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돈다"고들 한다. 그만큼 실리콘밸리를 이야기하는 책들은 많다. 『실리콘밸리 스토리』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서 주목할 지점이 많은 책이다. 가장 큰 특징은 무수히 쏟아지는 단편적인 정보나 기업의 성공 신화를 단순히 엮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황장석 저자는 한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2012년부터 가족과 함께 실리콘밸리에 거주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스토리』는 실리콘밸리 100년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 그들이 일궈낸 문화와 경험, 사회적 제도와 지원까지 객관적인 외부 관찰자의 시선으로 실리콘밸리를 조망한 책이다. 실리콘밸리 생태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데 도움이 될 저작이다.
'실리콘밸리는 엔지니어의 천국'일까?
프롤로그를 보면 한국에서 오랜 기간 기자 생활을 하다 2012년 말에 실리콘밸리로 갔다고 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가게 되셨나요?
1년 예정 해외연수였어요. 스탠퍼드 대학교 후버 연구소에 비지팅 스칼러(visiting scholar) 자격으로 갔습니다. 방문 연구원, 객원 연구원이라고 부르죠. 기자, PD 등 해외연수를 가는 언론인들 대부분은 대학 연구소에 이 자격으로 갑니다. 재충전의 기회라고 할까요. 원래 1년이 지나면 다시 회사에 복귀해야 하는데, 제 경우엔 가족과 함께 미국에 정착하게 됐어요. 10년 넘게 해 온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기가 쉽지는 않았는데요. 아무래도 실리콘밸리 회사에서 일하게 된 아내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해야겠네요. 실리콘밸리라는 곳이 글의 소재, 책의 소재로 훌륭한 지역이라는 것도 다소 영향을 줬을 겁니다.
실리콘밸리 생활은 어떠신가요? 한국에서의 생활과 다른 점이 있다면요?
해외에 오래 거주하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곳 생활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가족 중심의 시골 생활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대부분 퇴근 후엔 집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요. 실리콘밸리 지역은 전체적으로 번화가가 별로 없는 한적한 교외 지역이어서 자녀를 키우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저는 아내가 출근하고 딸이 학교에 가면 주로 동네 도서관에 갑니다. 스탠퍼드 대학 주변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요. 지역신문과 책을 읽으며 아이디어를 얻고 글을 씁니다. 중학생 딸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두어 시간 뒤에 아내가 퇴근하고 돌아옵니다. 이는 회사에서 일과 후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회식이 없어서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경험이 많은 주위 사람들 말을 들어 보면, 실리콘밸리뿐 아니라 미국의 다른 지역 회사 문화도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저녁이면 가족이 모여서 함께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죠. 한국에선 주말에도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이곳에 와서 살면서 달라진 것 중 하나입니다.
중국계ㆍ인도계 이민자들의 숫자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실리콘밸리 내에서 그들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는데요. 한국계 이민자 사회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나 고무적인 움직임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지요?
중국계 인도계 이민자들은 확실히 이 지역 이민자 사회에선 주류라고 할 수 있어요. 이민 역사로 보면 중국계 이민자들의 역사가 오래됐는데, 인도계 이민자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죠. 한국계 이민자들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고임금 일자리가 많아지다 보니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오는 한인들도 자연스럽게 증가했어요. 요즘엔 미국에서 대학이나 대학원을 마치고 실리콘밸리로 오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이 동네 회사에 취업해서 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실리콘밸리에는 한국에도 알려진 K-Group이란 단체가 있어요.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한인들이 함께 모여 공부하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친목을 도모하는 단체죠. 실리콘밸리를 포함해 샌프란시스코와 그 주변 지역을 통상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또는 그냥 베이 지역(Bay Area)이라고 부르는데요. 베이 지역을 중심으로 기술(tech) 관련 분야 공부를 하거나 회사에서 일하는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들고 이끌어 가는 모임이에요. 참여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 보면 회원이 계속 늘고 활동도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스탠퍼드 대학 같은 장소에서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등 각 분야 소모임이 매주 열립니다. 회원들이 회사 채용 정보를 교환하고, 누군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지원하면 인사 담당자에게 추천을 해주면서 실질적인 도움도 주고 있고요. 모임 웹사이트에는 2015년 10월 현재 회원 수가 3400명이라고 돼 있는데요. 지금은 그보다 수 백 명 이상 많지 않을까 싶네요.
실리콘밸리라고 하면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화려한 겉모습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이 책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고통받는 일반 주민들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담아낸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현지에서 보신 사례가 있다면요?
제 주변 엔지니어들은 '실리콘밸리는 엔지니어의 천국'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미국에서도 실리콘밸리가 아닌 다른 지역에선 엔지니어들에게 실리콘밸리만큼 많은 임금을 주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사실 다른 동네보다 임금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더 풍족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물가가 비싸거든요. 특히 월세와 집값이 워낙 비싸요. 연봉 10만 달러를 받아도 세금을 제하고 받는 돈은 6, 7만 달러 수준인데요. 실리콘밸리의 중심 도시인 팰로앨토 같은 곳에선 방 두 칸, 화장실 하나인 아파트 월세가 보통 3500달러 정도입니다. 3000달러 짜리도 있기야 하겠지만, 무척 찾기 힘들 겁니다. 여기에 차량 유지비도 만만치 않아요. 대중교통이 열악해서 자동차 없이는 돌아다니기도 쉽지 않으니까요. 요즘은 우버를 타고 다니는 경우도 많지만, 매일 우버를 타고 출퇴근할 수도 없거든요.
결국 집값이 싼 주변부로 밀려나게 됩니다. 실리콘밸리 중심도시나 샌프란시스코처럼 집값이 비싼 곳에 살 수 없어서 이사를 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다 보니 숱하게 등장하는 표현이 ‘priced-out’입니다. 물가를 감당 못 해 쫓겨났다는 표현이죠. 곳곳에서 가난한 세입자를 내보내고 재건축을 해서 비싼 값에 세를 놓거나 파는 경우가 많이 보입니다.
팰로앨토 옆에 이스트팰로앨토라는 도시가 있는데요. 페이스북이 있는 멘로파크라는 도시와도 붙어 있어요. 이곳은 저소득층 주민들이 살던 곳이었어요. 게다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갱들이 대낮에 총격전을 벌일 만큼 우범지대여서 다른 동네 주민들은 낮에도 가길 꺼리는 곳이었죠. 집값도 쌌고요. 하지만 이곳도 지금은 여기저기서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페이스북이 들어서면서 땅값, 집값이 엄청나게 올랐거든요. 허물고 재건축하는 건물들이 많은데, 월세를 적게 내던 주민들은 벌써 많이 이사를 했어요. 돈 많은 사람들이 그 동네 집을 사들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2, 3년 전부터 뉴스에 나오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우버나 에어비앤비는 부족한 택시와 비싼 호텔 숙박료, 당국의 느슨한 규제 덕택에 성공했다는 점이 재밌습니다. 지금까지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눈여겨볼 만한 기업이 있을까요?
이미 상당한 투자를 받아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도어대시(DoorDash)라는 기업이 생각나네요. 음식배달업계의 우버, 단순화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스탠퍼드 대학 학생들이 창업한 회사로 배달서비스를 하지 않는 음식점의 요리를 배달해 줍니다. 회사에 채용된 배달원이 아니라 일반인이 배달한다는 게 다른 점이죠. 모바일 앱을 통해 먹고 싶은 요리, 또는 특정 음식점의 요리를 시키면 도어대시에 배달원으로 등록한 일반인 중 배달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해당 음식점에 가서 완성된 요리를 받아 고객에게 가져다 주는 식이죠. 배달료는 음식을 갖다 주고 고객에게 받는 게 아니라 미리 앱을 통해 고객이 지불하고 회사로부터 정산을 받고요. ‘미국판 배달의 민족’ 으로 표현하기도 하던데, 사업방식을 보면 음식배달업계의 우버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아요. 회사로서는 직원을 채용해서 배달을 시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인건비가 적게 들고, 배달원으로 등록하는 개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잠깐 일하고 돈을 벌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는데요. 그와 반대로 ‘우버처럼 저임금의 질 낮은 일자리를 만들고 있다’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회사에 대한 인식도 규제도 달라질 텐데요. 대체로 우호적인 규제 환경에서 사업을 해왔기 때문에 이렇다 할 규제 장벽에 부딪혔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애플, 알파벳,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 공룡 기술기업들이 시장 장악력이 커지면서 스타트업의 황금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는데요. 현지 분위기는 어떤지, 또 작가님께서는 스타트업의 미래를 어떻게 내다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리적으로 실리콘밸리에 기반을 둔 기업은 아니지만, 산업 전반을 분석할 때 실리콘밸리 기술기업들과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서 보곤 하는데요. 확실히 이런 거대 기술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해 가는 상황을 우려하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알파벳만 봐도 정보검색, 광고, 지리정보, 인공지능 로봇, 자율주행차 등 안 하는 게 없어요. 모든 산업 분야를 다 장악하고 있다고 걱정할 만도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스타트업 생태계가 파괴될 것으로 생각하진 않습니다. 여기서 창업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회사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키운 뒤 거대기업에 매각하려는 계획을 가진 경우도 많거든요.
물론 회사를 매각하는 과정이 그렇게 깨끗한 건 아니죠. 사려는 쪽에선 헐값에 인수하려고 하고, 팔려는 쪽에선 제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내가 살 수 없게 되면 망하게 만들려고 하기도 합니다. 마치 스냅챗을 인수할 수 없게 되자 페이스북이 비슷한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망하게 하려고 한 것처럼요. 제 주변에도 스탠퍼드 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이제 막 시작한 스타트업에 합류한 친구들도 있고, 창업한 친구들도 있습니다. 구글 초창기에 입사해서 스톡옵션과 주식 등으로 20대에 거액을 손에 쥐고 창업한 친구도 있고요. 대박의 꿈이라는 게 진통제와도 같아서 지금 힘든 걸 견디게 해주는 것 같아요. 물론 실리콘밸리에선 그 꿈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는 선례가 있기도 하고요.
국내에서도 판교 테크노밸리나 경기도 고양시의 고양 실리콘밸리 같은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는데요. 이런 흐름에서 우려되는 점, 또는 우리가 놓쳐선 안 될 것들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려요.
실리콘밸리 벤처 기업 육성 기관의 대명사 와이 콤비네이터의 공동 설립자이자 벤처 투자가인 폴 그레이엄이 2006년 5월에 ‘실리콘밸리 되기(How to be Silicon Valley)’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강조한 게 있습니다. 그는 부자가 해야 할 역할을 정부가 하기 어렵다고 봤어요.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부자들은 그냥 돈만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이유였죠. 그들은 테크놀러지 사업과 관련한 많은 경험이 있고, 그 덕분에 투자할 스타트업을 선정하는 안목이 있는 데다 돈 뿐 아니라 사업에 필요한 조언과 네트워크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레이엄이 보기에 정부 공무원들은 그런 경험과 능력을 갖춘 전문 투자자들과 경쟁하긴 어려운 사람들이었고요.
그는 정부가 나서서 스타트업 단지를 조성하는 게 실리콘밸리를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아파트에서 친구 몇 명이 모여서 사업을 시작하는 일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청년들이 창업에 뛰어들고, 그들 중 성공한 부자들이 나오고, 그런 부자들이 후배들을 위해 투자하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스타트업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정책이 효과 없는 정책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물리적 공간과 돈을 지원하는 것뿐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창업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방안도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