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에 굴복하면 정의는 없다
그러므로 정의의 본질은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며 함께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약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약자에게도 정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글ㆍ사진 김경집(인문학자)
2016.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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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동요로 대화를 시작했으니 하나 더 다뤄 봅시다. 이 동요를 말하기 전에 다른 이야기 한가지를 먼저 해보겠습니다. 이제는 다행히 제대로 바뀌기는 했지만, 몇 해 전만 해도 지하철을 탈 때마다 방송으로 나오는 문장이 나는 매우 거슬렸습니다.


나는 노란 안전선 ‘안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어요. 잠시 후 지하철이 역으로 접근하면서 방송이 나옵니다. “열차가 접근하고 있으니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세요.” 나는 분명히 안전선 ‘안에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방송에서는 안전선 ‘밖으로’ 나가라는 겁니다. 만약 그 말대로 내가 따라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살펴보았더니 그 말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은 별로 없는 듯, 태연하게 그대로 서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사소한’ 일에 소중한 목숨을 걸 수는 없는 까닭에 나도 그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안전선 ‘안에서’ 기다렸다가 열차 문이 열리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침 뚝 떼고 탑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불편합니다.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그 말이 여간 불쾌한 게 아니니까요. 여러분도 그런 생각 해보셨나요?


그렇다면 왜 그런 방송이 나오는 걸까요? 왜 우리는 그걸 따져보지 않는 걸까요?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니 가능성 있는 답이 보이더군요. 바로 기차의 입장에서 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차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이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기다려야 안전합니다. 하지만 방송을 듣는 건 기차가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기차와 사람 중 누가 더 힘이 센가요? 당연히 기차겠지요. 그러니까 강자가 말하면 약자는 스스로 알아듣고 그 명령에 따르는 겁니다. 그래야 사는 거니까요.


이 대목이 무척 심각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듣는다는 점 말입니다. 약자는 강자의 명령에 알아서 기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그런 명령에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겁니다. 나는 이게 매우 위험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왜 약자는 강자에게 알아서 기어야 할까요? 그렇게 학습된 사람들이 과연 주체적으로,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옳은 일이라고 해서 끝까지 주장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

 

기차와 연관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죠. 예전에 기차역에서 목적지로 가는 기차표를 구입하려면 ‘표 파는 곳’에 가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 돈 내고 내가 가고자 하는 곳에 갑니다. 당연히 구매자 혹은 소비자인 내가 주인입니다. 하지만 표를 파는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합니다. 그곳이 ‘표 파는’ 곳인 건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행히 그 명패가 사라졌습니다. ‘표 사는 곳’에서 표를 삽니다. 비로소 소비자인 내가 주인이 되는 겁니다. 얼핏 보기에 사소하다 여길지 모르지만 이건 매우 상징적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올바른 관계’를 제대로 맺기 위해서는 각자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또렷하게 지녀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정의도 한갓 휴지 조각이 되기 쉽습니다.

 

자, 그럼 다시 동요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지하철 사례를 들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지하철이 역에 접근할 때 함께 나오는 음악 때문이었는데 그 노래가 바로 동요 <자전거>입니다. 아마 그 동요를 틀어 주는 건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라는 가사 때문이겠지요. 얼핏 들으면 참 재미있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가사를 잘 새겨서 들어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저기 가는 저 노인 꼬부랑 노인.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노래의 등장인물은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어린아이고 다른 한 사람은 할머니입니다. 둘 다 교통 약자지요. 그런데 두 사람만 비교해 보면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있으니 조금 강자가 된 셈입니다. 반면 할머니는 요즘 보는 우아한 할머니가 아니라 ‘꼬부랑’ 할머니입니다. 약자가 더 약자가 된 거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뭐라 말합니까? “할머니 비키세요!” 그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심지어 협박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우물쭈물하면 큰일 날 거랍니다. 만약 정말 사고라도 나면 어쩌지요? 아마도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어요. “거봐요 할머니. 아까 경고했잖아요. 우물쭈물하면 큰일 날 거라고.” 그러니까 강자가 미리 경고를 했는데 그것을 무시했으니 그건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정의라고 할 수 있나요?


나는 이 동요의 가사가 조금 맘에 들지 않습니다. 제대로 되려면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꼬부랑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하고 동작도 굼뜹니다. 길을 건너실 때도 젊은 사람들에 비해 두 배나 시간이 더 걸려요. 그렇다면 가사가 어때야 할까요?


“할머니, 걱정하지 마시고 천천히 건너세요. 제가 기다릴게요.” 혹은 이럴 수도 있겠지요. “할머니 전혀 신경 쓰지 마시고 가세요. 제가 다른 차도 가지 못하게 막고 있을게요.”


그게 강자의 덕목입니다. 물론 어린아이니까 어르신에 대한 예의와 공경도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이 동요는 익살스러운 가사가 경쾌한 자전거의 이미지와 멋지게 어울리지만, 자칫하면 강자의 횡포를 빤히 보면서 아무런 문제 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개운치 않습니다.

 

앞에서 <자전거> 동요를 통해 본 것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힘 센 사람들에게 ‘알아서 기는’ 삶에 어느 정도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는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철저하게 위계와 서열에 따른 상하 수직 관계가 너무나 흔하고 당연하게 여겨지기에 이런 현상에도 무감각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강자의 횡포가 정의의 실현을 방해하는 아주 큰 요소라는 걸 못 느껴요. 그걸 느끼지 못하니 정의가 망가져도 잘 모르거나 비판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그러니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하나는 강자에게 알아서 기는 비겁함을 버려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부당하고 일방적인 상하 수직 관계에서 빚어지는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정의는 약자에게만 일방적으로 요구되는 것일 수 없으며 강자가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사회적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의 본질은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며 함께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약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약자에게도 정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자에게 스스로 굴복하고 눈치를 보는 한, 그리고 그게 익숙해지는 한 결코 정의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은 각자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정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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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나만 지키면 손해 아닌가요?김경집 저 | 샘터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정의의 문제부터 함께 짚어보고, 동서양의 시대별, 인물별 정의에 관한 생각과 이론을 살펴본 뒤,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연대의 마음가짐과 실행 방법 등을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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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불의 #강자 #약자 #권력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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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8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일들을 짚어주어 신선했습니다. 역시 무관심, 무감각이 정의의 가장 큰 적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봅니다. 저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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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인문학자)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에서 인간학과 영성 과정을 가르쳤다. 인문학을 대중과 나누는 일과 문화운동에 뜻을 두고 있으며, 거대담론보다는 소소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또한 그러한 삶을 소중하게 여긴다. 저서로 《책탐》《생각의 인프라에 투자하라》《고장난 저울》《완보완심》《인문학은 밥이다》《생각의 융합》《엄마 인문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