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지독하게 쏟아지는 8월의 여름밤, ‘글 쓰는 의사’ 남궁인과 가수 요조가 만났다. 지난 10일 목요일 저녁, 홍대 레드빅스페이스에서 ‘남궁인x요조, 지독한 여름밤의 북토크’가 열렸다. 응급의학과 의사인 남궁인은 『만약은 없다』에 이어 『지독한 하루』에서도 응급실에서 마주한 가혹한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간절한 의사의 이야기를 써냈다.
『만약은 없다』에서 하지 못한 응급실 이야기를 담다, 『지독한 하루』
요조: 처음 『지독한 하루』를 읽었을 때 『만약은 없다』에서 이어지는 시리즈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이 시리즈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올까, 하는 기대도 생겼어요. 앞으로도 비슷한 책을 낼 의향이 있으신가요?
남궁인: 『만약은 없다』를 쓴 후에도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작년부터 하지 못한 이야기와 사회적인 이야기를 더 써서 이번에 『지독한 하루』라는 책을 냈어요. 하지만 이젠 응급실 이야기를 그만 써야겠다는 생각도 해요. 직업이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이다 보니 그럼 계속 응급실 이야기만 써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실은 3년간 응급실이 아닌 소방본부에서 일했어요.
그런데 지난 5월부터 응급실에서 의료행위를 다시 시작하면서 느낀 게 많아요. 실제로 숭고한 일이지만 너무 미화한 건 아닐까, 내가 주인공인 영웅담을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과 응급실이라는 공간이 여전히 할 이야기가 많은 곳이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어요. 그래서 근무를 하면서 인상 깊은 환자의 사연을 비밀 파일로 저장했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제 안에서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어요. 당장 내년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쓰지 않을까 싶어요. 더 지독한 거로. (웃음)
요조: 『지독한 하루』라는 제목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요?
남궁인: 원고를 읽어보니 한 편 한 편이 하루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그 하루가 쉬는 날과는 완전히 다른 하루이고, 예전부터 좋아했던 ‘지독하다’이 분위기에 어울려서 『지독한 하루』라는 제목을 지었어요.
의사의 하루, 혹은 작가의 하루
요조: 책도 두 권을 내셨고, 싸이월드에도 써놓은 글이 상당하다고 하셨어요. 의사로 바쁘게 지내시면서 그 많은 글을 언제 다 쓰시나요?
남궁인: 알랭 드 보통은 글을 쓰려면 글을 쓰는 시간만큼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생각하는 시간도 글 쓰는 시간에 포함돼요. 생각 자체가 글이 되게 하려고 노력해요. 일상에서 벌어진 일이나 대화를 글로 쓰려고 생각해요. 이 생각들이 기승전결을 갖춘 글이 되면 그때부터 써요. 일하는 시간을 빼면 종일 쓰고 있는 셈이에요.
게다가 지금은 생각만 해서는 안 돼요. 어제 추천사와 피키캐스트 마감이 있었고, 내일도 문예지 마감이 있고, 주말에는 책 원고 마감이 있어요. 그 후엔 도 스토리 펀딩 1화 마감이...... 요새는 남는 시간에는 무조건 써요.
요조: 하루가 온전히 글을 쓰기 위한 준비과정, 혹은 글을 쓰는 과정이네요. 의사의 삶을 사시면서 동시에 작가의 삶을 살고 계시네요. 의사의 직분을 가지고 종일 작가의 정체성을 예리하게 유지하시는 게 대단하세요. 남다른 시간 배분의 노하우나 고도의 집중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남궁인: 의외로 많이 물어보시는 이야기인데, 그렇지도 않아요. (웃음) 다만 저는 시간 낭비하는 걸 싫어해요. 영화도 영감을 주지 않을 것 같으면 보지 않고, TV는 일절 보지 않아요. 항상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겠다고 생각할 뿐이지, 시간 관리를 하려고 칼같이 시간을 재진 않아요.
극적이고 ‘지독한’ 묘사
요조: 모든 챕터가 영화나 드라마 같아요. 스토리가 버라이어티하고 극적이기도 하지만, 묘사를 진짜 지독하게 하셨어요. 이렇게까지 써야 할까, 싶은 지독한 묘사나 도가 지나쳤다고 느낀 부분을 읽었을 때는 힘들었어요. 잠시 한 부분을 낭독해드릴게요.
지그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을 놓고, 일단 두꺼운 실에 매달린 바늘이 살갗을 뚫고 나왔다. 바늘을 뽑아 반대 모서리를 꿰뚫고, 그 위에 학생 때 배운 어설픈 매듭을 지었다. 딱 한 땀만 꿰매진 두피는 양쪽이 간신히 붙어 있는 위태로운 느낌이었다. 그 사이로 아직 하얀 두개골이 훤하게 보였다. - 72쪽
남궁인: 사실 산문을 쓰기 전에 운문을 썼는데, ‘인턴 첫날의 일기’는 제가 짧은 산문시로 써놨어요. 인턴 첫날, 딱 1시간 동안 겪은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새벽 3~4시에 일이 끝나고 6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마치 전쟁노트처럼 그 시를 적었어요.
그 시를 다시 읽으니까, 그 기억이 너무 생생하고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제가 받은 첫 환자였고, 아직 경험 많은 의사가 아닌 일반인에 가까운 상태였어요. 그래서 더 기괴하게 보일 수 있고, 그걸 표현하는 묘사를 써보고 싶었어요.
요조: 다른 챕터도 묘사가 세밀하고 극적이어서 작가가 경험한 일을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강박적인 욕심이 느껴져요. 에둘러서 말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하는 글에서 강한 뚝심같은 게 느껴져요.
남궁인: 원래는 시로 쓰려 했는데, 시로 쓰면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요. 시를 읽어줘도 “그게 어쨌다는 거야?”라고 말해요. 산문으로 쓰면서 세밀한 묘사에 집중하면서 독자를 현실에 끌어당기는 데 신경 썼어요.
요조: 글에 대한 동경이나 쓰고 싶다는 열망이 처음엔 운문에서 비롯되었나요?
남궁인: 제가 자주 쓰고 좋아하는 말이 ‘글로 전해지는 감정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인데, 늘 시를 읽으며 느꼈어요. 시라는 짧은 글이 저를 울려버릴 수 있는 감정을 가졌다는 게 대단하고 아름다웠어요. 그런데 저는 운문에 재능이 없더라고요. 10년 이상 그걸 확인하다 산문을 쓰는 작가가 되었어요. 그래도 시를 쓸 때의 버릇이나 표현이 많이 남아 있어요.
사회적인 목소리를 담은 『지독한 하루』
요조: 『만약은 없다』에서는 환자를 상대하는 의사 개인의 고충이 담겨 있었다면, 『지독한 하루』에는 사회적인 이야기가 많아요. 아동폭력과 응급실 폭력, 소방관의 처우에 관한 이야기들을 쓰셨는데, 사회적인 이야기를 쓰신 계기가 있나요?
남궁인: 『만약은 없다』에서는 저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울한 의사가 쓴 우울한 환자들의 이야기를 썼는데, 『지독한 하루』에서는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사람들이 제 글을 많이 읽었으니까 이 영향력으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활동을 고민했어요.
소방본부에서 일하는 동안 알게 된 소방관의 처우에 관한 이야기, 응급실에서 경험한 폭력, 그리고 아동폭력으로 다친 환자의 이야기를 적었어요. 실제 응급실에 온 환자의 현장감 있는 이야기에 사회적인 이야기를 덧붙였을 때 더 큰 의미로 다가올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썼어요.
요조: 책에 쓰신 사회적인 이야기, 그중 아동폭력 이야기에 피드백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남궁인: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빈곤 아동을 돕는 ‘세이브 더 칠드런’이라는 단체에서 함께 할 활동을 제안해주셔서 흔쾌히 수락하고 일정을 논의하고 왔어요. 저는 그저 글 쓰는 자아를 가진 평범한 의사인데, 이런 단체와 뜻있는 행사에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뭉클했어요.
가장 애착이 가는 ‘하루’
요조: 『지독한 하루』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챕터가 있으신가요?
남궁인: 방충망에서 아이들이 떨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1미터의 경계’라는 챕터가 있어요. 유독 힘들게 쓴 챕터인데, 제가 직접 치료한 환자는 아니고 보고로 들었던 이야기를 썼어요.
감정을 갖추는 데만 2주가 걸렸어요. 그걸 쓰려고 방충망이 찢어지고 떨어지는 아이를 상상하고, 떨어져서 살아난 아이와 엄마에게 감정 이입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2주가 지난 뒤 글을 쓰는데, 엄마 대사를 쓰면서 한 단어를 쓸 때마다 한 번씩 울었어요. 너무 이입을 심하게 해서...... 내가 엄마라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먼저 벽을 막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직접 보지 않고 이입을 하고 만들어내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더 기억에 남았어요.
그다음이 ‘산 채로 불탄 일곱 명의 사내’라는 챕터인데, 이건 제가 직접 본 사건이에요. 당시 집중 치료실에 불탄 환자 세 명이 나란히 누워 있었어요. 검댕을 뒤집어쓰며 환자를 치료했던 일을 복기하려니까 너무 힘든 거예요. 이 챕터도 2~3주 내내 저를 그 공간에 다시 두려고 노력했어요. 그때로 돌아가 다시 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 더 힘들었어요.
요조: 욕심나는 챕터가 너무 많았는데 어렵게 하나를 골랐어요. 「라포를 형성한다는 것」이라는 챕터인데, 여기서 라포가 무슨 말인가요?
남궁인: 환자를 진료하는데 가장 중요한 거예요. 환자와 의사 사이의 유대감을 뜻하는 의학 용어입니다. 환자와 의사가 서로 믿음을 갖는 것을 라포를 형성한다고 해요. 의사마다 라포를 형성하는 법이 달라요. 「라포를 형성한다는 것」은 제가 라포를 형성하는 법을 글로 쓴 부분이에요.
“나는 하루에도 수차례 누워 있는 환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일단 환자 가까이에서 눈빛을 교환하고 나면, 그 환자가 오래 기다린 탓에 힘겨워하고 있다거나, 뒤늦게 나타난 내게 억하심정을 호소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습관처럼 환자에게 다가가 이마에 깊게 푹, 손바닥을 얹는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교수님처럼. 그러면 환자의 이마에서 온기가 느껴지고, 방금까지 다급했던 땀내와 열기가 훅 밀어닥친다.” - 67쪽
요조: 선생님은 이마에 손을 대는, 살과 살을 맞대는 행위로 라포를 형성하고 계세요. 이 챕터를 읽으면서 얼마 전에 읽은 허은실 시인의 「이마」라는 시가 생각이 났어요. 이마에 손을 얹는 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시거든요.
남궁인: 이마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하자면요. 제가 『만약은 없다』를 내고 작년에도 이 자리에서 질문을 받고 있었어요. 어느 분께서 환자랑 교감하는 방법은 어떤 게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예전에 교수님이 이마에 손을 대시는 걸 보고 저도 이마에 손을 댄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면 환자 분들이 화를 못 내요. (웃음) 이마에 손을 대는 순간 정말 따뜻한 마음이 들거든요.
성탄절의 특별한 비감(悲感)
특별한 날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모두가 행복을 느끼는 크리스마스이브가 다가오자 세상에서 자신만 행복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저주받을 감정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오른 제 우울의 무게를 이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의 마음을 그렇게 헤아려보더라도, 그 일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어처구니 없었다. - 237쪽
남궁인: 성탄절 날 제 앞에 가스 폭발로 타버린 사람의 형체가 실려 왔어요. 20대 중반 분이신데, 자기 집을 폭파해서 다 태워버리고 죽은 거예요. 부모님은 옆에서 곡을 하시고......
저한테 온 건 말 못 하는 시체인데 이 사람이 이 일을 결행하기까지 어떤 사유의 과정을 거쳤을까, 어떤 심정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고민하면서 이입하게 되었어요. 저도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때의 기억 때문에 청년의 이야기에 공감했어요. 스스로 읽고 잘 풀어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낭독하게 되었어요.
요조: 저는 그 챕터를 읽으면서 응급실 생활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사람만 상대하는 일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힘들겠지만, 모두가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흥이 요구되는 시기인 성탄절이나 연초에는 특별히 더 큰 비감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혹시 성탄절 날 일을 하지 않고, 24~25일을 쉴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으세요?
남궁인: 얼마 전에 제 생일이었는데, 일부러 그날 당직을 넣어달라고 했어요. 뭐할지 고민되잖아요. 그런 성격이라. 하...... 크리스마스 이브랑 당일을 다 쉬라고요? (웃음) 그럼 글을 쓸 거 같아요. 그런 날만 쓸 수 있는 글이 있거든요. 군중의 쓸쓸함을 이야기하면 좋은 표현이 나올 거에요. 혼자 함정을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네요.
요조: 다음은 어떤 책을 써낼 예정이신가요?
남궁인: 요조 씨랑 시리즈로 집필할 책이에요.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은 내용을 일기 형식으로 가볍게 쓰고 있어요. 1월부터 6월까지 총 180편이에요. 요조 씨 책이 먼저 나오고, 이어서 제 책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북토크, 독자들의 질문
선생님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의사가 되시고 그 생각이 바뀌셨는지 궁금합니다.
결국 죽음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만약은 없다』와 『지독한 하루』를 썼어요. 의대생이 되기 전에는 죽음과 그 옆에서 통곡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병원에서 처음으로 그 장면을 봤을 땐 정말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이런 세상이 있구나, 하고. 죽음을 간신히 지켜만 보다가 응급실에 갔을 땐 더 큰 충격을 받았어요. 세상엔 이렇게 불안하고 아픈 사람들이 있구나. 죽음과 아픔이 교과서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이렇게나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제가 본 죽음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에게 이런 세계가 있다고 알리고 싶었어요. 이런 세계의 단면을 보여주며 불시에 닥쳐오는 다양한 죽음을 쓰고 싶었어요.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1학년 학생입니다. 지난 학기에 해부학실습을 하고 나서 굉장히 심란했어요.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야 조금 무뎌졌고, 무뎌지는 과정이 저를 보호하는 방어기제라고 생각했어요. 선생님은 작가로서 응급실에서 일어난 일을 계속 되새기시며 글을 쓰세요. 그 일이 힘들지 않으신가요?
의사로 살면서 많은 환자를 봤고, 보고 있어요. 치료는 대체로 교과서대로 되지 않아요. 결국 응용해서 현실에 적용해야 되는데, 그 과정에서 환자가 많이 죽어요. 환자가 죽는다는 건 누군가가 제 책임으로 죽은 거예요. 환자가 도착한 때부터 죽음까지 한순간이라도 잘못 판단하지 않았는지 이 잡듯이 기억을 뒤져요. 실수가 하나라도 나오면 이게 정말 오래 가요. 버스를 타고 집에 가다가 갑자기 울기도 해요. 그렇게 새겨두면 나중에 실수하지 않아요. 본능적으로 다른 행동을 해요. 요새는 환자가 죽었을 때 돌이켜보면 ‘아,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라는 결론이 많이 나와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너무 힘들어요.
결국 제가 힘들지 않으려는 방어기제가 복기하는 습관이에요. 그래서 의사 생활을 하면서 노트에 일일이 실수를 가감 없이 적어둔 게 많아요. 안 적고는 견디지 못해서. 이렇게 스스로 괜찮아지려는 마음이 글로 나오고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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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하루 남궁인 저 | 문학동네
그의 하루는 지독하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가 지독하며, 죽음의 문턱까지 간 환자를 다시 삶의 영역으로 돌이켜야 하는 긴박한 과제가 지독하며,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떠나버린 환자와 이별하고 또 이별해야만 하는 일이 지독하다.
한재현(예스24 대학생 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