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심을 넘어 덕질에 가까운 열망의 대상을 누구나 한 명쯤 마음에 품고 산다. 내 심장에 생명과도 같이 아로새긴 예술가는 태양처럼 살다 혜성처럼 떠난 비운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언제, 어떤 계기로 그를 품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15년 전 처음 방문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의 방 한 곳에서만 10시간을 눌러앉아 그림을 따라 그리다가 감히 그가 빙의되는 초현실적 체험을 했었다는 사실이다.
권총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쏘았던 파리 북쪽의 작은 마을 오베흐쉬흐와즈(Auvers-sur-Oise)에서 동생 테오와 나란히 누운 그의 무덤 앞에 해바라기를 놓고 울었던 기억도 난다. 그런 고흐의 대표작 <밤의 카페>와 <노란 방> 그리고 <론 강의 별밤>을 그린 동네가 아를이다. 남프랑스 해안을 따라 니스를 거쳐 모나코까지 다녀오는 여정 중에 아를을 찾았다. 그의 삶이 가장 빛났던 순간을 찾아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심히 들떴다. 기차 창밖으로 염소목장이 나오더니 갑자기 해바라기가 만개한 들판이 펼쳐졌다.
사실 아를은 애초에 고흐로 승부를 거는 동네가 아니다. 기원전 8세기부터 리구르족, 켈트족, 페니키아인이 거주해온 고대도시이자, 동시에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경기장 등 로마제국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아를이 보여주는 낡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몇백 년간 손 한 번 댄 적 없는 것 같은 골목길에선‘색 바랬다’라는 표현이 뭔지 그대로 목도하는 게 가능하다.
최근 아를 시는 역사적 유산을 눈에 보이는 관광 상품으로 승화시키는 데 관심이 많다. 아렐라테(Arelate)라는 로마 시절 도시의 이름을 딴 축제가 매해 8월 열리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시대 복장으로 거리에 나서고 직업 검투사들이 원형경기장에서 고증된 무기로 글래디에이터를 재현하기도 한단다.
그러나 내 목적은 오로지 고흐였다. 고흐에게 아를이란 동네는 폴 고갱과 예술 공동체를 꿈꾸며 행복했던 시간과, 스스로 귀를 자르고 미쳐버린 불행의 시간이 혼재하는 곳이다. 1888년 2월 이곳으로 건너와 1889년 5월 생레미 정신병원으로 옮길 때까지 1년 3개월간 그가 그린 그림은 대략 300여 점. 아름다운 프로방스의 자연에 매료된 고흐의 이 시절 그림은 온통 눈부신 노랑과 군청,연보라로 물결친다.
아를에서 고흐를 찾기란 예상외로 쉽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역전 노란 집은 폭격을 당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심지어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론 강변엔 표지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 사람들은 고흐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내가 만난 아를 시민들은 왜 그렇게 동양인은 고흐를 좋아하냐며 오히려 반문했다.
생전의 고흐도 아를에서 환대받지 못했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외지인이 동네 분위기를 흐트러뜨린다는 주민들의 청원에 쫓겨나야만 했다. 고흐는 죽어서도 여전히 외롭고 슬펐다.그 유명한 <밤의 카페>를 찾았다. 그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그도 시켰을 음식을 시켜 먹노라니 바로 앞에 앉은 고흐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행복했다.
그런데, 고흐의 그림만 기억하고 찾아온 사람에게 현장은 좀 충격적일 수도 있다. 그림 속 카페는 호젓해 보이지만 실제론 상당히 너른 광장에 엄청나게 많은 노천 테이블들이 요란하게 성업 중이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은 아름다운 노란 카페가 그 운영만큼은 썩 아름답지 않다는 점이다. 이곳 토박이인 내가 묵었던 숙소 집주인이 충고해주길, 카페 소유주가 여기 출신도 아니고 불친절해서 차라리 그 옆 다른 레스토랑에 앉아 눈으로만 감상하는 게 낫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맛도 썩 훌륭하지 않았고 웨이터들은 노닥거리다 대놓고 팁을 요구하는 등 관광명소 티를 너무 냈다. 코르시카 밀맥주 한 병을 사들고 론 강변으로 나왔다. 바람은 차가웠고, 별빛은 희미했다. 어쩌면 같은 자리에서 종종 압생트 한 병을 비웠을 고흐를 생각하며 한참을 함께 잔을 기울였다. 그의 그림과 똑같은 앵글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최신 디지털 기기를 아무리 작동시켜도 그 색감이 나오지 않았다. 애초부터 불타는 불꽃같은 황금색 별빛이란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했던 건지도 몰랐다. 사물이 아닌 빛을 보았던 사람. 귀를 자른 고흐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태양처럼 폭발해버린 자아를 거둬주기엔 이 세상은 너무도 논리적이었다. 그는 필경 몹시 외롭고 불안했을 것이다. 그 불안한 마음을 털어놓을 유일한 대상은 늘 같은 자리에 뜨는 밤하늘 별들뿐이었을 것이다.
설령 지금 내 곁에 생명처럼 사랑하는 그가 온다 한들, 나는 과연 그를 알아보고 꼭 안아줄 수 있을까?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고흐의 비밀
1. 고흐의 대표작 <노란 방>은 실제 아를에서 그가 살았던 허름한 단칸방을 그린 그림이다. 고흐는 똑같은 그림을 3개 그렸는데(자세히 보면 벽에 걸린 액자나 마룻바닥의 상태가 조금씩 다르긴 하다) 각각 암스테르담과 파리 오르세,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에 소장돼 있다. 그런데 2016년 2월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가 그림과 똑같이 생긴 방을 만들어 석 달간 에어비앤비로 대여를 해서 화제가 됐다. 하룻밤 숙박비는 단돈 10달러. 진짜처럼 자기소개를 하는 방주인 빈센트와 투숙객들의 후기가 흥미롭다.
2.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은 어제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스스로 자기가슴에 권총을 쏜 걸로 되어 있지만 동네 소년의 우발적인 총격을 받은 거라는 타살설도 만만치 않다. 고흐의 손에 화약 흔적이 없었다는 점, 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독실한 신자였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다는 점 등이 근거로 거론된다.
고흐가 귀를 자른 것도 고갱과 말다툼 끝에 홧김에 그런 게 아니라, 광견병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창가에서 청소부 일을 하던 가브리엘이라는 소녀를 위한 일종의 종교적 희생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3. 인기 영국 드라마 <닥터 후>에 고흐가 나오는 에피소드가 있다. 전화부스를 타고 시간여행을 한다는 설정답게 생전의 고흐를 현대의 오르세 미술관으로 데려오는데, 자신의 그림이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걸 보고 놀란 고흐가 눈물을 펑펑 흘리는 감동적인 장면이 나온다. 나 같은 상상을 한 사람이 또 있었나 보다.
4. “슬픔은 영원하다(La tristesse durera toujours).”
라부 여인숙 옥탑방에서 죽기 전에 고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고흐가 사랑한 술 압생트(Absinthe)의 뜻도 고통이다. 쓴 쑥을 잘게 썰어 알코올로 증류시켜 만든 이 독주는 에메랄드빛의 오묘한 색감에 무려 70도에 육박하는 엄청난 도수로 악마의 술이라고 불린다. 19세기 예술가들의 환각을 도운 술로 유명한데 부작용이 심해 한때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다. 고흐가 즐겨 사용한 강렬한 노란색이 사실은 압생트 중독에 의한 황시증(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병)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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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 피디의 누구나 한번쯤 스페인이지원 저 | 중앙북스(books)
일반 관광객이 아닌 학생이자 생활자의 신분으로 낯설고 매력적인 스페인의 여러 도시를 포함해 인근 나라의 도시들을 날카로운 피디의 눈과 낭만적 가슴으로 때론 담백하게, 때론 치열하게 탐험했다.
이지원(PD)
예능 피디, 작사가, 작가. 지금껏 60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언론정보학과를 거쳐 2000년 SBS 예능국 피디로 입사했다. <유재석의 진실게임> <이효리의 체인지> <김정은의 초콜릿> <하하몽쇼> <정글의 법칙> <도시의 법칙> 등 수많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을 기획, 연출했다. 다비치, 앤씨아 등의 작사가로도 활동했으며, 저서로 『이 PD의 뮤지컬 쇼쇼쇼』 등이 있다. facebook,instagram ID:@ez1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