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경, 방송보다 자신의 목소리로 하는 공연
과거에는 돈 아니면 성공 때문에 노래를 했는데 이제는 내가 어떤 가수가 되어야 하지, 내가 무슨 색깔을 갖고 있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글ㆍ사진 이즘
2017.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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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이름이다. 양수경. 대중음악이 예술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만큼 절정이었고 숨 가빴던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 활약했던 많은 가수 가운데 인기와 이미지 측면에서 단연 전국적 선두였다. 로맨틱 터치의 특급가요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를 비롯해 '바라볼 수 없는 그대', '그대는',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당신은 어디 있나요', '사랑은 차가운 유혹' 등 히트곡도 부지기수였다. 그 노래들 가운데 상당수는 10-20대 젊은 지향성이 주도했던 그 시절에 '성인 풍'을 두르면서 양수경에게 드물게 중장년 팬이 몰리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혼과 육아, 여동생 양미경(2009)과 기획사 예당 엔터테인먼트 대표였던 남편(2013)의 죽음 등 잇단 무거운 사적(私的) 상황에 의해 오랫동안 미디어, 무대와 작별했던 그가 얼마 전 마침내 본격 컴백을 가동했다. 신곡도 내놓고 27년 만의 단독 공연도 감행한다. 올드팬들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공연 티켓은 단숨에 매진되어 한회 더 하기로 했다고 한다. 양수경은 이즘 인터뷰에서 “방송보다는 제 목소리, 제가 낼 수 있는 색깔로 공연을 많이 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공백이 길었음에도 가창 에너지를 조금도 잃지 않고 있다는 평가와 관련해 “나도 내가 맑은 소리를 가지고 있음을 최근에야 알았다. 전에는 개념 없이 노래했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돌아왔다. 얼마 만인가.


1998년도에 결혼했으니까 1997년도까진 나왔던 것 같아요. 1998년쯤부터 거의 안 나오다가 작년에 다시 나온 거죠. 안 나온 거도 정말 기를 쓰고 안 나온 거예요. 어느 무대든지 노래로 복귀하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친하고 좋아했던 (전)영록 오빠가 라디오에서 인터뷰해달라고 할 때도 안 나갔어요. 언젠가 다시 돌아올 때 제대로 하겠다는 마음이었죠.

 

작년에 <불후의 명곡>으로 복귀했다.


경연은 제 감성하곤 안 맞아요. 경연은 감성을 적시는 거보다는 어떤 커트라인에 맞춰야 하는 거라서 자유롭지 못할 거예요. 그 자유롭지 못함이 좀 불편해요. <복면가왕>이란 프로그램도 두 달을 고민하다가 '내가 다시 방송을 해서 나를 알리는 것도 좋지만 그건 못 하겠다' 해서 2주 전인가 3주 전에 안 하겠다고 했거든요. 지금까지 살면서 큰 약속을 저버린 건 딱 그거 하나예요. 못 하겠더라고요.

 

대개는 전성기가 지나고 컴백을 할 때 신곡에 대해 부담스러워한다. 반면 작년에 미니앨범도 냈고 현재 신보 작업이 마무리 중인 것으로 안다.


과거와 지금은 신곡의 개념이 좀 다른 것 같아요. 히트가 되고 안 되고는 제가 결정하는 게 아니니까 곡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긴 한데, 내가 활동하는 걸 알린다는 의미라고 할까요 그전에는 아무것도 몰랐을 때고 내면 들어줄 때였잖아요. 그러니까 웬만하면 앨범도 잘 나갔고 또 다음 앨범 준비하고. 그렇지만 지금은 웬만큼 좋아서는 찾아서 듣지 않잖아요. 현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인데 저의 경우는 '옛날 가수' '지나간 가수' 이런 게 앞에 항상 붙죠. 새로운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수도 있는데, 전 제 색깔 지키기도 힘든 것 같아요. 작년에도 너무 고민하다가, 솔직히 100%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신곡을 냈어요. 지금도 녹음해둔 곡은 여러 개 있어요. 어떤 게 신보에 담길지는 모르겠지만요.

 

아직 타이틀곡을 정해놓은 상태는 아닌가.


보도에 나온 건 있지만 다른 어떤 곡도 타이틀이 될 수 있죠. 조금 더 작업하고 싶어요. 곡이 대체로 슬픈 사랑 얘기, 발라드인데 저는 좀 밝은 걸 하고 싶어요.

 

밝다는 게 전성기 곡으로 설명한다면 어떤 노래?


'사랑은 차가운 유혹'이나 '그대는'이요. 이별을 해도 너무 아프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나이의 이별이 애들처럼 몇 날 며칠 죽고 살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덤덤하게 보낼 수도 있는 그런 나이잖아요. 너무 슬픈 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양수경 씨 노래가 옛날부터 아주 슬픈 노래는 아니었지 않나.


그래도 살다 보니까 이런저런 사연도 있고 해서 (웃음) 조금 더 슬퍼 보이나?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이별 노래가 좀 없었으면 했는데 목소리 자체가 이별 노래, 아픈 사랑 노래가 잘 어울리나 봐요. 굳이 그런 걸 안 하고 싶었는데.


오는 9월 9일과 10일 이틀에 걸쳐 서울 이화여대 삼성홀에서 27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갖는다. 일단 매진을 축하한다. 콘서트 구성을 어떻게 할 예정인가.


지난 시간의 나와 새로 시작하는 나. 1, 2부로 나눠서 20곡 정도 부를 예정이에요.

 

양수경의 히트곡은 다 들을 수 있는 자리겠다.


다는 아니고, 하다 보니까 몇 곡은 빠지더라고요. 그리고 참, 제가 리메이크 앨범을 내려고 하거든요. 레퍼토리는 트로트 쪽이 살짝 많은데, 나훈아 '갈무리'도 들어가고 장윤정의 '애가 타', 최진희 '미련 때문에', 조용필 'Q', 심수봉 '그때 그 사람'도 있고.... 어떤 게 빠지고 들어 갈진 모르겠는데 아무튼 팝 발라드는 없어요.

 

이유가 뭔가.


저는 대중가수니까 대중이 많이 기억하고 좋아할 수 있는 노래를 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그런 기획 앨범을 낼 거예요. 주위에서 어차피 판도 안 팔리는데 왜 판을 내느냐고 얘기를 많이 하는데 사실 저는 항상 애기 아빠가 다 해줬던 사람이라 의식이나 뭐 그런 게 없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약간 도전 의식도 생기고.

 

대중이 기억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하고 싶다.

 

예전에 노래 부를 때 방송 무대에서 많이 웃지도 않았고 카메라 보는 시선도 변화 없이 '멍하게' 쭉 쳐다보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모습이 순진, 순수해 보여서 좋아하는 남자들이 많았던 걸로 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노래를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사회생활을 잘 몰라요. 지금도 가끔 좀 분위기 썰렁하게 하는 질문을 할 때가 있어요. 그리고 항상 고등학교 때부터 매니저가 있었잖아요. 애기 아빠(고 변대윤 회장)가 가기 전까지는 누군가가 항상 옆에서 해주니까 노래하는 거 외에는 다른 생각을 많이 할 필요가 없었죠.

 

1988년 '바라볼 수 없는 그대'가 첫 앨범은 아닌 걸로 안다.


그전에 고등학교 때 음반이 나왔다가 잘 안 됐죠. 1983년인데 그때는 예당이 아니라 서라벌 레코드사인가에서 음반이 나왔고 1984년인가 방송을 한 번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첫 앨범은 음악성도 없었던 것 같고 제작해주신 분도 그렇게 많이 정성을 들인 것 같진 않아요. 국악예고 다닐 때였죠.

 

국악예고를 다녔는데 왜 대학은 영화과(서울예술대학)로 갔나.


제가 민요를 굉장히 잘 해서 국악예고에서 박귀희 선생님의 수제자로 발탁이 되어 그 집에 들어가려고 하던 날, 학교에서 가수 한 명 추천해달라는 작곡가 선생님이 계셔서 저를 추천해주신 거예요 그때도 국악은 가요보다 사정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벌이든 사람들의 인식이든. 근데 저는 돈을 벌고 싶었거든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너무 가난했으니까요. 제가 집의 기둥이 되어야 하니까 국악과 가요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국 가요로 갔죠. 당시엔 실용음악과 이런 게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인데, 연기란 장르에도 꿈이 있었고 연예인이 될 거면 이것저것 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영화과를 갔어요.

 

3-4년 무명을 거치고 '바라볼 수 없는 그대'로 성공을 알렸다. 사실상 데뷔곡이 된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나.


당시에 이 곡을 작곡한 같은 소속사의 가수 박강성 씨가 이런저런 노래를 들려주고 하나씩 녹음을 하는 중이었어요. 근데 그거만 안 들려주더라고요 자기가 할 거라고. 그러다가 들었는데, 사람이 감이란 게 있잖아요. 심장이 두근두근하면서 이건 무조건 히트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강성 씨에게 달라고 졸랐죠. 그때가 이선희 씨 '나 항상 그대를' 그 노래가 나오고 리듬 앤 블루스가 좀 될 때였거든요. 일단 듣고 너무 좋았어요.

 

다음 히트곡이 '그대는'이다. 미드템포에 가볍게 댄스도 할 수 있는 곡이었는데 양수경의 순수 외모도 가장 어필했던 것 같다.


근데 전 정말 싫어했어요. 멜로디가 너무 단순했거든요. 반복되는 단순함. 그땐 그걸 몰랐던 것 같아요. 지금은 대중적 가요가 좋아요. 근데 그땐 어렸을 때라 (폼이 안 나서라고 그랬냐고 하자) 솔직히 말하면 약간 그랬던 것도 같아요. 그때 이지연도 있지 이상은도 있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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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고 싶었던 라이벌은 이지연

 

말이 나와서인데 당시 라이벌로 여긴 가수는 누구였나. 왠지 이 가수는 이기고 싶다 하는..


저는 이지연이요.

 

근데 이지연은 흔히 라이벌로 김완선을 언급했던 것 같은데...


완선이는 우리보다 훨씬 선배에요. 지연이는 저보다 꿈이 높았던 거죠. 저는 지연이와 같은 해에 데뷔를 했고 매일 보고 예쁜 애니까. 쟤보단 좀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이선희나 김완선은 높아 보였고.

 

이지연이 라이벌이었다고 했는데, 둘 모두 대표곡이 묘하게도 전영록과 관계가 있다. 이지연의 '바람아 멈추어다오', 양수경의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당시에 그런 걸 의식했나.


저희 둘이 너무 많이 비교가 됐잖아요. 그때 그런 라이벌 의식을 가진 건 아닌 것 같은데, 우연히 그렇게 곡을 받게 됐어요. (전영록에게 가서 이지연에게 곡을 줬으니 나에게도 달라 이런 건 아니었냐고 묻자) 전혀 아니었어요. 영록 오빠는 저의 우상이었고 제가 팬이었잖아요. 지연이하곤 상관없었어요.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는 로맨틱하고 지적이고 예쁜 곡이다. 노래할 때 기분이 좋지 않았나.


저는 처음 딱 들어서 심장이 막 뛰는 곡은 무조건 히트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를 들었을 때 그랬어요. 영록 오빠가 다른 곡도 많이 줬는데 다른 건 아니었던 거죠. '오빠, 그냥 아무거나 불러봐'했는데 '이건 아닐 거야' 하면서 불러준 노래가 그 노래였어요.

 

처음 '이 밤~'할 때 이미 승부가 났다.


지금도 '이 밤'이라는 시작의 두 글자 때문에 연습 많이 해요. 저의 가장 대표곡이기도 하고…. <가요 톱텐> 1위는 아니어도 무조건 히트한다고는 생각했어요.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그다음에 딱 생각나는 곡은.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죠. 참 좋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저의 가장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3집 수록곡인데 그때 한 앨범에서 네 곡 정도가 히트했어요.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다음으로 '당신은 어디 있나요', '못 다한 고백', '알 수 없는 이별'. 그때 일본 활동을 하느라 제대로 국내 활동을 못해서 아쉬웠지만요.

 

일본에서도 인기였다는 얘기가 기억 난다.


제가 일본에 가면 일본 사람이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일본어에는 받침이 없어서 그런지 가요 부를 때보다 목소리가 훨씬 더 좋아요. '사랑의 세레나데'라는 곡이 있는데 그게 NHK 빼놓고 이곳저곳 방송국에서 전부 신인상을 받았어요. 그땐 일본 문화가 개방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우리나라에선 없는 노래죠.

 

아까 3집이 진짜 전성기라고 했는데 왜 전성기로 표현한 건가.


일단은 스케줄이 엄청 많았고, 금전적인 거도 얘기 안 할 수가 없죠. 돈을 더 벌 수 있는데도 시간이 없어서 못 벌 정도였으니까요. 거기에 일본까지 간 거죠.

 

'당신은 어디 있나요'도 3집 곡인데 그 노래를 좋아하는 팬들이 많았다.


저도 좋아했어요. 저한테는 그런 게(뽕) 잘 어울려요. 21살, 22살쯤 KBS 프로그램 <신인무대>에 나갔을 때 심수봉 씨의 '그때 그 사람'을 불렀는데 되게 좋았어요. 가수마다 색깔이 있잖아요. 제가 발라드지만 (이)지연이나 (이)상은이처럼 아이들을 타겟으로 한 게 아니고 약간은 성인적인 가요를 했죠. 지금도 그게 너무 좋아요. 작곡자인 (김)범룡이 오빠 사무실에 가서 들었을 때 실은 다른 노래를 추천해줬어요. 근데 그 노래를 불러보니까 심장을 뛰게 하는 거예요.

 

당시 딴 가수들은 좀 더 어리고 발랄한 쪽인데 반해 양수경 씨만 나이 대가 더 위인 쪽 노래를 했다. 걸이 아닌 우먼이었다고 할까. 그게 싫지 않았나.


그거 제가 고른 거예요.

 

거기에 TV로 보인 그 멍한 표정도 호감 창출에 한몫했다고 본다.


제가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책을 좋아했는데, 늘 생각이 많았어요. 그런 게 생활처럼 되어있어서 노래할 때도 그렇지 않았나 싶어요.

 

만약 외모에 강점이 있었다면 어디에 있었다고 보나.


말씀하신 맹하고 순진한 거?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죠. 그때는 절대 강점으로 생각하지 않았고요. 실은 진짜 정성들여서 카메라 보고 노래한 거였어요. 몰입이죠. 근데 그게 맞는 거였더라고요. 전 그걸 몰랐는데 요즘 트레이닝하면서 보니까 선생님이 움직이질 못하게 해요. 움직일 때마다 음이 틀려지더라고요.

 

전성기의 거의 마지막 곡이 '사랑은 차가운 유혹'이다. 그때 소속사 사장(변대윤)이 암 판정을 받았던 것으로 안다. 나중 극복하지만 그래도 당시 활동에는 어려움을 겪었을 것 같은데 그때 상황을 듣고 싶다.


그쯤 제가 ABU(아시아?태평양 방송 연맹) 가요제를 갔어요. 그때 엄정화 씨도 같이 갔는데, 정화가 저한테 “언니, (변대윤) 사장님 배에 뭐가 만져져서 우리 다 만져봤다” 이러는 거예요. 저는 그게 장난인줄 알았는데 진짜로 뭔가 있었던 거예요. 암 덩어리였던 거죠. 아무튼 그리고 한국에 와서 저는 이제 활동을 시작하고 이 사람은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3개월 밖에 못 산다는 판정을 받은 거예요. 그 사람이 저희 집 앞에 와서 자기가 다 나아서 오면 결혼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전 재벌 집에 시집가고 싶었어요. 전 너무 가난해서 사람들이 없어서 받는 멸시, 엄마가 고생한 거 보고 자라는 거 이런 게 싫었어요. 그래서 꿈이 조금 달랐죠. 우리 집에선 저 아니면 가난에서 탈출 시켜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변대윤이라는 사람이 그 정도 급은 아니었죠.

 

아무튼 그 앨범(4집)부터 히트곡이 줄어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에 너무 많이 가있었어요. 왔다 갔다 했고, 어떤 노래를 하더라도 제작자와 가수가 딱 들어서 너무 좋아 이렇게 해야 되는데 저는 자꾸 아니라고 하는데 제작자는 계속 좋다고 하고... 그리고 안 되려면 어떤 이유를 대도 어떤 상황이 되어도 안 돼요. 그럴 때였나 봐요.

 

1992년 5집 <한 번 더 생각해봐요>인가, 그 앨범은 완전 실패였다. 시대가 바뀌어서일까 아니면 본인의 문제였을까.


저의 문제도 있었고 서태지가 나오면서 음악적으로 변화가 많은 시기였죠. 그리고 제가 일본에 주력을 많이 할 때라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어요.

 

양수경에게 대중가수의 정체성을 부여한 이가 남편 고 변대윤 씨라고 생각하나.


그렇기도 한데, 당시에는 돈을 벌겠다는 목표가 저를 끌고 온 것 같아요. 돈을 벌기 위해 히트를 내야 했고, 음악을 했던 거죠. 그땐 그런 욕심이 지배했죠. 얼마 전에 한 달 동안 우리나라 여가수들, 외국 여가수들 공연하는 거만 계속 봤어요. 이 사람은 왜 지금 노래를 이렇게 하고 있고 어떤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나 등등요. 제가 나이 들어서 노래할 거라는 생각을 안 해봤거든요. 과거에는 돈 아니면 성공 때문에 노래를 했는데 이제는 내가 어떤 가수가 되어야 하지, 내가 무슨 색깔을 갖고 있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것 때문에 한 달 이상을 모니터 했는데 분명히 내가 할 수 있는 색깔이 있더라고요. 첫 시작은 애기아빠(고 변대윤)가 동기 부여를 해줬고 그게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줬지만, 아마 지금부터 제가 가수로 가야 하는 건 오로지 제 책임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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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팬들의 추억, 내 추억을 훼손하지 않아야

 

어떤 색깔을 지니고 있다고 느낀 건가.


전 깨끗하고 맑은 목소리가 강점이란 거. 그리고 사람들의 추억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제 추억이기도 하고요.

 

얼마 전 전영록 콘서트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발성이 20-30대와 겨뤄도 될 정도로 안정되어 있고 성량도 좋아 보였다. 한창때는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사생활이 평탄치 않았던 걸로 알고 술도 많이 했다는 것을 방송에서 밝힌 것을 봤다. 그런 것을 전제하면 목소리 보전에 선전했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하고 싶어요. 어제도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를 2시간 불렀어요. 부를 때마다 소리가 다르거든요. 콘서트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은 소리가 나오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전 제가 그렇게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는지 몰랐어요. 옛날에는 개념 없이 불렀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니까 근육도 받쳐줬으니까 힘으로도 불렀을 거고. 그러니 전 진짜 축복받은 가수예요. 제가 가지고 있는 실력보다 히트곡도 많이 냈고. 지금도 축복이에요. 제가 이 나이에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아까 말씀해주셨듯이 여러 풍파를 겪고 나서도 목소리가 건강하다고들 말씀해주시니까요. 제가 저를 많이 학대하고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그래도 작년 1년 연습 기간은 제가 산 기간 중에 몇 번째로 힘들었던 그런 시간인 것 같아요.

 

다시 자신을 찾는 시기였기 때문에?


지금 소속사 오스카이엔티 대표(전홍준)가 제일 먼저 저한테 한다는 말이 “어디 가서 노래하지 마세요.”였어요. 너무 못한다는 거예요. 저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는데. 그래서 1년은 죽어라 연습만 했죠. 그 시간이 너무 값졌어요. '하늘은 왜 나한테 모든 걸 다 가져가셨나'하는 좌절의 시간도 있었거든요.

 

소속사 대표와 양수경 둘 다 용기 있는 결정이었을 것 같다. 다시 활동의 나래를 펴야 할 양수경 씨 입장에서 전홍준 대표의 무엇을 본 건가.


그동안에 했던 세계에서 벗어나 또 다른 세계에서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같은 음악 계통이긴 하지만 애기아빠와는 연결되지 않은 쪽으로 하고 싶었죠. 음악적으로는 오스카이엔티 거기 있는 가수들을 쭉 봤는데 대중가수라고 하기에는 조금 마니아틱한 가수들도 있었거든요. 소속 가수의 면면을 보고 가수의 색깔을 잘 끄집어 내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쪽으로 좀 많이 할 수 있겠구나. 저는 늘 색깔이 없다는 게 좀 불만족이었거든요.

 

전성기 시절 발표한 곡 가운데 스스로 가장 아쉬움이 남는 꼽는다면.


먼저 가장 아쉬운 곡은 '바라볼 수 없는 그대' 앨범에 수록된 초기 곡 '외면'이란 노래에요. 제가 좋아하고 제가 정성 들인 거보다는 대중이 더 좋아해주고 저의 대표곡이라고 꼽을 수 있는 노래인데 사실 전 그만큼 정성을 들이지 않았고 심지어 저는 그 노래를 너무 싫어했어요.

 

팬들이 왜 이 곡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나.


가사나 멜로디가 단순하고 좋으니까요. 아까 말씀하셨지만 단순한 게 대중가요인데, 그때는 제가 음악적인 이론을 모른다는 헛헛함 때문에 음악적 허영이 있을 때인가 봐요. 그게 아니었다면 '외면'이라는 노래를 더 잘할 수 있었는데 괜히 싫다고 그러고... 정말 아쉬워요 '외면'이라는 곡이.

 

가장 맘에 드는 곡은.


지금 생각해도 좋은 건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왜냐면 이렇게 모든 사람이 좋아해주는 노래고, 비만 오면 틀어줘서 저를 사람들 기억에서 잊지 않도록 해준 노래잖아요. 새삼 좋아하게 된 노래에요.

 

어렸을 때 좋아했던 가수는 누구인가.


개인적으로는 전영록 씨를 너무 좋아했어요. 누구를 좋아할 때 왜라는 건 없잖아요. 어느 날 가슴에 훅 들어온 거예요. 그러니 제가 영록 오빠가 작곡한 곡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를 노래하고 또 그 곡이 사랑을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겠어요. 그리고 저는 남진 나훈아 선생님 두 분께 다 배울게 많지만 전 특히 나훈아 선생님이요. 가수로서 지켜야 하는 것을 아시는 분이세요. 그분은 옷이 구겨진다고 무대 올라가기 전에 앉지도 않아요. 그런 작은 거 하나부터 철저하게 외롭게 사시면서 가수를 방해하는 모든 걸 안 하신 분이죠.

 

여가수 중에선 꼽는다면.


이미자, 패티김 선생님. 두 분 다 가수로서 자기 절제가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고 끊임없이 노력하시고 운동하시고 연습하시고....

 

팝 가수 중에서는.


팝 가수는 아니지만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를 좋아해요. 그 소리는 어떻게 표현이 안 되죠. 정말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데 훌리오 이글레시아스(Julio Iglesias). 나이를 먹어서 정말 속상한 사람이 있다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에요. 그분은 저음과 고음의 차이가 없어요. 숨을 어디서 쉬는지도 모르겠어요.


국악예고 다니며 국악에서 배운 것은.


흔히 말하는 트로트의 '뽕' 필 아닐까요. 제 노래에 그 느낌이 나오는 건 그게 남아있지 않나 싶어요. 한창때 성인 대상의 <가요무대>와 영 제네레이션 대상의 <젊음의 행진>을 같이 했던 가수는 저 하나였거든요. 저밖에 없어요. 저는 <가요무대> 나가는 게 너무 신나고 재밌었는데 그때 아이들은 <가요무대>를 싫어했죠.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준 팬들도 각별할 것 같다.


제가 전홍준 대표에게 농담으로 “자꾸 저한테 그러면 팬클럽에 얘기해요” 하죠. 이게 협박이에요. (웃음)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팬카페 가서 보면 우리가 있으니까 힘내라고, 거기 18년 동안 지켜줬던 팬들을 보고 그때 진짜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그 어느 다정한 포옹이나 말보다 우리 있으니까 돌아오시라고.

 

케이팝 한류에 대해 선배로서 눈에 들어오는 후배 가수가 있는지. 양수경에게도 과거 ABU(아시아 태평양 방송 연맹) 가요제 입상 등 국제가수 이미지가 있다.(양수경은 1991년부터 이 국제가요제에 참여해 1992년과 1994년 최고 인기가수 상을 받았고 1994년에는 동유럽 가요제인 러시아 백야 축제에 참가해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엑소와 방탄소년단 인기가 굉장한 것 같아요. 케이팝이 가요계의 국제적 위상을 위해서도 그렇고 국가 발전을 위해서도 그렇고, 너무나 훌륭한 일들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선배로서 뿌듯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그게 끝나고 나서도 가수로서 정체성을 계속 갖고 살아갈지 살짝 걱정돼요. 성공해서 돈이라도 벌 수 있는 친구들은 그 추억으로 살겠지만...

 

인기를 누리다가 떨어지는 게 더 견디기 어렵다.


말할 필요가 없죠. 무명보다 그게 더 어려워요. 정말 힘들죠. 너무 힘들지.

 

음악계에서 어떤 가수로 기억되길 바라는지.


이제는 누군가에게 잊혀진 가수가 아니었으면 좋겠고... 제 목소리, 제가 낼 수 있는 색깔로 공연을 많이 하고 싶어요. 방송 출연하고 그런 건 좀 자제를 많이 할 것 같고 공연 쪽으로. 그게 늘 하고 싶었던 거니까요.

 

인터뷰 : 임진모, 정민재
정리 : 임진모
사진 : 홍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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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