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못한 지 오래다보니 ‘러브쏭’을 들을 일이 없었다. 사랑을 주제로 한 곡이라면 어느 먼 별나라의 헬륨가스 방귀뀌는 소리로 들리는 나날이었다.
그딴 삭막한 마음으로 걷다가 나는 어느 닭발 가게 앞에서 오늘의 주제곡 이승철의
‘힘껏~ 안아줄게 널~’
이 노래에서 가장 핵심적인 그 노랫말이 귓구녕에 꽂히자마자 든 생각은 이랬다. 어우 힘껏 안아 주다 갈비뼈 으스러지면 안 아플까. 그러나 다음 순간, 발매된 지 몇 년 된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가 생생히 떠오르고 말았다. 일반인 프러포즈 이벤트를 이승철 엉아가 도와주는 내용이었다.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연출에, 무용수에 오케스트라에, 이승철 라이브 깜짝 등장에, 완전 미친 스케일을 자랑하는 프러포즈였다. 프러포즈 받는 여자도 울고, 하늘도 울고, 뮤비를 보던 외로운 나도 우는데 프러포즈 수락하고 둘이 끌어안고 키스하고 활짝 웃으며 끝나는 엔딩.
나는 무의식적으로 소리치고 말았다.
“으아 사랑하고 싶다...”
닭발에 양념을 바르던 아저씨가 나를 흘낏 쳐다보았다. 왠지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닭발엔 뼈가 없고 나에겐 연인이 없었다. 다음 순간 울분이 치밀었다. 아니 결혼하고 싶거나 연애하고 싶지만 사정이 있어서 안하고(못하고)있는 남녀들이 들으면 미치고 폴딱 뛸 것 같은, 이런 ‘위험한’ 음악을 길거리에 막 틀어놓다니! 게다가 거 승철 형님도 너무한 거 아니오? 딴 남자들이 앞으로 죽어라 머리 쓰고 마음 쓰고 신경 써서 프러포즈를 기획해도 이 뮤비를 본 여자들은 조금도 성에 안 찰 거 아닙니까? 어쩌자고 우리한테 이런 만행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나는 비분강개하며 닭발에 맥주를 잔뜩 사오고 말았다. (아래 뮤직비디오를 보시는 솔로남들은 이 심정에 공감하시리라 본다)
보컬의 신 이승철 하면 설명이 필요 없는 아티스트고, 말이 필요 없다보니 원고 분량을 채우기 곤란해 지금껏 안 쓰고 있었는데 닭발을 씹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얘기하고 싶은 추억이 떠올라버렸다. 사랑 얘기라 쪽팔려서 쓸까말까 고민하다 결국 써버린다. 이 칼럼은 애초에 음악과 추억의 찰떡연애 같은 앙상블로 기획되지 않았던가. 아니면 말고.
어쨌든
의문은 다음날 풀렸다. 관광은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오후가 되자 또 그 술집에 찾아갔는데 그녀는 어떤 선량해 뵈지 않는 중국인 남자들과 중국어로 입씨름 하고 있었다. 양꼬치에 찡따오를 내놓으라는 건지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남자들이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한 남자가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자 그녀는 뿌리치며 항의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사이에 쓰윽 끼어들어 맥주를 주문했다. 그녀는 내 주문을 핑계로 그들로부터 벗어나 카운터로 돌아왔다. 그녀의 눈빛이 조금 서글퍼 보였다.
“문제가 있나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녀는 무표정하게 페로니 한 잔을 내밀었다. 나는 사랑이나 낭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그 중국인 남자들 옆 테이블에 굳이 앉았다. 내가 뽁뽁이 완충재가 되길 바랬다.
베로나를 떠나기 전날 나는 또 그 바를 찾아갔다. 사무적인 맥주 주문 외엔 사흘 동안 한 번도 하지 못한 말을 그제야 걸었다. 준비한 주제와는 달리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전 내일 베로나를 떠나요.”
“내일 페로니를 달라구?”
“아니 떠난다고요.”
“그래요?”
그녀는 시큰둥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았다. 내게 관심 없었구나. 떠도는 여행자 주제에 어쩌라고 그런 바보 같은 멘트를 날렸나. 씁쓸한 술을 삼키고 있을 때 그녀가 내게 접시 가득 감자칩을 담아 왔다.
“주문하지 않았...”
“이별 선물.”
그녀는 최초의 그 신비하고 깊고 맑은 눈으로 찡긋 웃었다. 요즘 유행하는 허니버터칩은 그 감자칩에 비하면 별나라 헬륨가스 방귀뀌는 맛임에 틀림없다. 나는 감자칩을 최대한 천천히 먹고 그녀의 선술집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을 아끼고 싶었다. 그리고는 사랑이 그렇게 쉽나 베로나, 사흘 만에 떠나면서 사랑에 빠지면 어떡하나 베로나 어쩌고 라임도 안 맞는 개드립을 날리며 한 없이 걸었다.
그 당시 최신곡이었던
사랑해 그 말은 무엇보다 아픈 말 숨죽여서 하는 말 이젠 하기 힘든 말
아무튼 이승철 님의 깊고 짙고 간절하고 감미로우면서도 바싹하고 부드러운 감자칩 같은 목소리를 당대에 들으며 살 수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은 사랑에 빠지려고 사는 것 아니었나. 그것 아니면 인생에 무슨 주제가 있단 말인가. 대체 무엇에 생애를 바쳐 몰두해야 한단 말인가. 아프더라도, 하기 힘들더라도 다시 사랑에 빠져야 하고 숨죽여서 간절히 고백해야 하는 거다. 솔로들에게 이 곡은 그런 느낌을 다시 일깨우는 아름다운 자극이 아닐 수 없다.
PS 베로나에선 생맥주만 마셔 사진이 없으니 이승철 님의 곡을 라디오 생라이브로 한 번 더 들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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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jehovah511
2015.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