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문득 주말을 보내는 내 모습이 점점 오래 전 TV 드라마에서 봤던 상당히 ‘문제적인 아버지’모습과 비슷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가자고 졸라대는 아이들을 모른 척하고 주말 내내 소파나 침대에 딱 붙어 내리 잠만 자는 전형적인 산업화 시대 아버지 말이다. 산업화 역군이라면 요즘 한창 상영 중인 영화 ‘국제시장’에서나 봐야하는데, 얼마 전 딸에게 “엄마는 집에 오면 매일 잠만 자고”라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이 모든 것은 다 1/n 때문이다. 1/n은 부서에 사람이 이런 저런 이유로 나가면, 충원이 되지 않고 나간 사람의 일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1/n로 나눠져, 슬쩍 얹히는 것이다. 다른 직종, 다른 회사에 다니는 친구나 선후배의 경우도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하니 1/n은 우리 사회에서 진행 중인 상당히 평균적인 일인 듯하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처럼 이 끝없는 1/n 때문에, 이제는 좀 우아해질 법도 한 나이에 나는 주말마다 점점 더 문제적 아버지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그러니 얼마 전 발표된 정부의 보고서에서 200% 격하게 공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가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 1위는 tv시청이요, 유형으로 따지면 휴식활동이 첫째라는 결과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 역시 요즘 들어 왜 직장인이 주말이면 TV를 안고 사는지 절감하고 있다. 손 하나 까닥하기 싫을 뿐 아니라 머리를 조금도 쓰기 싫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지난 주말, 책장에서 필요한 책을 찾다 우연히 영국의 그림책 작가 레이몬드 브릭스의 그림 없는 그림책 『눈사람 아저씨』를 펼치게 됐다.
아이가 어렸을 때 그림책으로 또 그 유명한 애니메이션으로 숱하게 봤던 기억과 너무 청아해 쓸쓸한 느낌까지 들었던 OST를 떠올리며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는데, 한 장면에서 손도, 눈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눈사람 아저씨와 주인공 소년이 온통 새하얀 세상, 그 하늘 위를 날아가는 장면이었다. 늘과 땅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온통 하얀 세상, 그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말해주듯 점처럼 작게 그려진 눈사람 아저씨와 소년이 하늘 위를 말 그대로 자유롭게 날아가고 있었다. 파스텔 톤의 부드럽게 그려진 그림을 보며 나도 그렇게 하늘을 날고 싶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되어 혹은 눈사람 아저씨가 되어 하늘을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꽤 매서울 바람의 저항도 상당히 상쾌할 것 같았다. 그 장면을 잠시 동안 가만히 보는 것만으로 작지만 아주 순도 높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림책을 다시 책장에 꼽으며 이 한 페이지의 컷이 일상 속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작지만 꽤 강력한 환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의 위로 말이다. 우리 같이 하루 하루가 바쁜 생활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요긴한 짧은 순간의 휴식이다. 언제나 펼칠 수 있고, 아주 순식간에 그림의 세계로 즉각적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가질 수 있는 위로이다.
『눈사람 아저씨』는 1978년 영국에서 출간된 후 전 세계에서 그림책 고전으로 자리를 잡은, 모든 이의 마음을 사로 잡는 명작이다. 글 없이 부드러운 파스텔화로만 이뤄진 그림책에서, 눈이 오는 날 소년은 눈사람을 만들고 그날 밤 눈사람은 진짜 눈사람 아저씨가 돼 소년을 찾아온다. 그리고 눈사람 아저씨와 멀리 북극으로 떠나는 환상의 여행. 아이는 그 멋진 여행에서 돌아와 눈사람 아저씨와 따뜻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데, 그 다음 날 아침 눈사람은 말 그대로 눈 녹듯 사라져버린다. 그래도 소년의 마음속엔 눈처럼 녹지도, 눈사람처럼 사라지지도 않는 추억은 남아있겠지만 말이다.
일상이 팍팍할 때 이렇게 그림책을 펼쳐, 자기가 좋아하는 한 컷을 보는 것만으로 작은 위안을 받는다. 몸과 마음이 지치면 이상하게 감상적이 되곤 하는데, 그래선지 그럴 땐 그림책들 이야기에 왠지 콧 코끝이 찡해지기도 한다.
물론 그보다 더 좋은 것은 그림책을 책장에 꼽고, 그림책에서 얻은 아주 작은 위안의 힘으로 산책이라도 하며 몸과 마음의 리듬을 찾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집 주변 나무가 있는 산책길로 나가 걸으며 하늘을 한번 올려다 봐야겠다. 아무리 바쁘고, 일상은 고단해도,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겠느냐 생각을 하면서.
같이 보면 좋은 그림책.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글 그림의 『북극으로 가는 기차』 (한국 프뢰벨 주식회사)
아쉽게도 전집에 들어가 있어 단행본으로 볼 수 없는 그림책이다. 눈사람 아저씨와 매우 유사한 환상의 서사 얼개를 갖고 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침대에 누워 있던 소년은 집 앞에 기차가 멈춰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제목처럼 북극으로 가는 기차. 아이는 기차를 타고 북극으로 가서 산타 할아버지를 만난다. 오래전 산타를 믿지 않게 됐지만, 이 그림책 이야기만은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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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아저씨레이먼드 브릭스 글, 그림 | 마루벌
눈이 펑펑 오는 날 커다란 눈사람을 만든다면 얼마나 신날까? 그 눈사람이 정말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다면? 소년은 아침에 일어나 눈이 내린 것을 보고 눈 사람을 만든다. 눈사람은 소년의 초대로 집안을 살펴본 다음 소년과 눈사람 나라로 간다. 글자없는 그림만으로 되어 있어 아이들이 마음껏 이야기도 만들 수 있고 파스텔을 이용한 그림이 표정을 훨씬 살아있게 해준다. 아름다운 음악이 함께 있는 비디오 테이프도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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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1992년부터 일간지 기자로 일하고 있다. 딸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그림책 세계에 매료됐다. 그림책 『불할아버지』 어린이책 『알고 싶은 게 많은 꼬마 궁금이』 『1가지 이야기 100가지 상식』 등을 썼고,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 을 공저로 출간했다. 현재 문화일보 문화부에서 영화와 어린이ㆍ청소년책 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앙ㅋ
2015.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