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 : LEE CHUN-HEE
소설가에게 여행과 맥주란
규슈 여행의 마지막 날, 나가사키 인터내셔널 호텔에서 TV를 켜니 여행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한 남자가 에노덴(江ノ電)을 타고 가마쿠라(鎌倉) 지역을 둘러보는 내용이었다. 에노덴은 가마쿠라와 후지사와를 오가는 10킬로미터 길이의 단선 협궤 전철로, 가마쿠라 고교 앞을 지날 때 해변을 배경으로 T자형 교차로를 가로지른다. 전철이 이곳을 지날 때 바다 쪽을 바라보고 서서 자동차가 철로 신호등 앞에서 대기 중인 모습을 촬영하면, 애니메이션 <슬램덩크> 오프닝에 등장하는 장면과 똑같아진다. 그런 곳인지라 ‘해마다 1,0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에노덴을 탄다’는 자막이 화면 하단에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장발에 트렌치코트를 걸친, 펑퍼짐한 인상의 중년이다. 그는 전철에 타자마자 캔맥주 꼭지를 따더니 시원스레 들이켠다. 하긴 여행자에게는 언제라도 캔맥주의 꼭지를 딸 수 있는 특권이 있으니까. 고토쿠인(高?院, 일본 정토종 사찰)의 대불 같은 가마쿠라 관광 명소를 둘러보는 동안, 조금씩 밝혀진 남자의 정체는 연극배우였다. 아무래도 예술가여서일까, 그는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면 술부터 찾았다. 그렇게 차수를 늘려가며 동네 술집을 돌아다니는 사이 여행 프로그램은 자연스레 음주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가마쿠라 술꾼 기행’인 셈이었다. 동병상련일까. 어쩐지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의 입장에서도 여행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술을, 아니, 술만 마시게 된다. 그 원리는 이렇다. 사실 나는 낯선 장소에 있는 걸 그다지 즐기는 성격이 아니다. 사실은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그럼에도 여행할 기회가 남들보다 많았다. 오로지 소설가가 됐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는 한, 나는 낯선 곳에 있는 걸 직업적으로 즐겨야만 한다. 소설관에서 비롯된 지론이다. 소설에는 욕망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 한다. 욕망하는 목표가 생기는 순간부터 그는 헤매게 돼 있다. 이 ‘헤맨다’는 말을 그럴 듯하게 표현하면 여행이 된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는 일상의 시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시공간을 찾아가는 여행담이라고 할 수 있다.
PHOTOGRAPH : LEE KWA-YONG
이 여행담을 쓰기 위해서 소설가는 실제로 여행을 하기도 한다. 중국 옌볜(延邊)이 배경이라면, 주인공을 따라서 실제 그곳을 방문하는 식이다. 그간 나는 캘리포니아, 베를린, 레이크 디스트릭트, 옌볜 등을 방문했고, 그 결과 어떤 식으로든 그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출판됐다. NHK의 그 여행 프로그램을 보게 된 것도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일본을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소설을 잘 쓰자면, 본래 좋아했든 그렇지 않았든 여행을 자주 다녀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소설을 잘 쓰려면 더 자주 여행을 가야만 하는데, 여행을 가게 되면 소설가는 소설을 쓸 수가 없다는 것.
소설가는 평소에 혼자 보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 주간 회의를 통해 팀원을 이끌면서 목표를 하나씩 달성해가는 일과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게 바로 소설 쓰기다. 그래서 훌륭한 소설가가 되려면 가능한 한 소설을 쓰는 방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편이 가장 좋다. 하물며 해외여행 같은 것은 삼가는 게 소설을 잘 쓰는 지름길이다. 그걸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여행을 자주 한다. 이 칼럼을 쭉 따라 읽은 독자는 잘 알겠지만, 대개 취재나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차 혹은 번역본이 출간돼 행사가 있을 때 여행을 떠난다. 나는 여행 중에는 소설을 쓰지 않는데, 그러면 도대체 뭘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자연스레 낮부터 술을 마시게 된다는 논리라면, 다들 이해하시려나.
TV 속 그 남자처럼 시작은 맥주다. 아무리 마셔도 맥주는 정말 맛있다. 그리고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로컬 비어가 있다. 조선족이 사는 옌지에서는 ‘빙천(氷川)’이라는 맥주를, 독일의 작은 도시 밤베르크에서는 ‘라우흐비어(Rauchbier)’라는 맥주를 마셨다. 빙천은 조금 센 ‘소맥’ 맛이고, 라우흐비어는 고기 불판의 그을음을 맥주에 푼 것 같은 맛이다. 맥주를 마시고 나면, 차차 도수를 높여나간다. 로컬 비어처럼, 도수가 높은 술 역시 지역마다 유명한 것 하나쯤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모스크바에서는 벨루가(Beluga)를, 시안에서는 시펑지우(西鳳酒)를 마시는 식이다.
10여 년 전, 무척 좋아하는 소설가 두 분의 낭독회가 베를린에서 열린다고 해서 브뤼셀에서 베를린까지 찾아간 적이 있다. 일러준 호텔에 도착한 것은 초저녁이었다. 일정 때문인지 다들 호텔에 안 계셨다. ‘그럼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호텔 옆 인도 식당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한국인 남자들을 찾는다고 하니, 스리랑카 출신의 종업원이 매일 저녁마다 찾아와 술을 마시는 이들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럼 그렇지. 외국에서 소설가가 뭘 하겠는가?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맥주부터 시켰다. 그 식당에서 이틀 내내 선생들과 술을 마셨다. 밤이 깊어 술이 취할 대로 취하니 그곳이 서울인지 베를린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지막 날, 선생들은 동물원(Zoologischer Garten) 역 앞에서 나흘을 묵었는데 동물원 입구도 못 가봤음을 한탄하며 베를린을 떠났다.
김연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며 쉬지 않고 소설과 에세이를 발표하는 부지런한 소설가다. 그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를 통해 꼭꼭 숨겨두었던 특별한 여행의 추억을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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