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캘리포니아 롱비치 TED 강연장. 낯선 얼굴의 한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무대에 올라와 호흡을 가다듬었다. 세계 최고의 명기라 불리는 ‘페트루스 과르니에리 1735년산’ 바이올린을 든 그녀의 손끝에서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연주를 마친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의 제 모습이 성공적이고 행복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한때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고 완전한 절망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정통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이례적으로 TED 강연 무대에 오른 박지혜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바이올리니스트 박지혜의 자전적 에세이 『당신을 위한 음악이 나를 위로하네』가 나왔다. 독일 총연방 청소년 콩쿠르, 루마니아 리멤버 에네스쿠 콩쿠르를 비롯한 각종 국제 콩쿠르를 석권하고 울프 횔셔, 제이미 라레도, 고토 미도리 등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사사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새롭게 삶의 희망과 위안, 열정을 얻게 된 과정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2013년 TED 강연에서 바이올린 연주와 이야기를 병행한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클래식 연주자이면서 굳이 책을 내고 강연을 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클래식 애호가는 물론이고 저처럼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많은 분에게 위로와 힐링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무대에 올라가서도 바이올린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곡과 관련된 제 이야기도 나누고 또는 제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스토리를 전해드릴 때도 있는데요, 그렇게 이야기와 함께 음악을 들려드리면 바이올린을 낯설게 느끼시던 분들이 표정부터 달라지세요. 그래서 해외 공연을 하더라도 현지의 말을 조금이라도 배워서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도 그런 평소의 제 철학의 연장선상에서 기획하게 된 것이에요. 실제로 제 공연을 다녀가신 많은 팬들께서 제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도 많아요. 그렇다고 제가 대단히 크게 성공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거창한 메시지를 전달할 생각도 없고요. 다만 한 가지, 심하게 흔들리고 좌절한 적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있기에, 음악을 통해 용기를 얻고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젊은이의 삶을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독일에서 태어나 줄곧 해외에서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어에 능통하시네요. 한국 동요나 가요를 자유자재로 연주하시더라고요. 그 배경과 이유를 설명해주시겠어요?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엄마는 늘 한국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나라인지 귀가 닳도록 얘기해 주셨어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처럼 가상의 슈퍼맨이 아닌 실제 존재했던 우리나라 영웅들의 이야기부터 한글의 위대함 등등. 그런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몰라요. 그렇게 어린 시절을 독일에서 보내다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 한국어를 잊어버릴까 봐 한국으로 나왔어요. 어떻게 보면 역유학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렇게 초등학교를 마치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야 했지만, 어찌 보면 엄마의 계획이 맞아 떨어진 게 제 모든 어린 시절의 추억은 한국에 머물러 있거든요. 독일에서든 한국에서든 언제나 틀어주셨던 동요와 함께 말이죠. 초등학교 마치고 독일로 돌아간 이후로는 일상의 평범한 행복이 사치로 여겨질 만큼 힘들게 제 모든 것을 바쳐 바이올린 연습에만 몰두했기에 더욱 그렇기도 해요. 그래서 한국의 동요는 제게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타임머신과도 같은 존재이기도 해요.
바이올리니스트 어머니의 영향으로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되셨다고 하는데, 독일에서 바이올린을 연습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어요?
몇 해 전 어느 공연장 대기실에서 어떤 분이 제게 손 좀 보여달라고 하시며 제 손을 사진으로 찍어도 되냐고 물으셨죠. 흔쾌히 응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진이 한 포털 사이트 메인에 올라갈 정도로 이슈가 되었더군요. 사실 전 조금 의아했어요. 비단 저뿐만이 아닌 바이올린 연주자라면 대개 턱에는 흉터(?)가, 손끝엔 굳은살이 박이기 마련이거든요. 독일에서 바이올린 연습을 하던 시절, 저 역시 제가 바라는 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죽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최선을 다하려고 애를 썼어요.
유명한 선생님들을 사사하고 독일 유명 대학에서 최고 연주자 과정을 거치면서 우울증을 겪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저 스스로 저 자신에 대한 기준점이 너무 높았던 것 같아요. 욕심이 많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다 보니 저 자신에게 너무 엄격해진 나머지 나태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죠. 그리고 그것이 음악에 대한 압박으로 다가왔어요.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기 위해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고, 더 잘 해야 하고, 끊임 없이 발전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너무나 커졌어요. 그리고 그게 우울증의 원인이 되었죠.
힘든 과정을 견뎌낼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이었고, 그 과정이 지금 박지혜 님의 음악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솔직히 전 지금도 ‘힘든 과정을 모두 이겨냈다’라는 식으로 과거형의 표현을 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려움이 없는 날은 없으니까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때의 경험을 통해 저 자신을 힘겹게 하는 음악이 아닌 저에게 위로를 주는 음악의 힘을 경험할 수 있었고,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삶 또한 단순히 개인적인 성공이 아닌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휴식을 주겠다는 이타심에 눈뜨게 된 것입니다.
2003년부터 2014년까지 11년이 넘게 독일 정부산하의 기관에서 1730년산 과르니에리를 무상 대여 받아 사용하셨죠. 이제 2014년부터는 1735년산 과르니에리를 영구히 쓸 수 있게 되셨다면서요?
네, 맞아요. “기적” 이라는 단어가 맞는 표현인데, 조금 거창할까요? 악기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했던 기도 제목이기도 해요.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과르니에리’라는 명기를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동시에 언제 이 악기를 다시 빼앗길지 모르는 상황이기도 했죠. 그래서 전 늘 이 1735년산 과르니에리 평생 쓰게 해달라고, 악기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곤 했어요. 사실 독일 정부가 소유한 악기이니 이 악기를 판매할 리도 없죠. 그걸 알면서도 떼 쓰듯 기도했는데 결국 1735년 과르니에리를 평생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적이라는 말 말고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 기적 같은 이야기는 책에 소개가 되어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살펴보셨으면 하고요, 이 일을 겪으면서 다시 한 번 간절히 원하고 꿈꾸는 것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요즘 아이폰(i-Phone)을 모르는 분은 거의 없는데요, 이때 ‘아이(i)’가 상징하는 뜻을 담아 제 자신을 ‘아이바이올리너(i-Violiner)’라고 표현해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아이폰, 즉 스마트폰처럼 혁신적이고 창의적이고 사용자 편리를 추구하면서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 같은 음악가가 되고 싶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스마트폰은 꼭 주머니에 넣고 다니듯이 제 음악도 사람들의 일상에서 늘 함께하며 때로는 텅 빈 마음을 가득 채워 줄 수 있는, 그래서 꼭 있어야 하는 그런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아직 정말 많이 부족하지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스스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음악가, 날이 가면 갈수록 더 깊은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로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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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음악이 나를 위로하네박지혜 저 | 시공사
TED 총감독 크리스 앤더슨이 “최고의 7인 중 한 사람”이라고 극찬한 바이올리니스트 박지혜의 자전적 에세이다. 그녀는 자신의 연주와 메시지가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에 위로와 열정을 되살려주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