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유럽 여행길에 우연히 발견한 독일의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미술관에 대한 상식과 고정관념을 단숨에 날려버릴 정도로. 강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생태공원 안에 열다섯 동의 소박한 갤러리 건물들이 들어선 이 미술관 단지에는 유기농 뷔페를 제공하는 카페테리아까지 있어, 자연 속에서 여유로운 미술 감상과 더불어 휴식, 산책, 웰빙 식사까지 모든 게 가능한 특별한 자연미술관이었다.
아마도 그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미술관이 왜 꼭 도심에 있어야 하지? 미술 감상과 더불어 휴식과 힐링을 할 수 있는 그런 곳은 없을까? 우리가 미술관에 가는 진짜 이유는 뭘까’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던 것이. 그때부터 나는 대도시보다는 소도시로, 도심보다는 시골로 미술관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최첨단의 멋들어진 건축보다 한가롭고 여유로운 자연미술관 여행이 더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을 잇는 라인강 유역에 밀집한 아름답고 개성 넘치는 자연미술관을 소개했던 『자연미술관을 걷다』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다. 책에 실린 장소는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처럼 도심에서 벗어나 한적한 공원이나 숲 속에 자리한 미술관이 대부분이다. 자연을 벗 삼아 지은 건축물과 양질의 컬렉션, 장르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전시, 그리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한국의 자연미술관. 그중에는 국제적인 미술 명소로 발돋움한 곳들도 있고, 지역민들만이 아는 숨은 명소들도 있다.
유럽 미술관에 관한 책을 쓸 때만해도 나는 ‘왜 우리나라에는 그런 자연미술관이 없을까? 미술 감상과 더불어 휴식과 명상이 가능한 곳은 왜 없는 걸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강원도 원주 산자락에 국내 최대의 전원형 미술관을 표방한 한솔뮤지엄(현 뮤지엄 산)이 개관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명품 건축과 제임스 터렐이라는 라이트아트 대가의 작품으로 무장한 곳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도 양주 숲 속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양주시립 장욱진 미술관이 문을 연다는 소식도 이어졌다. 최-페레이라 건축가 부부가 설계한 이곳은 영국 BBC가 선정한 ‘세계의 8대 신미술관’에 이름을 올리면서 해외에서도 크게 주목받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우리나라에도 미술과 자연, 건축이 어우러진 멋진 곳들이 속속 탄생한다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작정하고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한국에도 숨어 있는 자연미술관이 무척 많았다. 나의 무관심과 무지함으로 정작 내 나라에 있는 미술관은 너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궁금했다. 유럽과 달리 한국의 미술관들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유럽의 자연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마무리하자마자 나는 다시 여행 채비를 했다.
사실 유럽 미술관 여행은 작정하고 한 달이나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한데, 국내 미술관 여행은 주말을 이용해 짬짬이 가야 하므로 오히려 답사하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마저도 다른 일정과 겹치거나 비가 내리는 날은 답사를 미루다 보니 한국의 자연미술관을 여행하는 데 꼬박 1년 반이 걸렸다. 자연으로 떠나는 미술 여행이기에 가능한 한 가족 여행을 겸했다.
해서 이 책은 지난 18개월간 우리 가족의 미술관 여행서이기도 하다. 서울, 경기를 시작으로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그리고 제주까지 대한민국 방방곳곳 자연과 어우러진 미술관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정보 수집을 위해 인터넷이나 신문 기사를 뒤지고, 지인들의 많은 추천과 도움을 받았다. 답사 당시 궂은 날씨에 괜찮은 사진을 찍지 못하거나, 전시 교체 기간과 맞물려 발길을 돌려야 하거나, 담당자를 만나지 못해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경우도 다반사였다. 혹은 기대 없이 갔는데 너무 좋아서 일부러 계절을 달리해 찾아간 곳도 많다. 이렇듯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같은 미술관을 두 번 세 번 다시 찾았다.
짧지 않은 답사 기간이었던 만큼 사실 책에 소개된 미술관 수보다 훨씬 더 많은 곳을 다녀왔다. 하지만 지면의 한계로 24곳으로 간추릴 수밖에 없었다. 그중 각 지역을 대표한다고 생각되는 자연미술관 12곳은 챕터로 나누어 크게 소개했고, 나머지 12곳은 간략한 소개와 함께 화보처럼 각 챕터의 뒤에 붙였다. 내가 자주 찾아갔던 곳이거나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 곳들에 조금 더 페이지를 할애한 것일 뿐, 어디가 더 좋고 어디가 덜 중요해서 그리 한 것은 아니다. 단언컨대, 이 책에 소개한 미술관과 미처 책에 다 넣지 못한 곳들 모두 우리나라의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는 귀중한 곳들이다.
미술관 기행서이기는 하나 그곳에서 봤던 전시나 작품, 작가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한국 미술계의 최신 정보도 소개하고자 했다. 또한 관장이나 큐레이터, 에듀케이터 등 미술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를 통해 사람 냄새나는 미술관 기행서를 쓰고자 했다.
숲으로 떠나는 미술 여행은 그야말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혼자가 아니라 가족, 친구, 지인과 함께해 더욱 즐거웠다. 제주나 통영 지역 답사 때에는 서울에 사는 언니와 부산에 계신 부모님이 여행에 합류했고, 집에서 가까운 경기 남부나 경치 좋은 강원도 답사 때엔 지인이나 아이의 유치원 친구 가족이 동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자연미술관은 멀리 사는 가족들과 모처럼 만나는 가족 모임 장소가 되기도 했고, 친구나 지인 들과의 즐거운 소풍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왜 미술관이 숲으로 간 걸까? 미술관 설립자들은 왜 자연 속에다 미술관을 짓는 걸까? 이는 아마도 자연 속에서 휴식과 미술 감상을 동시에 누리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반증일 터다. 도심의 미술관에도 가고 자연으로 나들이까지 가기엔 우리의 여가 시간이 늘 부족한 탓이기도 할 터다. 해서 자연미술관은 유럽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미술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도시 유명 미술관 코스에 싫증난 이들, 바쁜 일상을 잠시 접고 힐링의 미술 여행을 꿈꾸는 이들, 사랑하는 연인, 가족과 함께 특별하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싶은 이들에게 ‘느림과 쉼표’의 아름다운 자연미술관으로 떠나보길 권한다. 숲 속 미술관에서 나와 내 가족이 누렸던 행복한 시간을 독자 여러분들도 함께 누리시길 기대해본다.
끝으로 책이 나오기까지 아낌없는 지지와 도움을 주신 미술관 관장님들과 직원 분들, 벌써 세 번째 책 작업을 함께한 아트북스 담당자 분들, 그리고 미술관 여행에 함께해준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 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2015년 11월
이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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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간 미술관이은화 저 | 아트북스
『숲으로 간 미술관』은 현대미술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선 뮤지엄 스토리텔러 이은화가 1년 반이 넘는 기간, 일상에 작은 쉼표 하나 찍어줄 전국의 보석 같은 자연미술관을 찾아 떠난 여행기를 묶은 책이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을 잇는 라인강 유역에 밀집한 아름답고 개성 넘치는 자연미술관을 소개했던 전작, 『자연미술관을 걷다』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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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
2016.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