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공소가 줄 지어 있는 문래동의 오래된 골목, 낯선 공기를 마시며 두리번두리번 걷다 보면 조그만 간판이 눈에 띕니다. ‘그림책식당’. 카페 같기도 하고, 전시장 같기도 하고, 작은 그림책방 같기도 한 곳.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왠지 모르게 재미나 보이는 이곳은 박정섭 작가가 운영하는 문화공간 겸 작업실입니다. 볕 좋은 어느 겨울 날, 과일차를 마시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옮깁니다.
『감기 걸린 물고기』는 소문에 관한 그림책이에요. 왜 ‘소문’인가요?
말로, 소문으로 인해서 상처받고 오해를 겪은 적이 있어요. 나중에 TV에서 우연히 정치 관련 뉴스를 보다 갑자기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그때 한 번에 쭉 적었던 거죠. 그걸 가지고 조금씩 다듬고 또 다듬었어요. 이미지는 처음부터 바로 떠올랐어요. 심해에 사는 물고기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쪽 부류의 사람은 아귀, 다른 부류는 작은 물고기. 이렇게요.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2년 조금 넘게 걸렸어요. 더미를 만들어서 저 혼자 8개월 정도 가지고 있다가 출판사랑 계약을 했죠. 즐거웠어요. 작업 기간을 떠나서, 일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책이라고 할 수 있죠.
왜 가장 즐거웠어요?
제 맘대로 했으니까요.(웃음) 편집부에서 제 의견을 많이 반영해 주셨어요. ‘그림책은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구나, 앞으로 더 재미있게 그림책을 만들 수 있겠구나’라고 느꼈어요. 그전까지는 그림책을 만들 때 이게 내 이야기인가… 확신이 없었는데 『감기 걸린 물고기』를 하면서 제 색깔을 찾았다고나 할까요. 아,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구나, 라고요.
몇 년 전 인터뷰를 보니 ‘나는 아직 내 스타일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셨더라고요. 지금은 어때요?
지금요? 찾았다 못 찾았다, 보다는 그냥 이야기를 짓고 만드는 게 더 재미있어졌어요. 그리고 독립출판 쪽으로 관심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방식을 찾은 것 같아요. 그림책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지.
그 방식은 ‘마음대로 하는 것’이 핵심 아닌가요?
일단은요. 처음에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걸 다 해야 한다고 봐요. 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눈치를 보게 되거든요. 더미를 처음 시작할 때는 눈치보지 않고 일단 완성하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주제도 자유롭고, 용감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출판사에 보여줬는데 출판사에서 수정을 요청할 수 있잖아요?
이야기가 확 바뀌지 않는 한, 책이 더 좋아지는 수정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죠.
보통 그림책을 만들 때는 편집자와 논의해서 스케치 수정을 하고 채색에 들어가는데, 『감기 걸린 물고기』는 그 과정 없이 바로 완성 그림이 나왔어요.
네 맞아요. 그런데 이 방식이 저한테 맞는 거지,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니까요. 저는 좀 더 예민한 편이에요. 말이 쉽게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마음속에 남아요. 작업할 때 상대방이 특별한 생각 없이 던진 말이라도, 그게 저한테는 마음에 자물쇠로 작용하는 거죠. 그래서 그림책 작업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말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고, 내가 취해서 쭉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마감 직전에 크게 수정을 했죠?
물방울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 다시 그렸어요. 원래는 선이 매끈했어요. 그런데 바다 배경이랑 결을 맞추려면 물방울의 선도 약간 매트한 느낌이 있어야겠다 싶었죠. 그래서 이걸 오늘 다 바꿔서 빨리 넘겨야지 하고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수정 했는데, 디자이너는 이미 마감을 끝낸 상태였어요. 디자이너 대로 다른 부분을 수정해서요. 제 경험 부족인데, 결국 디자이너는 똑같은 수정을 두 번 하게 된 거죠. 되게 미안해서 끝나고 나서 맛있는 것 사 드렸어요. 사실 저는 평소에 그렇게 꼼꼼한 사람이 아니에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내가 이걸 왜 다시 그리고 있을까? 아무도 모를 텐데!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누군가가 다시 그리라고 했다면 전 안 그렸을지도 몰라요. 작가 스스로 자기 작품을 보고 고칠 점을 찾는 것이 건강한 방식 같아요.
그러려면 자기 작품에서 좀 떨어져 있어야 하지 않아요?
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거기에 푹 빠져 있으면 어렵죠. 더미든 책이든 일단 완성을 한 다음에, 쉬면서 바라보면 확 와요. 아, 내가 왜 저렇게 했을까? 이렇게 하면 더 좋을 텐데…… 그때 성장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옆에서 누군가가 자꾸 이야기를 하면 성장이 느려지겠죠. 먼저 혼자 많이 만들고, 다시 보는 게 좋죠. 요리도 자꾸 하면 늘잖아요.
그렇죠. 독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감기 걸린 물고기』는 유아로 분류되어 있긴 하지만, 딱히 아이들을 바라보고 만든 책은 아닌 것 같아요.
예전에 좋은 그림책에 대한 정의를, 아이와 어른 구분 없이 좋아하는 책이라고 내렸어요. 항상 그런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몇 년 전에 다시마 세이조 씨가 한국에 왔어요. 그때 작가와의 만남에 참여해서 질문을 던졌어요. “그림책을 만들 때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작업합니까?” 그랬더니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어요. 아이들이 다 자신의 책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굉장히 신선했죠. 저도 아이라는 대상을 다르게 보게 된 것 같아요. 경험이 없을 뿐이지 어른보다 더 현명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어른은 자라면서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어렵게 하고 스스로를 옭아 매기도 하기 때문에…… 글을 모르는 영유아만 아니라면 충분히 어른과 같이 읽고 즐길 수 있다고 봐요.
독자 반응 중에 인상적인 것이 있었나요?
『감기 걸린 물고기』를 보자마자 이 그림책은 정치적이네요 라고 말한 분이 계셨어요. 노란색은 정의당. 빨간색은 새누리당…… (웃음) 대박 나셨네요. 돈 많이 버시겠어요. 어른이 봐도 좋고 아이가 봐도 좋아요. 이렇게 말씀해 주신 분도 계시고요. 사실 작업실에만 있으면 반응이 어떤지 몰라요. 출판사 관계자 분들이 몇 쇄 찍었어요 라고 얘기해 주시면 그렇구나 하는 거고. 온라인 서점 들어가서 판매지수를 보거나, 그런 것 말고는 피드백을 들을 수 있는 경로가 없으니까요. 가끔 강연하러 가서 독자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감사하죠.
편집자들 사이에서 고집 센 작가로 통하는 거 아세요?
아, 감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면 제가 너무 힘들어서요. 사주에도 나왔더라고요. 고집이 무지 세다고요. 토(土)가 많아서.
작가님 그림에는 조금 어두운 구석이 있어서 좋거든요. 마냥 착하지 않은 점이 매력이라고 봐요.
제가 착하지 않으니까요. 뭐 착함도 갖고 있고 여러 가지 면을 다 가지고 있는데. 저는 그렇게 착한 아이는 아니었죠. 나다운 그림책을 하고 싶어요. 제 성향이 사랑스럽거나 착한 것보다는 웃기거나 비판하는 것, 풍자, 이런 쪽으로 치우쳐 있어요. 그림에 그런 것들이 묻어나오는 거죠. 아마 만화를 좋아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영감의 루트를 알려 주세요.
호기심? 호기심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어요?
예전에는 존 버닝햄, 앤서니 브라운, 볼프 에를브루흐……
볼프 에를브루흐라면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요?
아뇨 그거 말고 다른 작품이요. 그 분이 좀 어둡거든요.
아, 『내가 함께 있을게』!
네 그렇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아름답게 하나 싶었어요. 그리고 토미 웅거러. 남들이 피하는 캐릭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내는 걸 보고 놀랐어요. 특히 『곰 인형 오토』요. 아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저한테 그림책의 매력을 확 올려 주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없어요. 책을 잘 안 보거든요. 일부러 안 보는 건 아닌데 관심이 없어졌다고 할까. 옛날에는 다른 작가들 책을 보면서 ‘우와’ 그랬는데, 이제는 내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요. 자료 모으고 글 쓰고 이런 것들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너무 솔직했나.(웃음)
처음에 놀랐던 것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씨’를 붙이잖아요. 일로 만나면 보통 직함을 부르는데.
네. 직함보다는 이름을 부르려고 하죠. “누구누구 차장님”이라고 부르다 보면 나중에는 그냥 “차장님, 차장님” 이렇게 되거든요. 이름이 불려지는 것에 대해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있어요. 예전에 무인도에 간 적이 있는데, 같이 간 사람들이 닉네임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어요. ‘푸른 오이 씨’ ‘느린 거북이 씨’ 이런 식으로요. 이렇게 서로를 부르다 보니까 나이에 따른 수직 구조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가 되더라고요. 서로 존중하는 장치로 대등하게. 그런데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한테는 안 해요. 직함을 사용해요. 이름 부르는 걸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만 합니다.
『감기 걸린 물고기』가 나오기 전부터 정섭 씨 새 책 소식을 궁금해하는 독자 분들이 많았어요. 출판사 입장에서 체감하는 팬의 열기가 있어요. 비결이 뭔가요?
지금 하라면 도저히 못하겠는데, 춤을 췄어요. <나는 가수다>가 한참 유행했을 때, ‘나는 동시다’라는 동시 낭독회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쓴 동시가 ‘대머리 민들레’였는데, 그냥 낭송만 하면 재미 없으니까 조pd ‘친구여’에 맞춰서 춤을 준비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잠깐 춤을 췄거든요. 안 춘지 오래됐으니까 댄스 학원에 등록해서 안무를 짰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제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너무 필이 충만해서. 돈을 냈으니까 수업은 들었지만 저 혼자 안무를 바꾸고 해서 낭독회에 나갔어요. 대머리 아버지 가면을 쓰고 춤을 췄죠. 반응이 좋았어요. 한 번 하고 끝내기는 아쉽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공주니어에서 이마트 문화센터 수업을 잡아 줬어요. 그래서 아이들 즐겁게 해 주려고 시작할 때 가면 쓰고 춤추고, 사탕 뿌리고. 퍼포먼스를 많이 했어요. 안쓰럽게 보시는 분도 많았어요. 작가가 이렇게 까지 해야 하니? 애쓴다. 이렇게요.
그림책 말고도 하고 있는 일이 많아요. 보드게임도 만들고, 전시 기획도 하고, 피규어도 만들고요.
뭐 하나를 진득하게 오래한 것은 그림책이 처음이에요. 그런데 그림책 작업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진짜 뭘 좋아하나 되돌아보니, 생각하고 상상한 걸 현실로 이루는 걸 좋아하더라고요. 거기에서 행복감을 느껴요. 그런데 나 혼자만 좋은 것보다는 주위 사람들과 좋은 영향을 나누고 싶어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장르 구분하지 않고 즐겁게 같이 하려고 생각 중이죠.
보드게임이나 피규어도 그런 맥락이겠네요?
네. 옛날에는 이것저것 많이 배우고 했거든요. 중심 없이. 그런데 지금은 그림책을 오래하다 보니까 그림책과 관련해서 확장되는 것 같아요. 보드게임, 피규어, 그림책. 이렇게 세 가지가 강력하게. 『감기 걸린 물고기』 보드게임도 3월 말쯤에 나올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5년 뒤에도 그림책을 만들고 있을까요?
그림책 작업은 꾸준히 하고 있을 것 같아요. 한 번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그림책이 뭐냐? 만화책도 그림책인가? 어렵더라고요. 장르를 구분한다는 것이. 지금은 ‘글과 그림이 들어간 책이면 다 그림책’이라고 생각을 열었어요. 그래서 그림책의 일반적인 형식 있잖아요? 16바닥 내외, 양장 제본…… 그런 것에서 좀 벗어난 책들을 많이 만들고 싶은 거죠.
기성 출판으로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어요.
맞아요. ‘그림책식당’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독립출판을 하게 되면 쓰려고 미리 출판등록을 해 놨어요. 3월부터는 본격적으로 그림책식당 이름으로 책을 낼 계획이에요. 여러 작가들이 좀 더 자유롭게, 다양한 주제로 책을 완성하는 거죠. 온라인에서 판매도 하고, 독자와의 만남 행사를 할 수 있도록 이 공간을 빌려주기도 하고요. 기존 유통사들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생태계를 만들려고 생각 중입니다. 취지가 맞는 출판사들과 공생해도 좋고요.
기성 출판사들과요?
네. 그림책식당을 통해서 나온 작품을 기성 출판사와 계약할 수 있도록 이어 주는 거예요. 저는 에너지가 순환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대화를 할 때도 서로 탁구 치듯이 주고받아야 살아나거든요. 할 수 있는 선에서 재미있는 책을 오래 만들고 싶어요. 기존에 있는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요. 그래야 자유로운 책들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책만 만드는 게 아니라 보드게임도 같이 기획하기 때문에 더 재미있을 거예요. 그림책을 만드는 키트도 생각 중이에요. 독자가 직접 그림책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재료들이 들어 있는 키트요. CEO로 거듭나는 거죠. 우선 감기 걸린 물고기가 많이 팔려야 해요.(웃음)
그림책식당
박정섭 작가가 고른 그림책과 독립출판물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요일에 따라 카페로도 이용 가능. 그림책, 피규어 워크샵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http://picturebookbist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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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걸린 물고기박정섭 글그림 | 사계절
물고기가 감기에 걸렸다고?『감기 걸린 물고기』는 이 질문에 대한 흥미로운 답을 들려주는 그림책입니다. 아귀는 물고기 떼를 잡아먹고 싶지만, 똘똘 뭉쳐 헤엄치는 녀석들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물고기들을 잡아먹을 수 있을까 궁리하던 아귀는 물풀 사이에 숨어 조그만 목소리로 소문을 냅니다.
이현주
10년 동안 어린이책 편집자였다. 지금은 작가들을 만나 사진도 찍고, 영상 편집도 하고, 꽃도 만든다.
iuiu22
2017.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