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 운동화 끈을 신중하게 고쳐 매고 생각보다 무거워진 배낭을 걸머지던 그 순간 내가 생각했던 여행은 하나였다. 배낭여행. 그것도 그냥 배낭여행이 아니라 씩씩하고 싹싹한 배낭여행이 내 머릿속 ‘여행’ 항목의 지분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닥쳐오는 고생을 마다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속에서 극한의 자유와 성취감을 만끽하고, 몸과 마음을 채찍질해가며 짜릿한 활동으로 채워진 하루하루를 보내고, 한시도 다른 여행자들과 사귀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여행 말이다. 사실 휴가여행 같은 다른 여행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알고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오로지 씩씩하고 싹싹한 배낭여행만이 큰 재미와 행복을 주며 여행의 고결한 의미를 체험하게 하는 여행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동남아시아로 첫 여행을 나섰을 때 이와 같은 내 이상을 열심히 추구해보았다. 카오산 로드의 포장마차에서 만난 다른 나라 여행자들과 허물없이 어울려도 보았고, 험한 산길과 비틀거리는 버스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관광 코스를 섭렵해보려고도 했다.
이런 노력과 도전의 절정은 아마도 앙코르와트의 땡볕 아래 왕복 40킬로미터 거리를 자전거로 오가며 유적지 곳곳을 누빈 일이 아닐까 한다. 앙코르톰(앙코르 유적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옛 크메르 제국의 수도 유적)에서 반띠아이 쓰레이(앙코르톰에서 약 2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작지만 아름다운 사원)를 잇는 긴 논둑길 위를 비칠비칠 자전거로 달릴 때, 전세 낸 뚝뚝을 타고 나를 추월해 나아가던 세 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갈 때 한 번, 올 때 한 번, 동경을 가득 담아 꾸벅 인사를 해오던 모습이 기억난다. 하지만 그 저녁 온몸에 멘소래담 로션을 처덕처덕 바르고 발바닥과 발가락 곳곳에 반창고를 잘라 붙이며 나는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다. 분명 배낭여행자로서 자부심을 품고 남들에게 자랑해도 좋을 하루를 보냈지만, 정작 나 스스로는 그리 만족스럽지가 않았던 것이다.
웃으며 시작했다가 울며 끝나는, 여행지에서 자전거 타기
그 뒤 며칠에 걸쳐 나는 내가 막대한 통증을 대가로 지불해도 좋다고 여길 만큼 정신적 자유와 육체적 성취를 갈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남은 여행 동안 스스로에게 거듭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내가 힘들게 자전거를 타는 대신 뚝뚝을 빌려 탔더라면 앙코르와트가 더 인상적이었을까 덜 인상적이었을까” “내 숙소가 여행자들로 왁자지껄한 곳이 아니라 좀 더 조용한 곳이었다면 내 여행이 더 신났을까 덜 신났을까” “내가 다른 여행자들과 이런저런 사소한 주제로 열심히 수다를 떨지 않았다면 내 여행이 더 보람찼을까 덜 보람찼을까”
이런 질문들은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여행 방식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예컨대 나에게는) 그다지 이상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질문 하나. “행복하고 의미 있는 여행을 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따져보고 어떻게 여행을 해야 할까” 이 질문은 나를 몇 가지 깨달음으로 이끌었다.
나는 (성격심리학을 전공한 주제에) 모든 사람의 여행에 단 하나의 정답만이 있을 것이라 쉽사리 믿어버렸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세상에는 돈이 싫다는 사람도 있고 지저분한 게 좋다는 사람도 있으며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사람도 있고 개보다 고양이가 더 좋다는 사람도 있다. 하물며 여행에 정답이 있을 리가! 내가 씩씩하고 싹싹한 배낭여행에 불만족을 느끼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씩씩하고 싹싹한 배낭여행을 열렬히 추구하고 이런 여행에서 큰 행복과 의미를 느끼는 여행자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영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온 20대 초반의 젊은 백인 여행자들을 꼽을 수 있다. 이들과 나를 한번 비교해보자. 고백건대 나는 이 젊은 서양인 여행자들의 평균적인 모습에 견주어 훨씬 조용하고, 낯을 가리고, 심신의 에너지가 희박하고, 재미와 흥분을 만끽하기보다는 과하게 흥분되는 상황을 피하려 하고, 하하호호 웃으며 즐기기보다는 차분하게 분석하려 들고, 아시아의 비문명과 가난 속의 순수라든가 영성에 대한 환상이 없고, 좀 더 심사숙고하고, 도전과 성취보다는 잔잔한 이해와 깨달음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러니 젊은 서양인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여행과 내가 만족을 느끼는 여행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여행은 격렬한 서핑과 편안한 독서, 왁자지껄한 클럽과 고요한 숙소, 문명과 자연, 피자와 커리와 말라리아, 도마뱀과 새, 정글과 오로라로 이루어진 놀랍도록 풍성한 활동이다. 덕분에 우리는 자신과 잘 맞는 여행의 요소를 골라서 즐기거나, 싫어하는 요소를 요리조리 잘 피하거나, 또는 다양한 여행 요소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여행의 다양한 요소와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면 누구나 자기만의 행복한 여행을 꿈꾸고 구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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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심리학 김명철 저 | 어크로스
심리학과 여행학을 결합하고 여기에 자신의 여행 경험을 더한 이 독특하고도 기발한 여행안내서. 역마살의 정체에서부터 자신이 어떤 여행자 스타일인지, 여행에서 경험한 부정적인 정서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행복감을 오래 지속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심리학자로서 여행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담았다.
김명철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사와 심리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심리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타칭 ‘웃기는 심리학자’로 통하며, 도합 1년 5개월 12개국을 여행한 베테랑 여행가이기도 한 그는 스스로를 ‘경험추구 여행자’로 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