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인문 발칙한 인문] 한국사회와 노벨상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의 얼굴을 넘어’ 여성과 사회적 약자, 사회, 국가에 대한 작가만의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그로 인해 나는 배웠다. 한국사회의 문화적 식민성을. 탈식민으로 가는 먼 길을.
글ㆍ사진 정희진(여성학자,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201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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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소개, 아니 ‘분석’하는 하나의 방법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노벨상 특수가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내용도 흥미진진하고 구성도 독특한데, 생각만큼 주목받거나 많이 팔리지는 않은 듯하다. 만일 하루키나 한국인 작가가 탔다면 어땠을까. 혹은 이창래처럼 영어가 모어인 ‘한국인’이 수상했다면? 지금 분위기와는 다르지 않았을까.

 

나는 이러한 상황이 우리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분단의 업(業)으로 언제나 전쟁 발발 위협과 긴장이 주요 통치 수단인 사회에 살면서도 막상 전쟁 연구는 그리 많지 않고,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라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역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여성 작가도 생소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한국은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무관심한 사회다. 다른 말로 하면, 주류 지향. 우리에게 외국은 중ㆍ미ㆍ일ㆍ러 뿐이다.

 

이 작품은 전쟁과 평화, 남과 여, 생과 사, 고통과 생존 등 문학의 전통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관점도, 형식도, 주장도 다르다. 소설, 르포, 증언의 경계를 허물면서 ‘쓰는 방식’이 곧 ‘메시지’임을 보여준다. 전쟁은 예술의 영원한 소재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재현은 주로 폐허 위의 재건자, 폭력의 피해자, 헤어진 연인 등 ‘콜래트럴 데미지(부수적 피해)’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작가의 상상력에서 여성은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라 남성 캐릭터를 보조하거나 남성 간 갈등의 부산물(볼모)을 벗어나지 못했다. 참전한 경우에도 후방에서 간호 업무나 의료 지원 등 전투 외 업무에 종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잠깐! 이렇게 쓰니, 그럴 듯한 것 같지만 내가 위에 쓴 이야기는 부분적 사실에 불과하다.

 

알렉시예비치는 숨겨진 역사를 드러냈다. 2차 대전에 참전했던 1백만 명이 넘는 소련 여군 중 200명을 집중 인터뷰, 한림원의 평가대로 “다양한 목소리(多聲性)를 통해 이 시대의 고통과 용기를 담은 기념비적인 작품”을 탄생시켰다. 로고스보다 관계, 말씀이 아닌 목소리, 다른 목소리, 다양한 목소리는 여성주의 인식론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전쟁과 성별에 대한 일반적 통념 중 하나는 남성은 전쟁을 일으키고 여성은 평화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별 논리에 기반 한 기존 국제정치학에서 남성은 국가나 사회적 집단을 이루면서 다른 남성과 싸우는(combat) 반면, 여성은 전장 밖에서 ‘자기 남자’의 보호를 받는다고 가정한다. 성폭력과 가정폭력 등 다양한 여성에 대한 폭력(VAW, Violence Against Women)을 생각하면, 일상에서도 남성은 여성을 보호하지 않지만 ‘보호자 남성’의 신화는 막강하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누가 누구를 보호하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국가 성립 시기 선거권과 국민개병(皆兵) 제도는 동시에 등장했다. 그러나 이는 남성에게만 한정된 권리이자 의무였다. 여성이 시민권을 가지려면 가족 제도를 통한 남성의 승인이 필요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여성이 ‘2등’ 시민의 지위에 벗어나려면 병역을 수행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불평등의 이유가 징집에서 면제(실제는 배제)된 여성의 ‘특권’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여성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이론과 현실’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어느 군대도 인종, 성별, 성 정체성, 국적 등에 따라 절대로 평등하게 구성되지 않는다. 2차 대전시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조선인이나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병사는 식량 배급부터 차별 받았다. 알제리 병사에게는 우유와 과일이 지급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도 “여성의 입대와 참전 = 불평등 해소”가 아님을 보여준다. 전쟁의 고통과 더불어, 식민지 출신 남성처럼 또 다른 차별이 기다리고 있다. 생리를 하는 군인, 남성보다 얇은 옷을 지급받는 병사, 여자 화장실이 없어 바다에 뛰어든 분대장, 여성을 가미카제로 사용한 군대.

 

내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가장 큰 성과는 전쟁에 대한 상상력과 이미지를 변화시켜다는 데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참전 경험은 남성 사이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민간학살의 경험에서부터 현지인을 돕는 병사도 있고 산 속에 몇 십 년을 혼자 사는 이들도 있고, 탈영은 그보다 훨씬 많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더 말할 나위 없다. ‘살인’이라는 행위부터 다른 자아를 요구한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 남성들도 있다. 2차 대전 당시, 한국인 군 위안부를 ‘보급’ 받은 일본군 남성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섹스를 할 기운도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저 도망가고 싶었다. 전쟁 내내, 가장 그리웠던 것은 집에서 마시던 커피였다”.

 

전쟁에서의 시간 경험은 대개 지루한 대기의 연속이다. 전쟁터에 나간 남자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공포감을 경험하거나 아니면 용기백배로 싸우거나 둘 중 하나이기만 할까? 이런 남성의 상태를 ‘위무’하기 위해 전시 성노예는 불가피한 것일까. 전시(戰時) 강간은 개인적 일탈로 여겨지지만 성폭력(mass rape)은 고대서부터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어디선가에서 행해지고 있는 전쟁의 기본 전략이다. 상대 남성의 사기를 꺾고 ‘전리품(여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다.

 

2차 대전과 이라크 전쟁은 다르다. 현대전은 고도의 기술전으로 전쟁을 수행, 공격하는데 있어서 전통적인 남성다움의 의미를 변화시키면서 여성의 전쟁 참전 비율을 높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전체 미국 군인 중 15%가 여성이지만, 육체적 강인함보다 기술력이 요구되는 공군의 여성 비율은 20%에 이른다. 미국에서 전체 장교와 사병의 15%가 여성이며, 여성 사병 중 50%는 흑인 여성이다. 이러한 변화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이다. 전쟁 문학은 문명과 역사를 반영, ‘지시’하는 영원한 가늠대이다.

 

사족 - 한국사회의 노벨상, 특히 문학상에 대한 강박증과 욕망은 종종 민망한 장면을 연출한다. 독자로서 내 개인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이공계 분야는 문학상이나 평화상보다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성취로 가능하다. 반면, 문학은 그 사회의 총체적인 지성과 인문학적 기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성찰, 사회적 자아 수준을 반영한다. 만일, 만일, 만일 한국이 노벨상을 ‘다시’ 탄다면(우리가 종종 잊은 사실, 평화상은 탔다), 이공계 분야에서 수상 확률이 높다. 우리사회의 인문학 수준 - 대학, 문단, 출판, 언론 분야 등 - 에 대한 총제적인 자화상을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에게로의 귀성(歸省)과 변화, 이것이 모든 앎의 시작이 아닐까.

 

그리고 그토록 노벨문학상을 열망한다면, 기존 수상작인 ‘기출 문제’를 읽는 게 순서다. 우선 이 책부터 말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의 얼굴을 넘어’ 여성과 사회적 약자, 사회, 국가에 대한 작가만의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그로 인해 나는 배웠다. 한국사회의 문화적 식민성을. 탈식민으로 가는 먼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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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저/박은정 역 | 문학동네
이 책은 전쟁에 참전했던 200여 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여성들은 참전하여 저격수가 되거나 탱크를 몰기도 했고, 병원에서 일을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전쟁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 전쟁을 겪은 여성들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책에서 입을 연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전쟁 가담 경험을 털어놓는다. 여성이 털어놓는 전쟁 회고담은 전쟁 베테랑 군인이나 남성이 털어놓는 전쟁 회고담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온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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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노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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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여성학자,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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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1948년 5월 31일 우크라이나 서부의 스타니슬라브(現 이바노-프란콥스크)에서 우크라이나인 어머니와 당시 군인이던 벨라루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의 아버지는 퇴역 후 가족과 함께 벨라루스의 작은 마을로 돌아와 부부가 함께 교사로 근무했다. 알렉시예비치는 재학 중 학교 신문에 다수의 시와 산문을 기고했다. 졸업 후 기숙사 보모, 농촌지역 교사로 2년간 재직하며 소련 대학 진학을 위해 필요한 ‘고용증명서’를 1965년 취득했고, 1966년에는 고멜 시 나로블의 지방 신문사에서 일했다. 그리고 마침내 민스크에 위치한 벨라루스 국립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72년 대학졸업 후 브레스트 지방 베레사의 지역신문사 기자와 공립 학교 교사로 동시에 근무했다. 이듬해 민스크 지역신문에 취직한 후 저널리즘에 온전히 종사하기로 결정했다. 1976년에는 문학잡지 [네만]에서 통신원으로 시작해 곧 보도부장이 되었다. 같은 해에 첫 서적 『나는 마을에서 떠났다』를 완성했다. 그러나 시골 주민의 도시 이주를 금한 소련 정부의 융통성 없는 여권정책을 비판한 내용으로 인해 출판은 금지되었다. 훗날 알렉시예비치 자신도 ‘보도성이 너무 짙다’며 책의 출판을 반대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단편, 에세이, 르포 등 다양한 문학장르를 시도했다. 당시 벨라루스 작가 알레스 아다모비치가 ‘집단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영역을 개척하던 중이었다. 아다모비치는 알렉시예비치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묘사하는’ 자신만의 문학방식을 모색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주었다. 이 방식의 궁극적 목표는 일상의 콜라주 형태로 개인의 목소리의 합창을 만드는 데 있었다. 1983년 탈고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이 아니다』에서 처음으로 이 방식을 도입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세계2차대전에서 전투원, 당원, 공무원으로 참전했던 소련 여군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녀들의 전쟁 중과 후의 운명을 연구했다. 그 후 2년간 책의 출판을 위해 검열과 투쟁하면서 알렉시예비치는 ‘대조국전쟁(세계2차대전의 러시아식 표현)의 영광에 먹칠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소위 ‘반공 태도’로 인해 일자리마저 잃었다. 책은 소련에 페레스트로이카가 도래한 1985년에야 모스크바와 민스크에서 동시 출판되었다 (1987년 독일어, 1988년 영어 번역본). 러시아 국내에서만 2백만 부 이상 팔리며 독자와 비평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작가는 책을 연극과 기록영화로도 각색하였고 영화 버전은 라이프치히 국제 기록영화 주간에서 ‘은비둘기상’을 수상했다. 두 번째 저서 『마지막 증인』도 소위 ‘이념적 가치의 부재’라는 이유로 출판이 미뤄지다 1985년에 벨라루스에서 빛을 보았다 (1989년 독일어 버전 『Die letzten Zeugen』).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세계2차대전과 스탈린 시대를 겪은 여성과 어린이의 시각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의 고통스러운 경험도 묘사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부가 주도한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운동 덕분에 알렉시예비치는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다수의 라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완성했고, 영화감독과 협업했으며 유명한 모스크바 연출가 아나톨리 에프로스를 위한 작품 등 다양한 시나리오와 극본을 집필했다.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차기작 『아연 소년들: 아프간 전쟁으로부터 울리는 소비에트 목소리』(1989)에도 상당한 시간을 들였다. 작가는 아프간 전쟁 참전군과 ‘아연 소년들’이라 불린 전사자(이들의 유해는 아연 관에 담겨 돌아왔다)의 어머니와 5백 건 이상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책은 10년 간 지속되었던 아프간 전쟁을 비신화하는 데 기여했고, 이로 인해 알렉시예비치는 1992년부터 여러 차례 민스크 법정에 섰지만 유죄 판결은 받지 않았다. 1993년에는 다음 작품 『죽음에 매료되다』를 완성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소련 제국의 종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의 자살과 자살기도를 분석했다. 그 후에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핵 참사를 다룬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 『체르노빌의 목소리』(1997)를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참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들을 심리적으로 묘사했다.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는 작품을 ‘애도와 고발로 이뤄진 가공할 만한 진혼곡’이라 평가했다. 실제로 핵 ‘사고’가 인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끔찍한 보고서로 이뤄진 이 책은 유사 시 전세계 인류를 위한 지침서가 되었다. 벨라루스 현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센코가 집권한 1994년부터 알렉시예비치의 책은 그녀의 모국에서는 더 이상 출간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은 학교 교과과정에서도 삭제되었다. 1998년 라이프치히 유럽이해 도서전에서 수상한 알렉시예비치는 상금으로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러시아어판을 구입해 벨라루스로 반입했다. 바로 이 시기부터 알렉시예비치에 대한 벨라루스 당국의 공격이 심화되었다. 그녀의 전화가 도청되었고,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으며 CIA와 결탁한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2000년에는 국제피난처도시네트워크(ICORN)로부터 보호를 제안 받아 프랑스 파리에서 몇 년 동안 거주했다. 그 후에는 스톡홀름과 베를린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작가는 독일학술교류처(DAAD)의 ‘베를린 예술가 프로그램’에 초빙되어 자신의 최신 저서를 집필했다. 2011년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 독재정부의 핍박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민스크로 귀국했다. 『세컨드핸드 타임』은 독일에서 출간된지 일주일 만에 9,000부가 팔리며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또한 2013년 프랑스 에세이 부문 메디치상을 수상했으며, 문학잡지 [Lire]의 2013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이에 앞서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주요 문학상 중 하나인 독일출판협회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소련이 붕괴되고 20년 후 '붉은 인간'이라 명명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작품활동 초기부터 ‘목소리의 소설’이라는 자신만의 문학장르를 개척했다. 이에 따라 그녀의 모든 작품은 세계2차대전 시기부터의 러시아 역사와 함께 진행한다. 독일어로 출판된 그녀의 최신작 『Secondhand-Zeit. Leben auf den Truemmern des Sozialismus』 (2013년 9월)는 최근 몇 년간 사회적 격변을 겪은 이들의 정체성 모색 과정을 반영한다. 매 작품마다 많은 인터뷰를 통해 우선 전반적인 그림을 그리고, 그 후에는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각 개인에게서 얼마나 많은 인간성을 찾을 수 있고 그 개인 속의 인간성을 보호’하는 작업을 한다. 정서적 역사에 대한 알렉시예비치의 문학적 연대기를 접한 많은 이들은 그녀를 구 소련 국가 거주자들의 ‘도의적 기억’이라 칭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은 35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아울러 다수의 연극, 라디오 드라마, 다큐멘터리의 소재로도 사용된다. 작가는 폴란드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 문학보도상(2011)과 독일 도서전 평화상(2013), 2015 노벨문학상 등 여러 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