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동대문을 벗어나자마자 버섯처럼 엎드린 초가집들과 논밭이 나타났다. 개울가엔 수양버들이 머리 감는 여인네처럼 연둣빛 머리채를 드리우고 있었다. 쟁기질이 시작된 들판의 흰옷 입은 사람들은 나래 접고 내려앉은 학처럼 보였다. 복숭아꽃 살구꽃이 구름처럼 피어오른 들판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보릿고개를 넘는 사람들은 채울 수 없는 허기로 시름에 젖어 있었다. 머리에 광주리를 이거나 지게를 지거나 달구지를 몰고 가던 사람들이 자동차 경적 소리에 허둥지둥 길섶으로 물러섰다. 아낙네의 등에 알궁둥이로 매달린 아이가 주린 얼굴로 시퍼런 코를 빨아 먹었다. 그들은 먼 세상 풍경으로 멀어져 갔다.
형만은 창에 매달려 밖을 내다보고 있는 채령을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았다. 채령은 말 그대로 복덩이였다. 채령이 태어난 이태 뒤 충청도에 있는 논과 잇닿은 산자락에서 사금이 발견됐다. 아버지가 논을 사면서 헐값에 산까지 구입한 덕에 행운은 형만의 몫이 됐다.
땅을 최고 안전한 투자처로 여겨 농토 늘리는 일에 몰두했던 윤병준 자작과 달리 형만은 외국의 호사스럽고 신기한 물품을 수입해다 파는 양행 사업에 꿈이 있었다. 하지만 생전의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병준에겐 아들이 하려는 사업이 주색잡기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부산에서 가장 컸던 야마모토 상회의 주인은 물건 실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망했다. 병준은 아들이 사업에 손을 대느니 여자와 술에 빠져 노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아버지의 행로를 따라 걷던 형만은 가리지 않고 여자를 탐했던 한 인간의 말로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병준의 죽음 뒤 기생들을 끼고 벌이는 연회에 발을 끊었다. 상중이어서가 아니라 여자에 대한 흥미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대신 아버지 때문에 지기를 펴지 못한 양행 사업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런데 자금 마련을 위해 팔려고 내놓았던 충청도 땅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노다지가 터졌다. 아버지로부터 행운도 물려받은 게 틀림없었다. 형만은 아버지처럼 맨땅에서 일어설 불굴의 의지와 끈기는 없었지만 굴러 들어온 복을 확실히 자기 것으로 만들 정도의 순발력과 패기는 갖고 있었다. 또한 도쿄제대에서 상과를 전공한 그에겐 경제 감각도 있었다. 벼슬을 해 봤자 어차피 허수아비 노릇밖에 하지 못할 식민지 백성에게 돈보다 더한 권력은 없었다. 큰 자산가가 되면 아무도 자신과 가문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에게 억눌려 있던 형만의 사업 감각이 그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채굴권을 따내 금을 찾아 산은 물론 논까지도 파헤치기 시작했다. 형만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땅들을 팔아 최신 장비와 인건비를 마련했다. 그리고 곧바로 회사를 차려 헐값에 따낸 채굴권을 비싼 값에 파는 일까지 겸했다.
윤병준 자작이 세상을 뜬 뒤 호사가들은 벼락출세라는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이 언제 무너지나 내기까지 하며 주시했다. 귀족 작위를 받은 사람들 중 제대로 재산을 보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다수가 주색잡기와 미두, 투기, 도박과 아편 등으로 살림을 거덜 냈다. 그러나 몰락 첫 순위로 꼽히던 형만의 가문은 오히려 번성했다. 노다지라는 행운에 취해 흥청거리는 대신 제대로 사업을 해 나간 덕이었다. 돈이 곧 권력이라는 그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그의 목표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자산가가 되는 거였다. 그리고 자자손손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면 소재지를 지난 차가 고개를 넘고 신작로를 따라 여주 안골마을로 들어섰다. 경성에서 가깝고 쌀 맛이 좋아 양곡 대는 땅으로 남겨 둔 곳이다. 땅은 이제 아버지 때에 비하면 반으로 줄어들었다. 대신 은행에 채권과 주식과 현금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형만이 자고 있을 때에도 착실하게 이자를 불려 나갔다.
차가 마을 어귀에 당도하는 사이 지주의 행차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마름이 뒹굴듯이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고 작인들과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마름의 큰아들이 마치 자기 차인 양 거들먹거리며 아이들을 쫓았지만 그들은 잠시 물러났다 다시 달려들었다. 기사가 크게 경적을 울리자 애 어른 할 것 없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눈길은 차 안의 사람들, 특히 꼬마 숙녀 채령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원피스를 차려입은 채령은 읍내의 일본 아이들보다 더 눈에 띄었다.
마름의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좁은 고샅길을 지나야 했다.
그 길은 집집마다 흘러나온 오물 섞인 물로 질척거렸고, 외양간이나 돼지우리에서 나는 악취와 뒤엉켜 더할 수 없이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박 서방이 코를 쥔 채 서 있는 채령에게 등을 들이댔다. 채령은 박 서방의 등에 업혀 짚 두름에 엮인 시래기 다발처럼 주르르 뒤따르는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머리에는 부스럼을 달고 얼굴에는 버짐이 허옇게 핀 저들이 짐승인가 사람인가 하는 눈빛이었다. 형만 일행은 곧 마름의 집에 당도했다. 뒤따르던 무리는 사립문가에 병풍처럼 둘러섰다.
“준비됐는가?”
마름의 아내가 서둘러 훔쳐 낸 마루 끝에 형만이 걸터앉자, 박 서방이 마름에게 물었다.
“그러문입쇼. 안 서방네 셋째 딸년인데 참하고 바지런한 게……. 저기 오네요. 미리 와 있으라니까 왜 이렇게 꿈지럭거려. 나리 기다리시잖어.”
마름이 딸의 등을 떠밀며 들어오는 안 서방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채령보다 두어 살 많은 듯한 여자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버티었다.
“싫어요, 싫어. 안 갈래요.”
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뜰아래로 끌고 온 안 서방은 딸이 더 큰 소리로 울자 뺨을 후려쳤다. 채령은 움찔했고 형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년아, 그치지 못해. 경성 나리 댁에 가면 배도 안 곯고, 니 식구들도 팔자가 필 텐데 왜 이래.”
마름이 거들었다.
“싫어요. 엄니, 아버지랑 여기서 살래요. 경성 싫어요.”
형만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고 마름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사립문가의 아이들 틈에서 한 여자애가 툭 튀어나와 우는 아이 옆에 서더니 말했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안 서방 딸보다 몸집도 더 작고 어려 보였다.
“수남이 이년, 거기가 어디라고 감히. 저리 가지 못해!”
마름이 발을 구르며 주먹을 치켜들었지만 수남은 버티고 서서 형만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여기저기 기운 자국에 소매 끝이 나달나달한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모르겠는 모양새였다.
수남을 잠시 훑어보던 형만이 물었다.
“너 몇 살이냐?”
“여덟 살이오.”
수남은 형만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년아, 그건 호적 나이지. 제 죽은 언니 호적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그런 거지 실제로는 일곱 살이구먼요.”
마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형만의 눈은 수남을 향해 있었다.
“너, 경성이 어딘지 알고나 가겠다고 나서는 거냐?”
형만이 물었다.
“알아요. 고개 너머, 또 너머에 있잖아요.”
주눅 들지 않은 대꾸에 형만이 피식 웃었다.
“집 떠나서 어미 찾지 않고 살 자신 있느냐?”
형만의 질문에 수남은 입을 앙다문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형만이 딸을 바라보았다.
“넌 둘 중 누굴 데려가고 싶으냐?”
채령은 아버지가 왜 이 지저분한 촌 계집애들을 데려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가기 싫다고 우는 아이보다는 수남이 나았다. 채령이 수남을 가리키자 형만이 명령했다.
“저 아이 아비를 불러오게.”
마름이 안 서방 부녀를 몰아내며 수남의 집으로 달려갔다. 마름이 반도 가기 전에 그 소식은 벌써 수남의 집에 가 닿았다. 채령은 내내 잊지 않고 있던 것을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내 생일 선물은 어디 있어요? 언제 주실 거예요?”
형만이 수남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 아이가 생일 선물이다.”
채령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더럽고 쓸모없어 뵈는 선물은 난생처음이었다. 자신을 쏘아보듯 빤히 쳐다보는 눈빛도, 아버지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 형만은 수남네가 소작으로 부치고 있던 논 서 마지기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안 서방의 딸을 데려가는 대신 일 년에 쌀 세 가마씩 주기로 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값이었다.
“나리, 안 서방에게 주기로 했던 것이면 충분합니다.”
박 서방이 의견을 냈으나 형만은 듣지 않았다.
“대신 저 애 부모가 제 딸한테 아무 권한이 없음을 분명히 하게. 영원히 말일세.”
형만은 어려서 데려온 아랫것이 머리 크면서 딴소리를 하거나 부모가 이러쿵저러쿵 개입하는 게 귀찮았다. 어려서부터 길들인 갑수를 놓고 흥정하다 결국 빼내 간 것은 먹여만 줘도 고맙다던 그의 아비였다. 한편으로는 채령에게 주는 선물값을 높임으로써 딸에 대한 애정을 증명하고 싶었다.
수남 아비는 벼락 치듯 떨어진 행운을 누가 채 갈까 봐 문서에 허둥지둥 지장을 찍었다. 부모의 권한을 영원히 포기하며 만일 수남이 도망치거나 부모가 간섭할 시엔 논 서 마지기를 도로 내놓는 것은 물론 위약금까지 문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거래가 끝났으니 아이를 씻기고 옷도 갈아입혀서 데려오게.”
박 서방이 일렀다.
순식간에 안골마을에 퍼진 소문은 딸 가진 모든 부모를 부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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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1이금이 저 | 사계절
논 서 마지기에 윤 자작의 딸 채령의 생일선물이 되어 작은 시골마을에서 경성 대저택으로 오게 된 수남. 두 소녀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의 혼란기에 복잡한 운명의 줄타기를 하며 일본, 미국, 러시아, 중국 등으로 이어지는 여정에 놓인다. 신분과 성별, 배움과 문화, 민족과 인종의 차이를 온몸으로 겪어낸 주인공들의 인생 드라마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금이
‘이 시대 최고의 아동청소년문학 작가’로 꼽히는 이금이는 1984년 ‘새벗문학상’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이후, 30여 년 동안 진한 휴머니티가 담긴 감동적인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소천아동문학상과 윤석중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초등학교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여러 편의 작품이 실리기도 한 그는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초월하여 폭넓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대표작으로 『너도 하늘말나리야』,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 『유진과 유진』, 『사료를 드립니다』, 『청춘기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