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작가가 신작 장편소설 『한 스푼의 시간』을 발표했다. 작품 속에는 세탁소에서 일하는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한다. 아내와 사별하고 외아들마저 사고로 잃은 채 홀로 세탁소를 꾸려가고 있는 명정에게 어느 날 하나의 소포가 배달된다. 상자에 담긴 것은 17세 정도로 보이는 앳된 소년의 모습을 한 로봇. 명정은 그에게 ‘은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피부를 맞대고 밥상을 마주하며 가족처럼 살아간다. 은결은 명정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시호, 준교, 세주를 만나며 인간과 삶을 배워나간다. 로봇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로봇이 아닌 우리 인간에 대한 질문을 품게 된다. 인간과 로봇의 차이에 대해, 그것이 만들어 낸 희미한 경계에 대해 묻게 된다.
인간은 끊임없이 오해하고 왜곡하는 것 같아요
작가의 말에서, 조엘 가로의 『급진적 진화』의 한 대목이 소설의 발화점이었다고 밝히셨는데요. 조엘 가로는 “과연 로봇이 당신이 맡긴 셔츠를 돌려주면서 태국산 가지와 멜론의 씨앗을 끼워 넣어줄 만큼 당신에 대해 잘 알 수 있을까?”라고 적었어요. 그의 생각에 동의하시면서 집필을 시작하셨나요?
조엘 가로의 그 말은 ‘인간이 하듯이 고객 별로 취향에 맞춰줄 수 있을 만큼 인공지능이 당신을 깊이 파악할 수 있겠느냐’는 건데요, 그 내용에 동의 여부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고, ‘이런 경우를 상정해 볼 수도 있겠구나’라는 느낌으로 먼저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전에 상상해본 적 없는 사건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서 시작된 거죠.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공지능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지금 어디에선가 이미 그런 로봇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어요. 다만 사회 경제 문화적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서 우리한테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언제든지 우리 눈앞에 나올 준비가 갖춰졌을지도 몰라요.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묻게 됐어요. 작가님도 소설을 쓰시면서 ‘어떤 것이 사람다운 것인지’ 생각하게 되셨나요?
사실 소설을 쓰면서는 ‘인간 뭐 별 거 없어’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요(웃음). 평소에도 인간이 동물이나 사물보다 얼마나 나은 존재일까,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어요. 소설 속 주인공은 명백히 사물에 해당하는데 독자는 결국 그 사물에게서 인간성의 일부를 엿보게 되지요.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란 어떤 것일까요?
결국 인간다움이라는 건 두 명 이상의 인간이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시선에 달려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본다’는 행위 자체가 왜곡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해 보면, 인간은 계속 끊임없이 상대방 또는 제3의 사람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것 같아요. 이해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계속 자신의 생각이나 타인과 투쟁을 해 나간다고 해야 할까요. 그 무한한 투쟁 과정이 결국은 인간다움의 증거가 아닌가 싶어요.
지난 9월에 『한 스푼의 시간』 북 콘서트에서 하신 말씀이 기억나네요. “인간의 감정을 철저하게 오해하는 것이 어쩌면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셨죠.
그런 맥락이 되겠네요. 보태자면 그 말뜻은 결국 인간은 언제까지나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이해의 불가능성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타인이 보내는 메시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건 인간이나 로봇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가 보내는 메시지도 100% 다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간혹 자신의 상황이나 이해관계에 맞게 조정하고 판단하고 버리고 싶은 부분을 버리곤 하지요.
결국 은결이도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바로 그 점이 인간다운 요소라고 봅니다.
우리는 로봇을 보면서 ‘로봇이 저런 일도 할 수 있어?’ 하고 놀라잖아요. 그런데 이 소설에서 은결이의 시각으로 인간을 바라보면 ‘인간은 어떻게 저런 일까지 해내지?’라는 생각도 들어요. 로봇이 끝내 대체할 수 없는 영역도 있을 것 같고요.
어떤 직업들은 향후 수십 년 내에 인공지능으로 대체된다는 기사들이 여러 번 나왔잖아요. 그 중에서 ‘아마 제일 마지막에 없어지는 것이 작가를 비롯한 창작 계통’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물론 지금도 (인공지능이) 소설을 쓰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가장 마지막에 없어지면 뭐하겠어요. 그 때쯤 되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평소 생각이 비약이 심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인간이라는 종이 그때까지 남아있을지는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아요.
작가님은 비관론자이세요?(웃음)
낙관론자는 확실히 아닌 것 같고요. ‘이게 잘못될 경우에는 어떻게 하지?’라는 대안을 먼저 생각해 놔야 그 일을 할 수 있는 성격이에요.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요. 굳이 말하면 비관론자 쪽에 가깝기는 한데,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세계관은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죠. 많은 분들이 이번 소설은 지금까지 제가 쓴 소설 중에 가장 따뜻한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저 역시 비관론자에 가까운데요(웃음). 때로는 ‘세상에 불만이 많은 사람’으로 비춰질까 봐 두렵기도 해요.
장래에 글을 쓰겠다는 친구들이 저한테 많이 물어봐요. 소설가가 되기 위한 조건이 뭐냐고. 제 첫 번째 대답은 ‘일단 불만을 가져라’는 거예요. 세상에 불만이 없는 사람이 소설을 쓰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한 거고, 오히려 저는 그렇지 않은 게 신기한 상태라고 생각해요. 소설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는 현 상태에 불만이 있는, 불안을 느끼는 이들이 만들어왔어요.
은결이는 공기 같은 존재죠
앞서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소설에서 은결이는 ‘어떤 인간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내기도 해요. 명정이나 시호에게 위로를 건네는 일이 그 중 하나죠.
지금 개발되어 있는 로봇들도 위로 자체는 할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좋은 말을 들려주고 인사를 나눠주는 거죠. 유튜브 광고에서 봤는데, 주인이 우는 걸 로봇이 곁에 가서 다독여주고 안아주더라고요. 이 소설에서는 처음 은결이가 기능적이고 학습적인 위로를 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 각자가 갖고 있는 심리 상태나 상황으로 인해서 위로가 단순 자극-반응 이상의 역할을 했어요. 사람들이 저마다 바라는 위로의 방식이 다른데 천편일률적으로 안아준다고 해서 도움되는 게 아니죠.
시호의 경우만 보더라도, 자기 안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꺼내고 위로가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낸 것 같아요. 은결이는 그 신호에 답하고요.
맞아요, 그 신호에 어떻게 답하느냐가 기존의 로봇과 차별화되는 지점이에요. 시호는 은결이가 로봇다운 판에 박힌 위로를 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기 예상과 다른 반응이 나왔을 때 오히려 위로를 받았거든요.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어요. 작가님께서는 가족이라는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2009년에 데뷔했을 때 들은 질문이기도 한데요. 그때 저의 언어로는 표현할 말이 생각 안 나서 다른 사람 말을 빌렸었어요. 기타노 다케시의 너무나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누가 보지 않는다면 갖다 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라고요(웃음). 그 말에 대체로 동의한다고 했어요.
우스갯소리입니다만, 나중에 아드님이 이 인터뷰를 읽게 되면 어떡하죠?(웃음)
버린다는 건 문자 그대로의 버림이기도 하겠지만 대개는 이별, 떠남이지요.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어떻게 하면 서로 잘 이별해서 살아갈 수 있는지, 어떻게 독립된 개체로 살아갈 수 있는지 배워나가는 것 같아요. 서로의 가치관은 살아오는 내내 계속 충돌하고 이별하는 과정에 놓이고요. 그래서 특별히 잘못된 표현은 아닌 것 같아요. 어린아이 같은 경우는 성장하기까지 부모의 경제적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같이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거고요. 그 다음에는 독립을 잘 해야 하는데 지금 사회 현실은 결혼한 다음에도 부모한테서 독립이 불가능한 상황들을 만들어내고 있죠.
“가족이란 결국 무거운 부담과 막대한 담보 및 거미줄 같은 채무로 연결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인질인가”라고 쓰신 문장이 생각나요. 어쩌면 제대로 독립되지 않아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서로 옭아매는 관계가 됐는지도 모르겠어요.
기존에는 전통적인 유교 가치나 윤리관 때문에 그런 관계가 됐다면, 지금은 윤리관은 이미 해체됐는데 사회 경제 제도와 각종 비리가 청년들 독립을 막고 있는 상태죠. 그렇게 달라진 세상에서의 가족관계는 또 달리 생각해 볼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명정과 시호에게 은결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책 속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공기 같은 존재잖아요. 곁에 있기는 있는데 있는지 없는지 신경은 잘 안 쓰이고, 그런데 있으니까 좋고, 없으면 큰일 나는 존재가 점차 되어가죠.
은결에게 있어 명정, 시호, 준교, 세주는 인간과 삶을 학습하는 교재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들의 삶이 녹록지 않거든요. 낡고 가진 것이 많지 않은 동네에 사는 인물들이라서 그런 건 아니겠죠?
소설의 첫 부분에 배경이 잠깐 나오는데, 어떤 분들은 여기가 무척 가난한 동네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나름대로 보편적이고 평범한 서울의 한 동네 골목을 설정하고 썼거든요. 아파트 단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골목길입니다. 저도 이런 곳에서 살았고요.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삶을 영위하고 있고, 그 중에 돈 없어서 힘들다는 소리 한 번 안 하는 사람도 없죠. 양극화가 고착되고 중산층이 이미 붕괴된 상태에서 지금 이들의 모습이 특별히 낡고 가난한가, 묻는다면 저는 이것이 지금의 보편이라고 봅니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병원비를 걱정해야 하고, 등록금이 없어서 학교를 휴학해야 하는 게 일부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죠.
옛날에도 등록금 때문에 집안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한 학기씩 휴학하는 얘기는 종종 있었습니다. 지금은 등록금 천만 원 시대니까 더하죠. 휴학과 알바와 취업 실패와 삼각김밥의 수레바퀴, 현재 청년들의 삶은 그런 고단함이 강제적인 디폴트값으로 맞춰져 있다는 점이 큰 문제입니다.
철저히 무너져 본 적, 있으세요?
보편적인 삶이란 “데어버리도록 뜨겁고 질척거리며 비릿한 데다, 별다른 힘을 가하지 않고도 어느 결에 손쉽게 부셔져버리는 그 무엇”이라고 적으셨어요. 이 문장 앞에서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멈추더라고요. 작가님이 평소에 갖고 계신 생각을 엿본 것 같기도 했고요.
그 문장은 ‘삶은 달걀’에서 나온 거고요(웃음). 평소 삶에 대한 주관은 그냥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이상으로 더 큰 의미를 삶에 부여하면, 나중에 그 삶이 자기가 뜻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더 큰 절망에 빠지게 될 수도 있어서요.
왠지 작가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어요(웃음). 소설 속에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짧은 삶에서 어떤 의미를 남길 것인가’ 하는 생각 같은 것도 안 하실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소설 속에도 나오잖아요. 의미를 남기거나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 이미 녹아서 없어질 거라고요.
작품에서 은결이 반복적으로 묻는 것들이 있어요. 그 중 하나가 ‘하다, 하지 않다, 하고 싶다,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다’ 사이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거거든요. 이유가 뭘까요?
살아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가장 큰 요소가 행동이잖아요. 그런데 ‘하다’라는 건 모든 동사를 다 포함할 수 있는 말이에요. 아마 그래서 그 단어를 골랐던 것 같고요. 어쨌든 인간이 살아있다는 건 결국은 뭔가를 계속 하고 움직인다는 거잖아요. 생각도 ‘하는’ 거고요.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하다’라는 말에 인간의 존재 양상이 거의 다 달려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요.
은결이가 또 하나 궁금해 하는 게 있어요. ‘무너진다는 건 어떤 걸까’ 하는 거예요. 제가 은결이처럼 작가님에게 여쭤본다면, ‘무너진다’는 건 어떤 건가요?
과연 제 인생에 있어서 철저히 무너져 본 적이 있을까 싶어요. 예를 하나만 들자면 저는 등단하기 전에 실패만 15년 정도 했고, 남들에게는 사소한 어려움이 그때의 저한테는 굉장히 큰 어려움이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진정한 의미에서 제가 존재 자체를 다 방기할 정도로 무너져본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말하긴 어렵고 지금까지 굉장히 운 좋게 살아온 것에 가깝습니다. 그 점은 작가로서 결격사유라고 생각도 해요. 그런데 베트 미들러의 「더 로즈」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넘어질 것을 두려워하면 춤을 배울 수 없다고요.
넘어지는 것이 곧 무너지는 것일까요?
인생의 길을 걷다가 걸려 넘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툭툭 무릎 털고 일어나면 되는 정도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넘어져 본 사람 입장에서는 그 모든 순간을 다 ‘무너짐’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너질 때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무엇을 할까요?
음... 케바케?(웃음)
우문현답입니다(웃음)
그대로 뒹굴거나, 아니면 다시 일어나거나, 조금 시간을 갖거나... 여러 가지를 취향 따라 선택하겠죠? 취향과 자신의 지금 현재 상태에 따라서. 그런데 중요한 건, 무너진 걸 다시 세울 때 주위에서 누가 편이 되고 도와주면 그건 좋은 일이지만 결국 본질적인 일으킴은 혼자서 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글쓰기의 가장 큰 매력은 불확실성과 불안정성
올해 『위저드 베이커리』가 연극으로 상연이 되었잖아요. 이번 소설도 영화나 연극으로 제작될 수 있겠다는 생각, 해보셨어요?
생각은 안 해봤지만, 제안이 들어온다면 거절은 안 해요(웃음).
만약 영화나 드라마, 연극으로 만들어진다면 어떤 장면이 하이라이트가 될까요? 은결이 거울을 보는 장면일까요?
인공 지능 로봇이 출시되기 전에 거울 실험을 거친대요. 거울을 보고 그게 자기 모습인지 인식하는가 확인해 보는 거죠. 은결이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 점에 착안해서 쓴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이번 소설에서 가장 영화적인 부분은, 아마도 에필로그 부분일 것 같아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끝낼지, 결말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놓고 썼어요. 모든 소설을 쓸 때 처음하고 끝을 생각해놓고 써요.
인물들이 작가님의 지시를 잘 따라가나요? 통제에서 벗어날 때는 어떻게 하세요?
사실은 통제에서 벗어날 때가 더 많아요. 그런데 작가가 흘러가는 상황을 장악하기 어렵고 자꾸만 인물들은 다른 데로 튀려고 하는, 그런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글쓰기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요. 소설의 결말이 반드시 처음에 생각했던 그대로의 결말은 아닌 경우도 있죠.
이번 작품의 경우는 어땠나요?
한 80% 정도는 그대로 간 것 같아요. 그런데 결말의 모습이 처음의 생각과 80% 같다고 해서 생각했던 길 그대로 따라갔던 건 아니고요. 비록 다 온전한 형태로 거두어지지 않더라도 흩어진 줄기를 수습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지요.
만약 작가님에게 은결 같은 로봇이 찾아온다면, 사람과 삶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주실 것 같으세요?
사실 지금은 제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될지, 그것부터 너무 막막해서 로봇을 고려할 틈이(웃음).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또는 존재를 가르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기도 해요. 인간이 오랜 세월 시행착오를 하면서 그 불가능한 일을 꾸준히 도전해오기 때문에, 그나마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겨우 유지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말씀을 듣고 보니, 다른 존재에게 생각을 넣어준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 것 같기도 해요.
만약 그런 로봇이 곁에 있으면 뭔가를 가르쳐주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인공 지능이니까 기본 데이터베이스는 입력되었으니, 나머지는 자기가 보고 알아가겠죠. 은결이만 해도 자기가 TV를 보고 스스로 생각해 낸 행동들이 있잖아요. 그런 일련의 과정과 판단과 시행착오를 통해 올바른 결과값을 내는 것이 로봇의 최종 목표이지만, 그 수식과 계산에서 벗어날 때가 더 바람직하기도 하니까 주입식 교육은 배제하는 걸로(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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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구병모 저 | 예담
구병모 작가가 『파과』 이후 3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 『한 스푼의 시간』은 세탁소에 살게 된 ‘소년 은결’이 유한한 인간의 시간 속 숨겨진 삶의 비밀과 신비함을 조금씩 배워가는 과정을 섬세하면서도 차분하게 그려내면서 새로운 구병모의 세계를 선보인다.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호랑
2022.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