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은 지식 생산 능력에서 큰 격차를 보이는데, 한국인 유학생들은 이 간극에서 트랜스내셔널 기회를 포착한다.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어떤 의미에서 지식 생산의 경제적 지위를 뜻하며, 지식인의 계급적 질서에서 중간적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미들맨 소수자가 식민지적, 전근대적 상황에서 출현하듯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한국 학계의 지적 식민성과 전근대성 속에서 탄생한다.(중략) 따라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주요 생존 전략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빨리 받아들여 한국의 로컬 지식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이다.(25쪽)
위치는 언제나 상대적이어서 한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자리하던 사람이 다른 사회로 가 엘리트 지위를 차지하는 일은 늘 일어난다. 이렇게 엘리트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은 ‘지배받는’ 지배자가 되어 이방인으로 살며 배운 지식과 가치 등을 이 사회에 전파한다. 이들은 또한 자신에게 부여된 엘리트 지위를 폐쇄적으로 사용하고 주변인을 배제함으로써 또 다른 ‘이방인’을 양성한다. 이른바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들이다.
지난 7월 20일, 벙커1 카페에서는 『지배받는 지배자』의 저자 김종영 교수가 미국 유학생들이 한국의 엘리트로 변신하는 과정과 결과를 다층적으로 분석해 이야기를 전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미국으로 유학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년간 심층 면접을 통해 사례 연구한 김종영 교수는 무엇보다 ‘1급 체제’의 국내 학계 분위기를 가장 큰 문제로 지적했다. 또한 국내 대학의 교수직을 차지하기 위해서나 직장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기 위해서 미국 유학을 통한 학위 습득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다시 많은 사람들이 미국 유학을 결정하도록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김종영 교수는 우선 비민주성, 폐쇄성, 비합리성 등을 국내 학계의 특징으로 지적하며 상대적으로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며 합리적인 미국 대학의 연구 분위기가 유학생을 유입하는 강한 힘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막스 베버는 합리성이 결여된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라고 했는데요, 저는 합리성이 결여된 한국 대학과 학문 공동체를 ‘천민 학문 공동체’라고 보고 있습니다. 과격한 말이라고 하시는 분도 있지만 학술적 측면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바로 이런 차이 때문에 “엘리트가 되기를 꿈꾸는 학생들은 국가 경제와 교육의 경계를 넘어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직업을 갖고 자신의 인생을 펼치고 싶어한다.”(41쪽)
지방대 출신, 여성 등의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 같은 학부 출신 학생을 우선으로 하는 상위권 대학의 대학원들은 이들에게 기회의 제공조차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반면 미국의 대학원은 학부의 학교를 따지지 않는다. ‘기회의 땅’이 되는 순간이다.
김종영 교수는 또한 한국과 미국 사회에 양다리를 걸치고 중간에 위치하면서 이익을 보는 지식인을 ‘미들맨 소수자 이론’으로 설명했다.
“이런 이론에 기반한 저의 연구 대상은 지식인들입니다. 이들이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느냐면 미국과 한국 중간에 위치했고, 글로벌 지식과 로컬 지식의 중간에 위치한 지식 매개자 역할을 전담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입니다.”
김종영 교수가 만난 많은 미국 유학생들은 이와 같은 점을 증명하듯 자신들의 경험을 들려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분에게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유학 오는 한국 부모들과 자녀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 지구 반대편까지도 가는 겁니다. 기러기 가족이 있는 나라가 몇 곳이나 될까요. 한국, 홍콩, 타이완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내 자녀가 한국을 넘어서서 교육 받고, 직업을 가지길 바라는 거죠.”
또 이들이 가진 중요한 ‘유학’의 원동력은 폐쇄적인 한국 사회의 학벌 차별, 성 차별 등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였다. 이것이 바로 미국 유학의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강릉대 조명석 교수님이 『강릉대 아이들, 미국 명문대학원을 점령하다』라는 책을 썼어요. 이 분 역시 미국 유학파인데 한국에 와서 보니 제자들이 너무나 공부할 의욕이 없던 거예요. 또 제자들을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시키려고 했는데 많은 실패를 겪었어요. 그래서 직접 미국 명문 대학원에 제자들을 보냅니다. 그 학생들이 세계 굴지의 기업에 취직을 하고요. 이 이야기를 책으로 쓰셨어요. 미국 유학이라는 것이 한국 대학의 어떤 비민주성을 해소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미국 유학을 결정한 유학생들의 경험은 그야말로 ‘똥밭’을 구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이방인’의 자리를 쉽게 벗을 수는 없었다. 김종영 교수는 이를 ‘똥밭이 거름이 되기를 꿈꾸는 이방인’이라고 표현했다.
즉 트랜스내셔널 이방인으로서 미국 유학생은 한편으로는 ‘똥밭’을 구르지만 이는 자신의 미래에 ‘거름’이 되는 가치 있는 장소라는 이중성을 띤다. 미국 대학의 교수진이 전수하는 학문자본의 양과 질, 미국 대학 인프라의 탁월함, 대가라는 학문 권력과의 만남, 우수한 연구 네트워크, 미국 학문 활동의 에토스와 규범은 한국 대학이 제공하지 못하는 귀중한 ‘거름’이다. 이것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미국 대학은 학문을 하는 이상적인 장소로 인식되고, 미국 대학의 학문적 규범은 누구나 따라야 할 준거가 된다.(118쪽)
‘학문은 더럽다(Academia Immunda)’
“공부라는 건 감정적인 것이죠. 집단적인 분위기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다 같이 공부 안 하는 집단에서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들은 교수의 연구 활동을 위해 다양한 지원을 한다. 또한 연구 실적에 따라 교수를 차등 대우한다. 연구 업적이 적으면 대우가 없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반면 한국은 연차가 쌓이면 월급도 자연히 쌓이는 구조다. 연구로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학벌 체제, 폐쇄적 학문 문화 등이 큰 벽으로 가로놓여있기 때문이다. ‘다 같이 공부 안 하는’ 분위기인 것이다.
“미국의 국공립 대학에서는 교수의 연봉을 인터넷에 공개하게 되어 있어요. 사이트에 가면 그 사람의 연봉을 알 수 있어요. 어느 교수가 실력이 있는지 알려면 연봉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자본주의적이에요. 잔인한 것 같지만 합리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알 수가 없죠.”
미국 대학의 학과장이 학문적으로 성과를 낸, 학과의 비전을 제시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실질적인 권력자라면 한국 대학의 학과장은 일종의 명예직으로 학문적으로 탁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나이 많은 교수가 학장과 학회장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한국 대학에서는 그가 특정 학벌이나 파벌의 리더일 가능성이 크다. 리더십은 물론 기대할 수 없다.
“여러분이 보셨듯이 정치만 더러운 게 아니에요. 학문도 더러워요. 왜냐하면 글로벌 권력 관계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한국의 학문 공간이 언제까지 미국의 지배를 받는 공간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 중심의 글로벌 헤게모니 안에서 영원히 속박된 채 중간 지식인으로 살려는 개인만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당면한 현실에 대한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일이다. 연구 현장의 확대, 개방적이고 실력 위주의 학술 문화 구축 등을 말하는 김종영 교수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 이유였다.
제국의 대학이 한순간에 세워진 것이 아니듯이 한국 대학의 부상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서 지금의 한국 대학이 처한 현실이 숙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중략) 한국의 공학 분야가 세계 수준에 근접했고, 몇 개 대학은 연구 중심 대학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한국 대학의 상당수 연구진들은 중요한 글로벌 행위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연구 문화를 합리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실력주의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물론 한국 대학이 독수리가 되어 비상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인내가 필요하다.(301쪽)
이어 미국과 한국의 연구 문화, 거시적 관점의 지배 체계, 사회, 문화적 차이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미국 대학의 우월성은 계속 될 것인가?
앞으로의 일들은 예측할 수 없지만 당분간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단적으로 세계의 가장 우수한 대학 중 절반이 미국 대학이니까요. 구조적, 문화적 우월성이 있어요. 격차를 줄이는 데 있어 비교적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대학은 가까운 곳에 있는 일본이 아닐까 싶어요. 일본 사람들은 미국 유학을 잘 가지 않는데 그만큼 우수한 대학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고 볼 수밖에 없겠습니다. 어찌 보면 그런 우수한 대학들을 만드는 게 시급한 과제겠죠.
최근에는 미국 대학들도 어려워졌어요. 경제 상황 등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고 봐야죠. 외국 유학생들도 많이 받고 있고요. 헤게모니가 변동할 가능성은 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미국의 지식이나 좋은 제도가 한국에 수입하는 과정에서 변질되는 이유가 뭘까?
위치 경쟁의 구조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야 하는데요. 흔히 말해 1급 체제라고 할 수 있는데, 서울대 중심 엘리트 학교의 지위가 있죠. 자리가 한정되어 있어요. 근데 모든 사람이 다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문제가 발생합니다. 방법론의 철학보다는 구조적인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위치 경쟁을 완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중심의 대학 체제를 전국적인 우수 대학으로 골고루 퍼지게 해야겠죠. 가령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 같은 것이 대안이 될 수도 있겠고요. 궁극적으로 탈중심, 다원적 체제로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한 분들 중 차별을 겪어서 한국에 다시 온 분들도 계신지, 차별을 견디면서까지 미국 유학을 한 것에 회의를 느낀 사례는 없었는지 궁금하다.
국내에서 지방대를 나오시고 미국 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따신 분이 있는데요. 이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한국이 더 차별적이라고요. 한국 사회가 차별적이죠. 그분만 하더라도 지방대 출신이라는 게 국내에서는 걸림돌이 되었어요. 1급 체제에서 소수의 몇 개 대학을 나와야 하는 거죠. 물론 미국에도 인종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학식이 높을수록 인종 차별에 대해서 민감한 거예요. 표면적으로는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봐야죠. 한국에서 차별이 너무 심해서 미국에서 사는 게 낫다고 말하시더라고요. 오히려 그런 분들이 대다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지배받는 지배자김종영 저 | 돌베개
이 책은 미국 유학파 엘리트들이 학계와 기업에서 어떻게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그 기득권을 유지하는지를 탐색한다. 미국 유학파 엘리트가 한국과 미국 사이에 어떤 상황과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분석하고, 그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규명한다. 이를 통해 학벌사회의 최상위에 있는 한국 엘리트 지식인 집단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밝힌다.
[추천 기사]
- 제주를 낭만적으로 돌아다니고 싶다면
- ‘기승전고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
- 무라카미 하루키 씨, 고통이란 무엇인가요?
- 타이베이에는 24시간 문을 여는 서점이 있다
- 인류 역사를 뒤흔든 소금, 모피, 보석, 커피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