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0일, 독립영화관 필름포럼과 출판사 생각속의집 주관으로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상영회 직후 『퇴근 후 심리카페』 저자인 채정호 정신과전문의수의 강연회가 열렸다.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 『불안한 당신에게』 등을 쓰고, 『굿바이 블랙독』 등을 번역한 채정호 교수는 이날, 대부분의 직장인 관람객에게 오랜 시간 직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상담해오며 다다른 해결법을 풀어냈다.
일과 나를 떨어뜨리기
채정호 교수는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를 간략히 정리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영화 속 주인공 다카시는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불합리한 장시간 노동과 부장으로부터 각종 모욕적인 대우에 시달려 자살을 결심한다. 다카시가 철로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자신을 초등학교 동창이라 밝힌 준이 나타나 다카시를 구한다. 다카시는 준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시간을 보내며 활기를 잠시나마 되찾는다. 그러던 중 회사 내 업무 실책으로 다카시가 큰 위기를 맞고, 준은 다카시가 다시 일어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결국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꿈을 꾸며 끝난다. 채정호 교수는 영화와 현실의 차이를 설명하며 포문을 열었다.
“영화 속 회사 모습은 과장이 과합니다. 요즘 사회에 때리는 직장은 보기 힘들죠. 그러나 눈치로 그에 상당하거나 그보다 더한 인간적 모멸감을 줍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모멸감을 견디면서까지 직장을 다닐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이때, 우리는 세 가지 선택지를 떠올립니다. 자살과 떠남, 혹은 직장에서 버티기.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 속 인물처럼 훌쩍 떠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직장에서 잘 버티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버티기란 쉽지 않다. 열심으로 시작하는 한국의 경우는 더 그렇다. 대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취업을 하고 돈을 벌어 노후를 잘 보내고 싶어 한다. 이중에는 실적이 좋은 사람도 있고 안 좋은 사람도 있다. 둘 중 누가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회사가 실적이 좋은 사람을 더 훌륭하다고 평가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일과 나 자신이 밀착되어, 일이 곧 내가 되는 것이다.
“사실 일은 빠져들기가 참 좋다. 일단 끝이 없다. 그리고 일을 하고 나면 성취감도 크고 보상도 따른다. 쉬고 놀 때는 좀 게으르다는 생각도 들지만, 일하는 동안에는 내가 유능하고 중요한 사람인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러다보면 일과 내가 하나라는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하지만 일은 절대로 내가 될 수 없다. 일이 내가 되고 내가 일이 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이지 나는 일이 아니다. 만약 내가 일이라면 내가 일을 못 하게 되면 내가 없어진다는 말인가?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일의 일진일퇴에 일희일비한다. 일은 내가 직장을 그만두면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20쪽)
채정호 교수는 떠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와 일을 분리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나의 자존감과 일의 성과를 동일시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떨어뜨리고 자존감을 회복할 것인가. 채정호 교수는 우선, 자기 삶의 주관적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주관적 만족도를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많이 소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월급은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적고, 그래서 직무 스트레스를 상쇄시킬 만큼 소비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제외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감사다.
ABC를 기억하세요
감사를 필두로, 채정호 교수는 주관적 만족도를 높이는 방법을 풀어냈다. 그 핵심은 ABC, 다시 말해 감사하는 삶(Appreciate), 나아지는 삶(Better & Better), 섬기는 삶(Care)이었다.
“감사를 뜻하는 영단어 Thank의 어원이 Think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감사는 의식할수록 쉬워집니다.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직장에 감사하기 어렵다면, 지금 이 순간이 꽤 괜찮은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삶의 만족도가 높아집니다. 따라서 지금이 썩 만족스럽지 않다면, 자신이 무엇을 할 때 만족도가 높아지는지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성향에 맞추어 만족스러운 순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다카시가 퇴근 후 친구와 생맥주를 마시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직장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죽이거나 내가 죽을 수는 없으니, 그럴 때는 전문 용어로 포기, 학문 용어로 수용Acceptance해야 합니다.”
“수용은 포기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포기는 약한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용과 포기는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포기는 몸부림을 치는 데도 어쩔 수 없을 때 내리는 결정이다. 그러다보니 마음 상하고 자신감과 자존감도 떨어진다. 반면 수용은 매우 적극적인 선택이다. 완전히 새로운 선택이다. 어떤 것을 안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104쪽)
두 번째로, 무언가 잘할 필요가 있다.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채정호 교수는 영화에서 다카시가 잠깐 살아난 때를 통해 설명했다.
“그때도 여전히 계약이 성사되기 전이고, 부장은 여전히 모욕적으로 대합니다. 그러나 다카시가 열정과 성의를 다하는 순간 세일즈맨으로서 살아납니다. 잘 해내지 못하더라도 성의를 다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매력적으로 변합니다. ‘생활의 달인’을 떠올려 보세요. 무엇 하나를 빠르게 써는 일이 누군가의 눈에는 하찮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일에 몰두한 사람의 눈빛에는 생기가 돕니다.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열정과 성의를 다해 여러 번 해봐야 합니다. 직장생활은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긴다고 표현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꼭 일과 관련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인생에서 내가 잘하는 일 한 가지는 만드세요. 이것이 B, Better & Better입니다. 누구보다 잘하는 Best가 아닌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잘하는 Better. 그런 것 딱 한 가지만 만들면 인생이 꽤 괜찮아집니다.”
마지막은 전념Commitment, 즉 그냥 그 자리에서 머물고 살기다.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에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인생은 살아 있기만 하면 어떻게든 풀리기 마련이야.” 다카시가 지하철에서 준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면 이후의 다른 삶은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죽음을 향하면서 생기를 잃는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향하기 전에, 나 자신을 살피고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채정호 교수는 강조했다.
“여러분이 지금 이 곳에 온 이유도 사실은 자신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별일 아니어 보여도 퇴근하자마자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영화 보고 강연 듣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돌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건, 자신을 돌보고자 시도했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섬기고 살핀다고 하면 보통 휴양지에서 마사지를 받는 걸 떠올립니다. 하지만 고비용이 아니더라도 오늘처럼 우선 나를 섬기는 시늉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 투자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한다면 그만큼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혼자 마음을 다스리는 취미 생활을 해보길 추천합니다.”
내 삶의 달인은 나 자신
채정호 교수는 강연을 마무리하며 다시 ABC의 A, 수용으로 돌아갔다.
“주변 요소에 대한 수용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입니다. 내가 공부를 더 잘했더라면’, ‘내가 그때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같은 가정은 소용 없습니다. 다시 살아도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떡하겠어요. 내 인생이 지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부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해야,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스스로를 살필 수 있습니다.”
“직장생활 동안 일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도 많이 받았을 겁니다. 그래도 당신은 최선을 다해서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까지 버티어 온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잘 살아왔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긍정의 한 마디를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잘 견디어 왔구나, 잘 버텨왔구나.’ 힘들었던 나를 위로하고,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며 격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내 삶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8쪽)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초보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삶의 달인은 우리 자신입니다. 대부분의 기업은 실적을 작년 대비 올해 성장률로 측정하고, 실적을 기반으로 우리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그런데 성장해야 하는 퍼센티지가 높아서, 실적을 달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생각보다 X축이 깁니다. 설거지도 청소도 그 밖에 다른 무엇도 좋으니, 작년 대비 1%만이라도 더 잘하는 것을 한 가지 만들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채정호 교수는 ABC의 균형을 강조했다. 누구든 타고난 체질 혹은 성향에 따라 Acceptacne, Better&Better, Care 중 하나를 더 잘한다. 그런데, 셋 중 하나만 잘 하는 사람은 그 하나가 무너지면 버티지 못한다. 그러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ABC 중 무엇을 더 잘하는지 알고, 나머지 두 가지를 보완”하면 좋겠다고 강연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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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심리 카페채정호 저 | 생각속의집
‘살아남아야 한다’‘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이 정도에 힘들다면 무슨 큰일을 하겠느냐’며 달려왔던 직장인들. 하지만 견딜 수 없을 만큼 직장인들의 정서건강은 빨간불이 켜진 지 오래다.
이정연(도서MD)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