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특정인을 옹호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의도는 없지만, 그런 것처럼 오독될 수 있습니다.
“그래 내가 그걸 사다 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테냐?"
"사다 주시면 아저씨께 해드릴 일이 하나 있어요."
"뽀뽀 말이냐?"
"그것 말구요. 뽀뽀보다 더 좋은 거요."
"그럼 뽀뽀가 아니면 껴안아 줄래?"
나는 탁자를 돌아가 아저씨의 목을 꼬옥 껴안았다. 에드문드 아저씨의 희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내 이마를 스쳤다.
위 글에서 당신은 무엇을 읽었는가? 최근 한 가수의 음원으로 관심이 집중된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일부이다. 관심만큼 보이고, 편견만큼 가려지는 것이 텍스트라는 의미에서 무한 오독의 가능성을 열어보았다. 함께 힐리스 밀러가 주장한 ‘모든 독서는 오독’이라는 이론을 꺼내야겠다. 모든 텍스트가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며, 종결되지 않은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뜻이다. 포스트모던 이후 수용미학은 이렇게 독자 스스로 자기방식대로 맘껏 오독할 권리를 인정했다. 그런데 한 출판사가 한 여가수의 음원을 놓고 맘대로 자기들의 해석을 강요했고, 웃기지도 않게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아니, 웃긴 일인가?
다시, 단일화와 검열의 시대
요 몇 해 대중문화는 지속적으로 과거를 소환시켰다. 정치적 맥락과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많은 문제점들은 낭만적 기억상실 속에 묻혔다. 소환된 과거가 불러온 것이 추억만은 아니다. 국정교과서와 예술 검열의 시대가 함께 찾아왔다. 고화질 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되는 <영웅본색>의 포스터에는 지금 한국 문화가 직면해 있는 문제들이 상징적으로 담겨있다. 담배를 물고 있는 주윤발의 얼굴에서 담배가 사라졌다. <영웅본색>의 가장 상징적인 이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 그 이면에는 검열이 있다. 청소년이 모방할 수 있으니 TV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금지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1997년 5월로 돌아가 보자.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의 원작소설이기도 한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음란물로 기소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았고 소설가가 법정 구속되었다. 같은 해 알리시아 스테임베르그의 <아마티스타>도 음란물로 지정, 출판사는 출판등록 취소 명령을 받았다. 1996년 박재호 감독의 <내일로 흐르는 강>은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퀴어 영화였는데, 두 남자가 주먹을 사이에 두고 키스를 하는 은유적 장면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다양성은 오도되고, 표현의 자유는 철저하게 금기시 되었다. 되짚어 국정교과서의 시기이기도 했고, 그리 먼 과거도 아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현재에 그대로 투영되어 또 다른 독재의 시절을 맞이한 지금 관점에서 보자면 아이유 논란의 시발이 된 출판사의 ‘독서 가이드’는 정말 끔찍해 보인다. 더불어 아이유의 음원을 폐기하자는 서명운동은 더 끔찍한 일이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검열하고, 자신의 작품을 훼손했다며 타인의 작품에 자신의 해석을 덧댄다. 획일화 속에 다양성의 창구가 막히면 자기검열이 시작되는 법이다.
논란 속에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판매량이 늘었고, 더불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나보코프의 책은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정신 병리학 용어를 만들어낼 만큼 어마어마한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보코프는 ‘롤리타’가 소아성애의 병리학적 용어로 지칭되는 것을 끝내 불쾌해 했다고 한다.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롤리타>는 단순히 어린 소녀에 대한 중년 남성의 저열한 욕망을 담고 있는 작품이 아니다. 어린 소녀에게 마음을 놓쳐버린 중년 남성의 고독과 어린 딸의 생생한 젊음을 묘하게 질투하는 중년 여성의 허망함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거울 속 이미 너무 늙어버린 내 몸과 달리 쉬 늙는 법을 모르는 마음이 젊음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지는 쓸쓸한 내면의 지도를 꾹꾹 눌러 쓴 작품이다.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는 너무 노쇠해버린 자신의 몸이 주는 슬픔에 갇혀 미소년이 가진 생생한 젊음에 마음을 빼앗기고 마는 노인이 등장한다. 박범신의 <은교>는 또 어떤가? 영화 쪽에서 미성년을 성적 대상으로 대하는 중년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샘 맨더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나 토드 솔론즈 감독의 <해피니스>, 그리고 그렉 아라키 감독의 <미스테리어스 스킨>에 등장하는 소아성애는 사회적 맥락에서의 금기와 중산층의 위선을 조롱하는 장치로 쓰인다. 단지 소아성애를 소재로 한다고 이 모든 작품들이 비난을 받아야 할까?
소재와 주제, 표현법은 예술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원작이 있더라도 감독이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영화라는 작품은 새롭게 탄생할 수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원작을 영화화한 두 편의 <롤리타>도 그런 점에서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표현하고 싶은 내용과 주제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결정하는 과정에서 스탠리 큐브릭과 아드리안 라인 감독은 원작에 서로 다른 밑줄을 그었다. 스탠리 큐브릭이 인생의 허망함에 집중한다면, 아드리안 라인 감독은 젊은 육체를 감각적으로 나열한다. 원작을 어떻게 오독하건 재해석하건 그건 새로운 예술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의 해석의 몫이고, 어떤 형식으로든 검열되어서는 안 된다. 당연히 한 작품이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오독’이나 ‘새로운 해석’ 때문이 아니라 그 작품이 가진 편견과 저열함, 그리고 낮은 완성도 때문이어야 한다.
문제가 된 음원을 폐기하라는 청원에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을 했다고 한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속 한 대목이 떠오른다. 제제는 아빠 기분을 좋게 하려고 아저씨에게 배운 노래를 아빠 앞에서 부른다. 하지만 ‘나는 발가벗은 여자가 좋아.’란 가사가 아빠를 화나게 만든다. 아빠는 맞는 이유를 모르는 제제의 뺨을 때리며 계속 노래를 시킨다. 다시 <롤리타>의 주인공 험버트에게 돌아가 보자. 그가 어린 소녀에게 마음을 뺏기게 된 것에는 어린 시절 여자 친구의 죽음과 학대받았던 기억 때문이다. 아비에게 학대 받고 자란 제제가 또 다른 험버트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 사회적 문제를 제기할 때 예술작품은 손쉽게 통제되지만, 사회의 근원적 증상을 치유하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계속 현재와 미래로 회귀해 우리 곁을 유령처럼 떠도는 것처럼 말이다. 국정교과서와 예술 검열의 시대로 역행하는 요즘 자기 맘대로 손찌검을 하는 제제 아빠 같은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 좀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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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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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하나..
의도가 다분하게 느껴지고
그렇게 느끼는 독자의 섕각을 오독하고 있다고 말하는 글쓴이의 오만함이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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