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체중을 줄이는 데 더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꾹 참고 식단을 유지했다. 그렇게 한 달을 지내고 오늘 다시 병원을 방문한 것이었다.
“연말에 늘었던 걸 고려하면 한 달 만에 3킬로그램을 뺀 거네요.”
“네. 콜레스테롤 수치도 더 좋아졌을 거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오늘 결과를 보고 사실 실망했습니다.”
최민구 씨의 침울한 말투에 의사는 미소를 지었다.
“방송에서는 지방을 강조했겠지만 사실 그 식단의 핵심은 탄수화물, 그중에서도 설탕이나 밀가루같은 정제된 탄수화물을 피하는 겁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지방이든 탄수화물이든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는 거에요. 지방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학생을 가르치듯 훈계하는 말투였지만 이전보다 한층 부드러워진 태도였다. 그동안 틈틈이 정보를 찾아왔기에 아주 생소하지는 않은 내용임에도 의사의 설명에 최민구 씨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잠시 뜸을 들이던 의사가 약간은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지방은 죄가 없는 게 맞아요. 그걸 과하게 먹는 게 문제지.”
“하지만 방송에선 천연 지방이라면 전혀 해가 안 된다고 하던데요.”
“방송은 과장을 하기 마련이지요. 무조건 좋기만 한 음식은 없어요. 천연 지방이라는 버터나 삼겹살 기름도 과하게 먹으면 오늘 검사 결과처럼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줄이고, 그만큼을 현미밥이나 고구마 같은 좋은 탄수화물로 채워봅시다.”
설탕이나 밀가루보다는 현미밥이나 고구마. 머릿속에서 다시 한 줄을 추가해 밑줄을 긋던 그는 이어지는 의사의 말에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참. 그리고 적어도 최민구 씨에겐 지방이나 탄수화물보다 알코올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는 건 확실합니다.”
2016년 제작된 <지방의 누명>이란 다큐멘터리는 저탄수화물 고지방 다이어트를 다룬 내용으로 방송 이후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평균적인 한국인 식단은 탄수화물 60-70%, 지방 20% 전후의 비율로 섭취 열량을 구성하며, 이는 서양인 입장에선 저지방(Low Fat) 식단에 해당한다. 반면에 탄수화물을 20퍼센트 미만으로 줄인 것이 저탄수화물(Low Carbohydrate) 식단이다. 그중에서도 탄수화물을 5~10퍼센트까지 극단적으로 줄이고 대신 지방을 60~70퍼센트로 늘려 먹는 식단을 저탄수화물 고지방(Low Carbohydrate High Fat, LCHF) 식단이라 부른다.
저지방 식단과 저탄수화물 식단 중 어떤 것이 더 좋은가 하는 질문은 학계에서 해묵은 논쟁이다. 이와 관련해 수많은 연구가 있었으며 현재까지 정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존에 비만 치료의 표준 식단으로 알려진 저지방 식단과 비교했을 때 저탄수화물 식단이 단기적으로 체중 감량에 더 효과적일 수 있으며, 1~2년까지 지켜보았을 때도 최소 비슷한 정도의 효과를 보인다는 것이다. 방송에서 다룬 내용이 새로운 것은 아님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동안 학계에서 지속되어온 논쟁이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다양하고 구체적인 사례와 실험, 전문가 인터뷰 등으로 설득력 있는 내용을 구성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식단이 단기적으로 이득이 있다 해도 포화지방을 과도하게 섭취하기 쉬우며 이로 인해 장기적으로 심혈관질환의 위험을 높일 수 있으므로 안전성에 대한 근거가 좀더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극단적인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에 대한 2년 이상의 추적 관찰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또한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하는 우리나라에서 탄수화물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식단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한계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방송 이후 한국영양학회, 대한내분비학회, 대한가정의학회 등 전문가 단체가 방송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지방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 식단의 핵심은 지방을 많이 먹는 것이 아니라 탄수화물을 적게 먹는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저탄수화물 식단에서는 필연적으로 지방 섭취가 늘게 되므로 고지방 식단은 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버터나 삼겹살 등의 특정 고지방 음식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체중 감량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 칼로리를 줄이는 것이므로 탄수화물이든 지방이든 과다한 섭취는 해가 될 수 있다. 탄수화물만 줄이면 어떠한 고지방 음식을 먹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해당 다큐멘터리가 충실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 이 대목이다.
오승원(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가정의학과 교수)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만성 질환 예방과 건강 증진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환자를 만나고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에세이 <반딧불 의원>을 썼습니다.
haeching
2018.03.12
iuiu22
2018.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