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의 시인
성윤석 시인과는 사적인 친분이 전혀 없다. 그 흔한 문단 술자리에서조차 마주친 적이 없고 문단의 선후배들로부터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기억이 없다. 나중에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그는 애시당초 (그와 내가 속해 있다고 짐작되는) ‘문단’이라는 공적 무대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시인이었으니까. 그는 우르르 몰려다니는 패거리의 일족 속에 있기를 거부했던 것.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시인을 내가 무슨 수로 만날 수 있었겠는가.
위에서 묘사한 아웃사이더의 이미지와 함께, 그의 시편과 산문들을 꾸준히 따라 읽으면서 나는 그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우리가 일찍이 합의한 시인의 어떤 경지를 확보한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점점 확신이 되어갔다. 어떤 시인에게 확신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데 예감이나 짐작에 불과했던 내 생각이 점점 확신으로 단단해져간 것은, 그가 ‘실패하는 데 성공한 시인’인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부터다. 실패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 지극히 주관적인 편견일지 모르지만, 아니 확실히 그렇겠지만, 나는 그것이 오늘날 시인에게 요구되는 매우 핵심적인 요건이라고 믿는다. 모든 시인이 성공한 시를 써야 하고, 그것을 지향한다면 시는 빛나는 목소리를 잃고 하수구에 처박힐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시대의 성공만큼 비루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시는, 가장 실패한 방식으로 타락한 시대를 증거하면서 자기회복과 갱신의 가능성을 실험해야 하는 것.
나는, 성윤석이 바로 그런 실험을 꾸준하게 해오고 있는 시인이라 생각했다. 내가 그를 만나고 싶은 이유 역시 여기에 있었다. 알려진 것처럼 시인 성윤석은 좀 특이하고 예외적인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화학’에 미쳐, 실험실을 만들어놓고 수많은 화학물질들을 조합해 신물질을 만들어내는 일에 매달렸다. 화학이나 실험은 그의 전공이 아니다. 그는 문과대 국문학과 출신이다. 더군다나 그는 20대 중반에 이미 등단을 하고 인상적인 첫 시집을 상재한 장래가 촉망되는 시인이었다. 그런 그가 시에 거리를 두고 삼십대 중반 이후의 삶을 실험에 바쳤다는 전기적 사실은 그가 지향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살필 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실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짐작했던 것을, 꿈꿔왔던 것을 실제로 실행해보는 것이다. 당연히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성공을 예정한 실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험이라는 의미 속에 이미 수백 수천 번의 실패가 내장된 것이다. 그 실패가 실험의 의미를 훨씬 공고히 하는 건 물론이겠지. 더욱이 분자식이 다른 수많은 화학물질을 조합하는 일이란, 연금술을 통해 정금을 얻어낼 기적적인 확률만큼이나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신물질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고, 특허 출원을 했으며 대기업 연구원, 사업가들과 업무 협의를 위한 미팅까지 하기에 이른다.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성공이 바로 눈앞에 있었던 것. 그러나 암전.
작년에 출간된 성윤석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멍게』(문학과지성사)는 여러 면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이 인상적인 가작의 수준을 보여주기도 했거니와 텍스트 속에 개입된 물리적 조건이나 개인적 사연이 어떤 드라마틱한 구조를 보여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예의 독자들은 『멍게』의 시인 성윤석이 화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벤처회사를 창업해 성공신화를 써내려가다가 투자자들과의 이견 차이로 급전직하한 이력에 관심을 가졌다.
사업 실패 후 말 그대로 가산을 탕진한 그는 2013년 5월 자신이 20대를 보낸 곳이면서 처가의 본거지인 마산으로 내려온다. 마산어시장에서 수산물도소매를 하고 있는 장인장모를 도와 잡부로 일을 하기 위해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14시간 이상을 일해야 하는 고된 노동의 시작이었다. 사실, 그의 전기적 이력을 보면, 이것이 같은 사람의 생애에 기록된 사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체험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신문사 기자로, 시청 공보과 소속 공무원으로, 그리고 화학기술자와 창업자로, 서울시립묘지 관리인으로, 그리고 어시장 잡부로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어떤 가공할 현장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시인 어시장의 잡부가 되다.
그를 만난 건, 본격적인 무더위가 조금씩 본색을 드러내던 7월 초 마산어시장에서였다. 우리는 벌건 대낮에 소줏잔과 장어구이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환한 바다를 등지고 앉은 그의 얼굴이 더욱 구릿빛으로 붉게 물들어보였는데, 그 붉은 목소리의 얼굴이 내게는 매우 주술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먼저 나는, 그의 시업의 동력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공백을 거뜬히 뛰어넘는 그 가공할 점프력 말이다.
김도언 : 선생님은 1990년도에 등단하셨는데, 이제 햇수로 25년이 된 거잖아요. 25년 동안 공백기도 있었지만 선생님이 시인이라는 자의식을 놓치지 않고 작년에 세 번째 시집 『멍게』를 내셨어요. 시인으로서 꾸준히 시적 자의식을 버리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추동력이랄까요. 25년 동안 시인으로 살아오게 한 힘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성윤석 : 나는 사실 시인으로서의 삶보다 생활인으로서의 삶에 더 몰입을 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시인으로서는 공백이 있었죠. 원래 나는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걸 좋아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게 사업이든, 일이든, 문학이든 무언가 혼자서 몰입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걸 좋아했어요. 나는 아버지의 삶과 비슷한 삶을 살았는데, 사업을 크게 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아주 어릴 때는 식모가 세 명이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집에서 살았어요. 그러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쭉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래서 나는 가난에 대한 개념이 없어요. 없는 집 장남이지만, 없는 집 장남의 울분, 이런 게 없었어요. 사업도 재벌 3세나 꿈꿀 수 있는 그런 사업을 했었죠. 돈을 벌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소재 자체를, 세상을 완전히 바꿔보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게 무엇이든 그런 일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시로서는 그런 일을 하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동안 시를 버렸어요. 그런데, 삶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적인 것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 오더군요. 그러니까 내가 시에서 멀어지고 달아나려고 해도 시가 어느 순간만 되면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아요. 사실 내가 쓴 시들은 모두 체험과 인식이 부딪치는 순간에 걸러진 것들이거든요.
김도언 : 그러면 선생님 말씀은 25년 동안 시인의 자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동인이 따로 있다기보다는 어떤 우연에 기댄 외부적인 상황이나 조건이 시를 잊고 살만하면 또 건드리고 그런 거였네요.
성윤석 : 네 그렇죠. 이곳에 와서도 그랬고요. 마산에 내려와서는 어떤 선배가 한 분 있는데, 그 분이 고등어 이야기를 하면서 월명기(月明期, 달이 밝아 집어등 효과가 떨어져 고등어잡이를 쉬는 시기.)에 대한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그게 어떤 시적 환기를 가지면서 다가오더라고요. 그래서 시를 썼고 그걸 <세계의문학>에 발표했고, 그게 다시 시로 돌아오는 계기가 됐죠.
그의 말이 오롯이 이해가 된다. 여타의 지나치게 모범적인 시인들처럼 그가 시종여일하게 시에 매여 지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그가 벌여놓은 수많은 삶의 전선들이, 그 전선이 거느린 풍경의 낙차가 그가 시의 현장에 부재했었다는 명백한 알리바이가 된다. 그는 향리에서 지방신문 기자와 시청 공보과 소속 6급 공무원으로 지내다가, 1999년 서울에 올라와 교육출판 회사에 취업을 하지만 그것이 문학적 삶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엔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업을 해보겠다는 셈속이 있었던 것. 화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바이오 벤처사업이 그것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세상의 구조를 바꾸겠다는 열정 하나로 말이다. 하지만 사업은 부침이 심했고 그 와중에 그는 생계를 위해 서울시립묘지 관리인으로 취업해 일한다. 그 체험이 녹아든 시집이 바로 2007년 출간된 그의 두 번째 시집 <공중묘지>이다. 그로서는 다시 시로 유턴했던 셈. 그런 그가 12년 동안 몰입했던 화학사업을 완전 정리하고 시흥 화학단지를 떠나 마산으로 내려간 것이 2013년 5월의 일이다. 그는 자칭 어시장의 잡부로서의 삶을 시작하는데 미친 듯이 시가 써지더라는 것이다. 다시 시로의 환향. 그는 그해 5월부터 8월까지 시를 쏟아냈는데, 그 시편들은 고스란히 『멍게』에 수록됐다.
김도언 : 『멍게』에 실린 시편들은 3개월 정도에 쓰인 거라고 들었어요. 시집 『멍게』에 얽힌 이야기 좀 해주세요. 상당한 주목을 받았잖아요.
성윤석 : 네, 이곳에 내려와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열네 시간씩 일하는 동안 이 공간 자체가 새롭게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여기에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과 어울려서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듣다 보니까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거예요. 사실 마산이라는 도시나 어시장은 예전에도 자주 왔던 곳이거든요. 신문사 기자할 때 취재하러도 많이 왔었죠. 그런데 그때 시장을 바라보았을 때랑은 달리 보이는 게 있었어요. 그때는 수족관 밖에서 봤다면, 이제는 수족관 안에서 수족관 안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는 거예요. 하나의 돌무덤, 하나의 풀, 금붕어, 그런 입장이 되어서 보게 되더라고요. 그땐 개인적으로 정말 힘든 때였어요. 이런 일을 한 번도 안 해봤고. 그런데 그런 낯선 물리적 조건과 체험에서 전혀 생각도 못했던 눈으로 사물들을 보게 되니까 자연스레 시가 나오더라고요.
반골의 상상력과 태도
한 사람의 생이 갖는 물리적 체적을 생각할 때, 확실히 그가 경험한 삶의 양과 질은 모두 일반적인 평균치를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표정과 말 속에서는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단단하고 야무진 주체적 의지와 열정 같은 것이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데, 나는 도대체 한 사람의 기질이란 것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그에게 타고난 반골성 같은 게 있다는 것을 나는 그의 산문들을 읽으면서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는데, 직접 나누는 대화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질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성윤석 : 스물다섯 살에 등단을 했을 때, 남들은 일찍 된 거라고 하지만 저는 굉장히 늦은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스물한 살에 부산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는데 집으로 전화가 왔대요. 저는 야간 노동자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는데, 어머니로부터, 한 단어만 고치면 당선작으로 올리겠다는 전화가 신문사로부터 왔었다는 얘길 들은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 다시 전화 오면 냅두라카이소” 그렇게 말했죠. 그런 자존심이 있었어요. 저는 후배나 지망생들한테 그런 건 혹독하게 이야기해요. 절대로 타협하지 말고 네 자존심을 지키라고.
김도언 : 선생님 말씀은 자신만의 길을 곧장 갈 때, 자신만의 시를 쓸 수 있다는 거죠. 기웃거리지 말고, 곧장 갈 때. 아무튼 선생님은 독립심이나 반항심 같은 게 있으셨네요.
성윤석 : 이런 일도 있었어요. 고 3때 집이 너무 기울어 대학을 포기했었어요. 근데 고3 담임선생님이 너무나 돈만 밝히는 분이어서 내가 그걸 한번 엎어가지고 교무실에 끌려갔어요. 그 뒤로 제가 야구방망이로 학교 유리창을 다 깨고, 우리반 애들이 저를 위해서 운동장에 나가서 담임선생님 물러나라고 데모를 하고 그랬어요. 그때 내가 굉장히 간이 컸던 것 같아요. 별명이 ‘온몸이 간’이었거든요. 하하.
김도언 : 그런 반골기질은 어디서 나온 건가요?
성윤석 : 그건 아버님한테서 나온 것 같아요. 아버님이 일제 소학교를 다녔거든요. 학교에 불을 질렀어요.
부계혈통인가. 자, 그러면 그토록 자존심이 오롯한, 다분히 반골기질까지 갖춘 시인이 과연 어떤 태도로 문학을 해왔는지를 들어봐야겠다. 그는 한때는 벤처사업가로, 묘지관리인으로, 그리고 지금은 어시장 잡부의 목소리로 위장해 틈만 나면 문학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지만, 나는 그의 문학적 태도가 우리 시대에 얼마나 돌올한 것인지를 기필코 확인해야만 한다. 그것이 인터뷰어로서, 내가 의도하는 최소한의 목적이니까. 이 최소한의 가능성 안에서 이 시인의 마땅한 소여가 증명된다면 이 어찌 아니 기쁠 것인가.
김도언 : 선생님이 등단하신 년도가 1990년인데 저는 등단 년도가 매우 상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80년대적인 풍속이나 정서가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문학적인 감수성이나 이런 데도 80년대적인 분위기가 여전히 강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선생님의 첫 번째 시집을 보면 그런 80년대적인 정서나 풍속을 나름대로는 극복을 하고자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매우 일상적이고 미니멀한 세계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개인적으로 상당히 신선하게 읽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시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신 1990년대적인 의미를 선생님은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선생님의 자연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삶이 1990년대에 시작되었으니까요.
성윤석 : 맞아요. 그 당시에는 80년대적인 게 많이 남아 있었죠. 저도 1학년 때는 데모를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노동시를 썼었고요. 노동해방문학 이런 걸 많이 했죠. 그런데 대학 1학년 때 투고를 했는데 그게 최종심에 올라가더라고요. 시에 대한 어떤 자각 같은 게 일어났죠. 그 당시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김종우 형이랑 다른 형들이랑 해서 우리끼리 사화집을 내려고 준비도 했어요.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요.
김도언 : 그러니까 민중적인 세계관이 있으셨던 건데, 그걸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극복했다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는데.
성윤석 : 그런데, 어느 순간 노동문학이라는 게 너무 뻔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똑같은 목소리고. 그 한 목소리에 다 갇혀버리는 거죠. 거기에서 저만의 고유한 무언가를 보여줄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 당시에 다른 차원에서 요즘 유행하는 젊은 시인들의 패턴하고 비슷한 것이 반복이 되었던 거예요. 그런 게 싫더라고요. 나는 전형적인 걸 정말 싫어하거든요. 나는 똑같은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 이런 생각에서 나만이 쓸 수 있는 시를 깊이 고민하고 습작을 했죠. 그리고 등단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문학주의적인 출판사였던 문지에 계시던 이인성 선생님이 제 시를 보고 불러주신 거예요. 그때는 변방에서 좋은 글을 쓰는 시인이나 작가들을 찾아보고 발굴하는 눈밝은 선생님들이 계셨어요.
김도언 : 아, 그래서 첫 시집이 문지에서 나오게 되었군요.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90년대에 중요한 시집이 많지만, 저는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는 꼭 들어가야 한다고 보거든요. 선생님의 의식 속에 80년대의 정서와 절연하려는 게 있으셨어요?
성윤석 :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었고. 저는 제 독자가 단 열 명일지라도 다른 시인과 구별되는, 스스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러려면 시집을 계속 내야 하는데, 3년 터울, 5년 터울로 내야하는데 저는 그러지 못했고, 문학을 떠나 있었죠. 그러 면에서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이후 저는 시인으로서 실패한 거죠. 왜냐하면, 극장과 소도시를 떠나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갔잖아요. 그런 상황이 당황스러웠고 이렇게 된 바엔 사업만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했던 거죠.
김도언 : 그러면 선생님은 90년대적인 특질이나 90년대적인 새로움을 보여주고 싶다고 의식했다기보다는 80년대적인 상투성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선생님 작품에 자연스레 담긴 거라고 보여지는데요. 선생님의 시는 공간, 장소로부터 많은 영향과 지배를 받으신 것 같아요.
성윤석 : 맞아요. 나는 내가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선 못 쓰겠더라고요. 거기 가서 실패도 하고, 모멸감을 겪고, 다양하게 경험을 해야, 무언가가 걸러지더군요. 가보고 싶은 공간이 아직도 많이 있죠.
실패의 연금술사
실패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툭툭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실험실의 실패한 연금술사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어시장 한복판에서 작업복을 갖춰 입고 자신이 체험했던 세계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에 의하면, 자신이 가보았던 곳, 자신이 경험하고 감각해본 것, 다시 말해 자신이 몸을 던져보았던 것들이 자신에게 들려준 목소리의 무늬들이 시가 되더라는 것이다. 사실, 노동 공간의 체험이 문학적 진실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얘기는 새로운 것이 못된다. 우리는 지난 시대, 그런 권위적 교술을 어지간히 들어왔다. 하지만 체험을 얘기하는 성윤석의 목소리엔 그런 권위가 들어 있지 않다. 타자를 교화하고 가르치기 위해 혹은 보다 많은 경험적 감각을 지배적인 우월감으로 치환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만큼 자기 자신의 경험을 비루하게 왜곡하는 경우는 없다. 노동의 경험이 순일한 것이라면, 그것은 일단, 그 노동의 주체를 가르쳐야 하지 않겠나. 실패하는 데 성공을 해본 성윤석은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세속적인 성공이 낭만적으로 신화화되는 동안 점점 타락하고 공소해지는 세계의 초라함이 그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
김도언 : 선생님이 쓰신 칼럼을 제가 읽었는데, 어떤 글에서 ‘소외의 즐거움’에 대해서 말씀하셨더라고요. 문단의 줄서기 행태에 대해서도 많이 비판을 하셨고. 그런데 지금 이 21세기 적인 자본이 거의 완벽하게 우리 일상을 구속하고 지배하는 환경에서 이런 소외라는 게 이상적으로 관념화되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소외를 실천하기도 어렵고. 소외가 관념뿐인 가치일 수도 있잖아요. 시인도 인간이니까 외롭고 고독한 걸 오래 못 견디니까. 그럴 때, 자기 소외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나 태도가 있을까요? 소외는 분명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를 소외시키는 능력.
성윤석 : 나는 자기가 세상을 보는 눈을 가졌다면 긍지가 생겨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드러내놓고는 할 수 없지만 자부심이 필요할 것 같아요. 동료작가들을 보면, 문학상을 받는 친구들을 보면, 저는 속으로 그게 그런 친구들한테 독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는 거예요. 문학상 좋죠. 돈도 생기고. 그렇지만 우리가 길게 보면, 요즘 오래들 사는데 오래오래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써야 하잖아요. 그런데 일찌감치 제도권 안에 들어가서 길들여지면 자기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겠죠. 저도 솔직히 상을 받으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한두 번은 받을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어디서 상을 주겠다는 말이 나오는 게 그게 사실은 ‘이 상 받고 내 꼬붕 해라’ 이거거든요. 그럼 저는 욕을 해버렸어요.
김도언 : 자기 자신에 대한 존엄 같은 거네요.
성윤석 : 그런 거죠. 위엄 같은 건데요. 그런 게 없이 어떻게 자기만의 한 세계를 가방이든 자루든 담아서 던져놓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게 의문이었어요. 나는 지방 문단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폐해를 많이 보았는데, 여기 와서 문자도 몇 번 보냈어요. 모 교수한테.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난리 났죠. 자기가 여기선 왕인데. 그런데 이제는 나도 나이도 들었고 예전처럼은 못하겠어요. 젊었을 때는 원고료 안 줄 거면 청탁하지 마라부터 해서 제가 싫은 소리를 많이 했거든요. 그런 자존심은 있어야 된다고 봐요. 그게 당대에 평가를 못 받는다고 해도. 그러면서 계속 자기갱신의 연습을 하는 거죠. 죽을 때까지 연습만 하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시를 쓰겠다고 하면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하거든요. 사실은 시집을 많이 내는 것도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자본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김도언식 유머가 있잖아요. 그리고 성윤석식 유머도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유머와 기품을 잃지 않고 살면 되지 않을까요. 난 후배 시인들이 너무 패턴화된 삶을 지양하고 다양한 길을 갔으면 좋겠어요. 꼭 그렇게 권력을 움직여서 돈을 벌고, 밥벌이를 하고, 시를 쓰고 이게 아니라 좀 다른 쪽 직업도 가져볼 수도 있겠죠. 마지막 꺼져가는 588의 사무국장을 맡는다거나. 그런 체험들을 한 번쯤 해볼 수 있지 않은가.
김도언 : 재밌는 말씀이네요. 선생님은 첫 시집도 많은 주목을 받았고, 공백은 있지만 민음사, 문지에서 시집도 나오고 있고. 문단에서, 문학판 안에서는 성윤석 하면 좋은 시를 쓰는 시인으로 충분히 인정을 받고 있어요. 눈 밝은 독자들도 그걸 알고 있고. 그렇지만 일반적인 대중 독자들한테는 덜 알려져 있잖아요. 인지도도 높다고 볼 수 없고. 그러면 사람이니까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다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 현실적인 절망이나 고통이 있을 텐데, 그런 건 어떻게 극복하세요.
성윤석 : 장점과 단점이 있다고 봐요. 대중적으로 알려지면 제가 눈치를 보기 시작하겠죠. 그 단점이 장점보다 큰 것 같아요.
다시 시인의 바다, 그리고 실험실
그의 등 뒤에서 마산 바다가 게으르지만 당당하게 출렁인다. 이곳은 시인의 바다다. 어떤 시인이 생애를 짊어지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날것의 바다다. 이 바다가 지금 그에겐, 이를테면 최적의 실험실이다. 가장 첨단의, 가장 독한 약품냄새가 풍기는 구름이 떠있는 실험실이다. 그에게 바다의 의미를 다시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김도언 : 선생님, 『멍게』라는 시집을 보면 당연히 바다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 시집에 수록된 「책의 장례식」에 ‘아무 것도 숨길 게 없는 바다에 오기 위해 책을 다 버렸다’는 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바다라는 건 선생님 시에도 표현이 되어 있지만, 삶과 죽음, 희열과 고통을 다 안겨주는 삶의 터전인데. 그런데 이런 바다의 이미지는 사실 새롭다고 볼 수는 없잖아요. 선생님만의 바다는 과연 무엇일까요.
성윤석 : 그렇죠. 중요한 지적이네요. 나름대로 구분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나는 누구한테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통영은 관광의 바다고, 제주도도 마찬가지고, 부산도 마찬가지인데 마산은 정말 생활의 바다이거든요. 먹고 사는 바다. 풍경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고, 외지인들도 안 오고. 여기는 쌈마이들의 바다죠. 먹고사는 바다. 그래서 난 이곳이 참 각별해요.
먹고사는 바다를 지키는 시인과 벌써 인터뷰를 마쳐야 할 시간이다. 새벽 세 시부터 일을 해야 하는 그는 보통 밤 열 시 반쯤 잠에 든다고 한다. 그를 오래 붙잡고, 녹음기와 카메라를 치우고 술을 마시고 싶지만, 그래서 그의 내면을 풀어헤쳐놓고 싶지만, 바다의 엄정한 호위를 받으며 지켜내는 그의 질서를 내가 하루아침에 감히 깰 수는 없을 것이다. 아쉬운 대로 나는 그에게 자신의 시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시어와 대표작을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성윤석 : 아주 어려운 질문이지만 아무래도 ‘극장’ 같아요. 대표작 역시 「극장에서」를 꼽고 싶어요. 그런데 사실을 말하면 아직 대표작 못 쓴 것 같아요. 제 대표작은 한 5년 뒤에나 쓸 것 같아요. 지금까지 아주 급하게 다급하게 살아왔거든요. 시 역시 다급하게 썼죠. 그런데 대표작은 이렇게는 쓰고 싶지는 않아요. 충분히 퇴고를 하고 싶어요. 고쳐가면서 한 5년 뒤쯤에 한 1년간 사계절을 보내면서 시를 써보고 싶어요.
5년 뒤에, 그는 어떤 실험실을 가지고 있을까. 그 실험실이 어떤 것이든, 지금까지 그가 거쳐간 실험실만큼이나, 그곳 역시 그의 시를 돌올하게 성숙시키겠지. 새벽부터 시작된 하루 일과와 인터뷰까지 마친 그가 어시장 부두의 오토바이에 올라탄다. 그가 움직인다. 하루치의 실험을 끝내고 퇴근을 하기 위해서다. 그의 실험은 실패하는 데 성공하기 위해 지금도 맹렬히 진행 중이다. 빛나는 시행착오를 예비하면서.
성윤석은 196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1990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아프리카, 아프리카」 외 2편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공중 묘지』 『멍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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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언 | 이흥렬(사진)
김도언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여섯 권의 소설책과 세 권의 산문집, 한 권의 평전을 펴냈다. 지금은 문학적 관점을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 시각적 이미지 작업과 연계해 세계와 타자를 읽어내는 실험을 하고 있다. 좋은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통찰과 아울러 삶의 총체성에 대한 상상력과 감수성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https://www.facebook.com/doeon.kim.58
이흥렬(사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와 밀라노 IED 사진학과 졸업.
인물사진과 나무사진을 주로 찍고 있으며 최근의 작업은 '푸른 나무(Blue Tree) 시리즈이다.
https://www.facebook.com/yoll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