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서거 400주기를 맞아 그의 작품을 다채로운 공연으로 만날 수 있는 요즘, 또 한 편의 고혹적인 무대가 펼쳐진다. 바로 유니버설발레단이 준비한 영원불멸의 사랑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 유니버설발레단이 선보일 <로미오와 줄리엣>은 지난 1965년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된 케네스 맥밀란 버전으로, 러시아 출신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이 주는 격정적이면서도 뭉클한 감동에 인물들의 내면심리를 드라마틱하게 담아내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가장 잘 살려낸 무대로 평가받는다. 유니버설발레단이 이미 2012년 무대에 올렸지만, 국내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작품인 만큼 발레 팬들의 기대가 크다. 게다가 이번 무대에서는 53살의 줄리엣, 알레산드라 페리를 만날 수 있지 않던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도대체 발레 무용수들은 몇 살까지 춤출 수 있을까?
현존하는 최고의 줄리엣 알레산드라 페리
이탈리아 출신의 알레산드라 페리는 1983년 20세의 나이로 영국 로열발레단 수석무용수가 됐다. 그리고 1년 뒤 케네스 맥밀란이 안무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여 지금까지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줄리엣으로 불리고 있다. 1985년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로 옮긴 뒤 44세에 은퇴할 때까지 왕성한 활동을 선보였고, 지난 200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역시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고별 무대를 펼쳤다. 하지만 그녀는 6년 만에 무대에 복귀했고, 3년 뒤에는 고별 무대를 펼쳤던 극장에서 다시 줄리엣으로 춤을 췄다. 그러니까 무대에 다시 섰을 때 알레산드라 페리의 나이는 50세.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는 무대로 돌아오기 위해 꼬박 1년간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한다. 그 결과 알레산드라 페리는 자신의 대표작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우리나라 관객들을 만나게 됐다. 53세의 줄리엣으로 말이다.
49세로 은퇴한 발레리나 강수진
현지 시간으로 지난 7월 22일, 발레리나 강수진 씨가 독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오네긴>을 끝으로 마침내 토슈즈를 벗었다. 우리 나이로 50세, 알레산드라 페리보다 4살 아래인 셈이다. 기자는 슈투트가르트에 앞서 지난해 서울에서 열렸던 강수진 씨의 고별 무대를 관람했다. 당시 <오네긴>의 타티아나를 연기하는 강수진 씨는 48세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고난도 테크닉과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선보였다. 가녀리면서도 단단한 몸, 연륜에서 비롯된 원숙미와 탁월한 작품 해석, 무엇보다 발레리나로서 무대에 서기 위해 그 나이에도 쉼 없이 스스로를 연마했을 강인함에 더 뜨거운 박수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발레 무용수 대부분 40세 안팎에 은퇴
사회에서 40~50대는 관리직으로 접어들지만 그래도 한창 일할 때다. 그런데 현역 무용수들을 왜 이렇게 화제가 될까. 아니, 한국무용이나 현대무용만 해도 별다른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무용 분야에서도 유독 발레만 관심을 받는다. 발레의 고난도 테크닉은 근력과 탄력 등 신체적인 나이에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다른 어떤 예술 분야보다 아티스트로서의 수명이 짧기 때문이다. 실제로 발레 무용수들은 30대가 되면 은퇴를 고민하고, 대부분 40세 안팎에 토슈즈를 벗는다. 일부 발레단은 마흔 살을 정년으로 못 박기도 하지 않던가. 물론 마흔 살 언저리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스타급 무용수들은 이후에도 게스트 아티스트로 무대에 서지만 발레 무용수들의 일반적인 얘기는 아니다. 게다가 인기 발레 레퍼토리를 보라.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지젤>,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등의 주인공은 모두 10대다. 심지어 공주에 요정, 백조이지 않던가. 그러다 보니 젊음과 아름다움은 무용수로서 가장 큰 무기가 아닐 수 없다.<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 역시 14세로 설정된다. 53세의 발레리나 알레산드라 페리가 보여줄 줄리엣의 모습이 궁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록과 연륜에서 오는 원숙미와 함께 10대 줄리엣의 풋풋하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과연 구현할 수 있을까 호기심과 기대가 생기는 것이다. 또한 이번 내한무대에서 그녀와 호흡을 맞출 로미오는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수석무용수 에르만 코르네호로, 알레산드라 페리와는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난다. 현실에서는 꽤나 화제가 될 법한 연상연하 커플이 아니던가. 이들이 세상의 편견을 뛰어넘고 원작의 아름다운 연인으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지 더욱 궁금한 것이다.
끝까지 무용수로 남고 싶었던 춤꾼들
고령에도 무대를 지키는 스타급 무용수들은 존재한다. 국내에서는 발레리노 이원국, 정운식 씨가 올해 한국 나이로 50세지만 여전히 무대를 지키고 있다. 교편을 잡거나 안무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여전히 춤을 추는 이유는 단 하나, 마지막까지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로 남기 위해서다. 실제로 환갑이나 칠순에도 무대를 지켰던 무용수들이 있다. 영국 출신 발레리나 마고트 폰테인은 지난 1978년 서울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설 당시 환갑이었고, 러시아 발레의 전설로 불렸던 마야 플리세츠카야는 칠순에도 백조로 무대에서 공연했다. 특히 훤칠한 키와 긴 팔 다리, 우아한 선에 걸맞게 마야 플리세츠카야는 1947년 이후 무려 500여 차례나 <백조의 호수>에 출연하며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난 1995년에는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70세의 나이로 <백조의 호수>와 <빈사의 백조> 등을 선보였는데, 칠순의 백조가 상상이 되는지. 아니, 칠순의 백조가 우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녀는 80세에도 기념 무대를 마련해 춤을 췄다고 하니 마지막까지 무용수로 남은 셈이다.
나이가 많아지면 춤을 추기 힘들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무용수 본인이 잘 알고 있다. 근력도 예전만 못하고, 혹시나 부상을 당하면 쉽게 낫지도 않는다. 다른 무용수들처럼 적당한 때 은퇴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주위의 시선도 많을 것이다. 신체적인 노화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 같은 정신적인 부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보기 좋은 은퇴 대신 마지막까지 무용수로 남으려는 그들의 용기와 열정은 참으로 대단하다. 알레산드라 페리 역시 국내 공연에 앞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은퇴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춤을 추지 않자 행복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고, 춤을 추는 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게 됐다고. 그래서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 무대에서 춤을 추는 일이 은퇴 전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울 텐데 말이다. 53세의 줄리엣 알레산드라 페리의 공연을 보고 나면 ‘나이’를 핑계로 너무 쉽게 포기하거나 도전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반성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