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다시 삶 <스틸 앨리스>
기억이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기억의 성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감촉, 행복했던 날의 냄새, 그리고 달콤한 미각이 포함된다.
글ㆍ사진 최재훈
2015.05.04
작게
크게

1.jpg

 

기억이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기억의 성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감촉, 행복했던 날의 냄새, 그리고 달콤한 미각이 포함된다. 게다가 차곡차곡 쌓아온 사회생활과 경력 모두가 오롯이 내 머리 속의 기억에 의존한다. 그러니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어떻게 펼쳐질지 모를 미래까지 한 번에 잃어버리는 것이다. 영화 <스틸 앨리스>는 조발성 알츠하이머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그간 쌓아온 시간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볼 도리가 없는 주인공 앨리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과거와 가족이 누구인지 잃어버리는 끔찍한 현실에 앞서, 앞으로 무엇을 더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자각이야말로 잔인한 현실이다. 게다가 기억이 사라지면서 나 자신의 존재도 함께 휘발되어버릴지 모른다.

 

저명한 언어학 박사 앨리스(줄리앤 무어)는 어느 날 강의를 하다가 문득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 경험을 한다. 조깅을 하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두뇌를 가졌던 한 여자의 머릿속에 지우개가 생겼다. 치매를 앓기에 너무 이른 50세, 그녀도 그녀의 가족도 닥친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치매라는 다소 흔한 소재를 사용하긴 했지만, <스틸 앨리스>는 보편적 사회문제를 제기하기보다 갑작스런 병을 앓게 된 한 여인의 개인적인 삶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그러기에 한 여인과 가족의 비극을 신파로 그리지 않고, 병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려는 작은 감정의 변화에 집중한다. 줄곧 감정이 과잉되지 않게 절제하고, 애써 눈물을 강제하지도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호들갑을 떨지 않는 줄리앤 무어를 만나 영화 속 앨리스는 감정이 과잉되지 않게 절제하고, 애써 눈물을 강제하는 법도 없이 아픔을 꾹꾹 눌러 담는다. 앨리스의 비극은 줄리앤 무어의 몸을 빌려 더욱 처연해진다. <달콤한 열여섯>으로 선댄스에서 인정받은 리처드 글랫처 감독은 이야기의 중심에 줄리앤 무어의 격조 있고 우아한 이미지를 투영시켰다. 어떤 순간에도 강인하게 버틸 것만 같은 줄리앤 무어의 이미지에 앨리스의 알츠하이머를 덧입혀 그녀를 무너뜨린다. 자신이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면서 앨리스가 보여주는 당혹스러운 눈빛은 어쩌면 쓸쓸한 한 여성의 삶을 말하는 이 영화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 앨리스는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좌절의 상태에 머물러있지 않는다. 줄리앤 무어가 연기하는 한 여인의 불안과 슬픔의 정서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계속 다잡아야 하는 마음의 용기와 결심의 정서는 줄리앤 무어의 연기와 함께 앨리스의 내면을 구축하는 또 다른 힘이다. 앨리스는 영화의 제목 그래도 ‘여전히 앨리스’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스스로를 독려한다. 알려진 대로 <스틸 앨리스>는 (故) 리처드 글랫저 감독의 유작이다. 그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도 끝까지 촬영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있더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이란 너무나 당연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화두를 글랫저 감독은 마지막까지 몸소 살아낸 셈이다.

 

3.jpg

 

 

‘여전히’ 줄리앤 무어

 

배우의, 배우를 위한, 배우에 의한 영화 A가 있다. 대부분 배우의 이미지와 연기력이라는 외줄 타기에 의지한다. 캐스팅이 성패의 관건이다. 어떤 이야기라도 믿어보게 만드는 배우 B가 있다. 푹푹 빠지는 이야기의 빈틈과 노련하지 못한 연출 사이를 날아다니면서, 스스로 디딤돌이 된다. 그렇다면 A라는 영화에 가장 필요한 것이 B라는 배우의 캐스팅일 것이다. 영화 <스틸 앨리스>와 줄리앤 무어의 만남처럼…….2000년 <매그놀리아>, 2009년 <세비지 그레이스>, <클로이> 등 영화 속 줄리앤 무어는 줄곧 불안과 음울한 기운을 가진 캐릭터를 연기했다. 놀라운 것은 신경쇠약 직전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그녀는 단단하게 서서 크게 움직이거나 절규하지 않는다. 감정의 소동을 단단하게 딛고 선 여인의 복잡한 심리를 사소한 움직임과 눈빛으로 전달한다. 캐릭터가 느끼는 내적 갈등은 그녀를 덧입고 흔들림 없이 마지막 절정의 순간까지 도달한다. 2015 아카데미는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스스로 체화하여 ‘앨리스’ 자체가 된 줄리앤 무어에게 여우주연상을 선물했다.

 

<헝거게임 : 모킹제이> 등 블록버스터에도 흔히 그녀를 볼 수 있지만, 줄리앤 무어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오롯이 배우의 연기만으로 이야기가 이어져 나가는 작은 소품이다. 가장 인상적인 많은 영화들 속에는 늘 줄리앤 무어가 있다는 사실, 또래 여배우들은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을 스스로 쌓아온 것이다. 신인감독 토드 헤인즈의 저예산영화 <세이>와 막 데뷔한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부기 나이트>에서 줄리앤 무어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며, 작품을 보는 그녀의 안목을 새삼 느끼게 만든다.

 

2.jpg

 

 

도서 『스틸 앨리스』 혹은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하버드대 신경학 박사 출신의 리사 제노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를 직접 겪으면서 『스틸 앨리스』라는 동명의 원작 소설을 집필하였다. 31개국에서 출간, 2,1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이 소설은 철저한 소사와 개인적 경험이 합쳐져 감동을 주는 소설이다. 리사 제노바의 원작의 영화화를 열정적으로 지지했고,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오른 영화 속 공연 장면에서 관객으로 특별출연하기까지 했다. 한국에서는 원제 『Still Alice』가 아닌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라는 다소 감상적인 제목으로 출판되었다가, 영화의 개봉과 함께 개정판 『스틸 앨리스』가 출간되었다.

 

 

[추천기사]


- 마음의 지도를 그리는 여행 <와일드>
- <백설공주 살인사건> 세 치 혀와 세 마디 손가락이라는 흉기
- 이기적이고 거친 박동의 오르가즘 <위플래쉬>

- 과잉은 결핍이 꾸는 꿈 〈아리아〉
- 영리한 반전, 오차 없는 감동 레시피 <장수상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영화 #최재훈의시네마트 #스틸앨리스
0의 댓글
Writer Avatar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