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밀러. 『북회귀선』 『남회귀선』 등 거침없는 성적 묘사로 외설 시비를 불러일으켰던 이 작가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운 투사이자, 위대한 승리자로 명성을 떨쳤다. 그런 그에게도 독특한 작품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우화였다. 광대를 주인공으로 한, 화가인 레르낭 레제의 제안을 받아서 썼던 소설이 『신의 광대 어거스트』였다. 이 책은 2001년 『사다리 아래에서의 미소』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돼 절판됐다가 최근 개정판이 나왔다.
“이 소설은 내가 이제까지 썼던 모든 소설들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이라 할 만하다. 이 글은 페르낭 레제가 그린 광대와 서커스에 대한 40개의 삽화를 위해서 쓰였다.”(100쪽)
지난 3월 12일의 봄밤은 특별했다. 『신의 광대 어거스트』의 개정판 출간 기념으로 서울 혜화동의 카페 마리안느에서 『신의 광대 어거스트』 북콘서트가 열린 것. 옮긴이 김수영 교수(한양여대 문예창작과)와 그린이 이제하 작가(시인, 화가) 등이 독자들과 함께 책에 얽힌 이야기뿐 아니라 노래와 맥주 등으로 봄밤을 채웠다. 소박하고 작은 자리였지만 풍류와 격조를 지닌 사람들의 봄심이 공간에 널리 퍼졌다.
김수영, 『신의 광대 어거스트』를 만나다
옮긴이 김수영 교수가 먼저 이야기를 풀었다. 그가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1990년대 독일 유학 중이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잘 안 풀려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하던 일을 하게 된다. 지루하고 앞이 안 보이는 공부를 하다가 이 책을 추천받았다. 독일어로 읽기 시작했다. 헨리 밀러가 미국에서 쓴 책인데, 미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당시 그의 소설은 판매금지가 됐을뿐 아니라 문학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했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북회귀선』과 다른 수채화 느낌의 동화임에도 반응을 못 받았다.”
그랬던 책이 유럽에서 번역 출간됐는데 프랑스, 독일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큰 성공을 거뒀다. 관계자들도 놀랐다. 당시 독일어판은 미국판과 달리 호안 푸니에트 미로가 그림을 그렸었는데, 굉장한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이 소설은 미국 본토에서보다 오히려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더욱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내면서, 그의 다채로운 문학 세계를 구성하는 주요한 한 작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120~121쪽)
김수영 교수는 이 책을 옆에 놓고 논문의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마다 읽었다. 그러다보니 독일어판을 외우다시피 했다. 마침 민음사에 근무하는 아는 사람과 연결됐는데, 이 책을 번역출간하자는 제안을 받다. 그렇게 번역을 하면서 그는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 영어판과 독일어판을 2개를 놓고 번역을 했는데, 두 판본이 달랐다. 독일어판에는 원문에 없는 문장이 곳곳에 있었다. 즉 독일어 번역자가 화장을 한 것이었다. 그는 독일어판이 미국에서보다 많이 팔린 이유로 현지화 된 번역도 일정부분 기여를 한 것 같다고 봤다. 번역에 대한 다른 관행을 접한 계기이기도 했다.
“독일은 오리지널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다. 번역작업이 당혹스러우면서도 즐거웠다. 그래서 한국어로 출간을 했는데, 당시 편집자가 (많이 팔릴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역자로서 소망 같은 게 있었다(웃음). 당시 책이 나오자마자 조선일보에서 전면 기사를 실었다. 됐다! 됐다! 첫 책부터 많이 나가면 큰일 나는데, 이랬는데 책이 너무 안 나갔다(웃음). 이 책은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는 독자들에게 어필하지 못한 이유로 이야기 구조를 들었다. 이 책은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골목이 갑자기 오른쪽 왼쪽으로 틀고 왜 언덕이 나오는지 설명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짜여진 이야기를 안겨주는 구조가 아니라, 성기고 구멍이 많은 열린 이야기 구조라서 우리나라 독자들이 낯설지 않았나 싶다. 우리 독자들은 열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지 않다. 너무 꽉 짜인 이야기는 영화로 족하고, 책을 대할 때는 텍스트가 강요를 안 해서 해석과 감상의 자유가 있는, 감상자가 스스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거스트의 무대에는, 달, 사다리, 꿈, 음악, 조명, 서커스, 말, 마차, 동료, 관객, 사랑, 권력, 기쁨, 슬픔, 웃음, 눈물, 노동, 그리고 삶과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119쪽)
그리고 우리학교 출판사와 재출간을 놓고 이야기를 하게 됐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은 독자들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호안 푸니에트 미로의 그림 대신 이제하 작가에게 청탁을 했다. 2000년대의 실패를 딛고 일어설만한 무기였던 것. 독일판에 호안 푸니에트 미로의 그림을 선택했듯, 한국판은 이제하의 그림을 선택한 것.
“이 이야기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광대의 이야기지만 광대라는 정체성의 핵심은 본디 얼굴과 사람들이 봐주는 얼굴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 차이로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생각해 보자. 한편으로 누구나 다 광대여서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주변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웃음). 그 차이가 한편으로는 불행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 본래 모습대로 살아가는 게 가장 좋겠지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 사회적 삶의 구조다.”
김수영 작가는 한편으로 광대가 부정적인 요소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다치기 쉽고 금이 가고 상처받기 쉬운 우리 마음을 사회적 문맥 속에서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광대라는 것. 광대라는 정체성은 행복에 기여하는 측면도 있고 불행의 근본적인 구조라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한 그것이 어거스트라는 광대에게 잘 녹아 있다고 덧붙였다.
“누구나 하고 있던 일을 바꿔보기도 하고, 남들은 이해 못하지만 내부에서 끓는 다이내믹한 감정 속에서 격동을 겪는다. 광대도 안을 들여다보면 그런 것들이 다 들어있다. 이 책은 내가 경험한 일과 잘 맞닿아 있어서 좋아한다. 2001년 판본과 달리 충격적인 판매고를 올리면 좋겠다(웃음).”
노래가 있는 풍경
이어 이제하 작가가 등장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해외 판본에서의 그림도 좋았지만, 한국 독자들을 감안해 스토리라인에 맞게 그림을 그렸다고 부연했다. “헨리 밀러가 이런 동화를 썼다는 게 놀랍고 좋았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래서 신이 났다.” 이 작가는 곧 기타를 들고 봄밤에 어울리는 선율과 노래를 선사했다.
「떠도는 구름」이 첫 곡이었다. 어거스트의 입장에 맞는 곡을 선곡했다고 했다.
“나는 떠도는 작은 구름/ 하늘이 넓어 너무 넓어/ 잡을 수 없는 꿈을 따라/ 한없이 도는 작은 구름 (중략)”
이어진 노래는 「모란 동백」.
“세상은 바람불고 덧 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랫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해도/ 또 한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중략)”
노래와 풍류로 봄밤이 익어갈 무렵, 연극 <북회귀선>의 연출가였던 최강지 선생의 축하 인사말과 노래도 뒤를 이었다.
“나는 헨리 밀러를 무척 좋아한 사람이었다. 『북회귀선』 연극을 각색?연출한 사람이 나다. 내가 헨리 밀러에 미쳤던 것은 그의 천재성과 문학성 때문이었다. 많은 유형의 천재가 있는데 헨리 밀러는 끊임없이 방황하는 천재였다. 방황도 고상하게 하지 않고 자신을 막 던져서 했다. 『신의 광대 어거스트』는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다른 세상을 꿈꾸면서 자신의 마돈나, 로망, 인간으로서의 이상을 찾는 남자다. 자신을 조망하면서 쓴 책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나는 알바트로스가 아니다, 하루 세끼 곱창을 채워야 하는 가증스러운 인간이다,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이냐, 이런 것을 고민하면서 쓴 책이다. 헨리 밀러는 천재지만, 이 책에서의 천재는 번역가와 삽화가다.”
그리고 역시 노래. 줄이 끊어져도 작은 공간을 꽉 채우는 최강지 선생의 목소리가 봄밤에게 이렇게 건넨다. 와 이리 좋노, 와 이리 좋노, 와 이리 좋노. 절로 감탄이 나온다. 아, 좋다. 작은 공간은 봄밤으로 충만했다. 봄에는 꼭 이런 자리를 일부러라도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봄에 대한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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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광대 어거스트헨리 밀러 저/김수영 저/이제하 그림 | 우리학교
어른과 청소년이 함께 읽는 철학 우화. 참된 자아를 찾아 떠난 어느 광대의 이야기. 헨리 밀러가 "이제까지 썼던 모든 작품들 중에서 가장 특이한 소설"이라고 불렀던 이 작품은 밀러가 작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1948년에 발표된 것으로, 자신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대 어거스트의 이야기를 통해 참된 자아의 의미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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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