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이란 감독과 최은희라는 배우가 있다. 이들은 부부다. 웬만한 사람들은 한 번쯤 그들 부부의 작품들을 극장에서 본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이들은 열약한 한국영화계의 토양에서 최초로 헐리우드에서나 지을 법한 규모의 영화사인 신필름을 세웠으며, 거기서 블록버스터 급 스케일의 작품들을 시도하고 또 만들어 냈다. 그 때문에 관객들은 <성춘향>, <청일 전쟁과 여걸 민비> 등의 스펙터클한 사극, 혹은 <빨간 마후라> 등의 (포르노 말고.) 박진감 넘치는 전쟁 장르물로 부부의 작품을 기억한다. 앞에서 거론한 작품들은 모두 60년대 초중반에 만들어 졌는데, 실제로도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가 영화적으로 가장 빛났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상옥 감독은 '작은 규모'의 작품들도 잘 만든다. 어째 좀 어울리는 것 같지 않지만. 한 때 몇몇 평론가들이 <우게츠 이야기>, <치카마츠 이야기> 등을 만든 미조구치 겐지 감독에 비유할 정도로 여성을 소재로 한 애절한 로맨스와 굴곡 많은 수난극을 만드는데 명수였다니까. 그는 당시 어려웠던 자신의 영화 제작사를 이런 장르의 작품들의 연달은 흥행성공으로 기사회생 했다.
1958년에 신상옥 감독이 만든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여성 수난의 '한국적인'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어느 모 씨가 손녀 같다는 이유로 여자 엉덩이 마음대로 만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다 이 방면에서 오랜 역사가 있어서 저리 당당하게 말한 거라고 하면 될까나.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첫번째. 법을 공부하는 여대생인 소영 (최은희) 이 자신의 학비를 대주던 조모의 타계소식을 듣는다. 그녀는 직접 돈을 벌고자 취직자리를 찾지만 가는 곳마다, 심지어 자신이 자취를 하고 있는 집에서까지 사장, 집주인(최남현) 등의 남자들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두번째. 그래서 기운이 죽 빠진 소영. 그런데 작가 지망생인 친구가 자신이 발견한 오래된 일기장을 보여준다. 국회의원인 최림 (김승호) 에게 버림받은 한 여자의 일기였는데, 그 여자의 딸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며 찾아가 보라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자본가들에게 추행을 당하던 소영은 결국 친구의 권유에 거짓으로라도 그의 딸이 되어보자고 결심한다. 세번째. 평소 자신이 버린 여인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던 최림의 호의로 소영은 정말 딸이 된다. 그녀는 열심히 법 공부를 해 정식 변호사가 되고,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법정에 불려 나온 한 여성 (황정순) 의 변호를 맡게 된다.
* <어느 여대생의 고백>을 찍으면서 최은희는 변호사를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몰라, 한국에서 처음 여성 변호사 일을 한 이태영 박사를 찾아가 그녀의 조언을 많이 받았다. 배우 최은희의 자서전인 <최은희의 고백>에는 이 작품의 연기 일화가 짤막하게 나온다. 그녀는 법정에서 변론하는 연기를 할 때 손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만년필을 손에 들었다. 그런데 시사회 때 작품을 보러 온 이태영 박사가 그 시퀀스를 보고 “법정에 와서 나를 본 일도 없는데, 어떻게 나랑 똑같이 했어? 나도 만년필을 들고 변론을 하는데.” 라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
감독으로서만 머물렀던 미조구치 겐지와 달리 신상옥은 감독과 제작자의 생각을 동시에 가지고 영화를 바라봤다. 그는 그 두 가지를 절대 놓치지 않은 성공적인 멀티 플레이어이기도 했는데,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특유의 기질을 잘 볼 수 있다.
신파를 자유자재로 변주하는 능력!
‘출신의 비밀’. 이제는 한국의 TV 드라마에서 빠지면 시원섭섭할 소재다. 그 소재를 이용한 선조 격에 해당되는 이 작품은 지금 봐도 상당히 신선하고 세련됐다. 사실 작품 속 주인공인 소영이 벌이는 행동은 TV 드라마에서 악역이 주로 이용하는 방식과 좀 닮았다. 악역들이 친딸도 아니면서 친딸인 주인공보다 먼저 선수 쳐서 부잣집에 들어가 패악을 부린 다음, 5~60회 되는 분량 내내 그 때문에 위기와 위기탈출을 반복하지 않던가. (주인공 말고 악역 얘기.)
물론 이 작품이 신상옥 감독이 직접 아이디어를 얻어서 만든 건 아니다. 그가 생전에 직접 쓴 자서전인 『난 영화였다』를 보면, 그는 이 작품을 프랑스 감독인 앙리 드쿠엥의 <배신>(1937) 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써 놓았다. 하지만 개봉된 해에 경향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는 ‘각색했다’ 라고 언급했기 때문에 정확히는 그 작품의 리메이크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 작품은 1시간 40분동안 한 여대생이 변호사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 법정물과 성장물로서의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동시에 그녀가 한 거짓말이 들키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도 같이 준다. 어떻게 보면 장기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게 하는 TV드라마와 달리, 영화. 그것도 단순히 감독의 의도뿐만 아니라 이걸로 돈까지 벌기를 간절히 원해 만든 영화에서 세 가지 주제를 조화롭게 버무리기는 쉽지 않다. 하나에 집중하는 것도 버거울 것이고, 잘못 다루면 어떤 주제 하나 뚜렷하게 다루지 못하고 소화불량으로 끝날 가능성도 높으니 말이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성장과 법정, 서스펜스라는 세 가지 다른 소재들을 ‘한국에서 여성이 살아가는 법’ 이라는 주제에 집어넣어 현명하게 풀어나간다. 가령 초반에 소영이 취직하고자 찾아간 회사의 남자들, 그리고 집주인에게 당하는 추행들은 이후 그녀가 마침내 변호사가 되어 한 여성살인범의 사연을 듣고 변호를 결심하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 와중에 그녀가 진짜 딸인지 의심하는 최림의 부인 (유계선)의 싸늘한 시선이 비수처럼 법정에 나설 때까지 지속된다.
딸이 맞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만 집중할 때, 이 작품은 살짝 가능성을 열어둔다. 내가 사실 이야기 진행하면서 딸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하게끔 만들긴 했지만, 정말 아니라는 얘긴 하지 않았잖아. 소영은 정말 최림의 딸이 아닐까?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러다 별안간 마지막 25분여의 주인공이 최은희가 연기하는 소영에서 황정순이 연기하는 살인 용의자로 바뀐다. 관객의 집중력이 떨어질 때쯤 작품은 이렇게 새로운 패를 연달아 꺼내어 지루함을 최소화한다. 그녀의 눈물겨운 신파적 사연이 공개되는 순간, 더 이상 소영이 진짜 딸이 맞느냐에 대한 의문은 무의미해져 버린다. …맥거핀이야?
* 남편에게 버림받고, 일마저 하게 되지 못한 살인범이 절망감에 빠져 거리에 선다. 다소 과장된 묘사일 수 있지만, 정말로 여성에게 있어 그만한 일의 자유도 없었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 장면에서 황정순의 연기는 가히 압권이다. *
신상옥 감독은 ‘영화란 구경꾼의 구미를 누가 더 잘 파악하느냐의 싸움’이라고 정의했다. 한국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신파다. 다사다난한 현대사의 고개를 눈물로 넘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너무나 ‘잘 팔리는 소재’ 라서, 신파는 곧 진부함과 동일한 의미가 되어 있다. 그런데 신파가 이렇게 변화무쌍하게 여성의 드라마로, 법정물로, 서스펜스로,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맥거핀으로까지 승화되다니!
새로운 것도 좋지만 익숙한 것도 다시 즐길 수 있게끔 변주하는 것도 작가적 능력이다. 50년대의 신상옥 감독은 장르나 관객을 너무나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는60년대가 되자마자 당대 한국영화계의 맹주가 됐다. 다시는 작은 규모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다짐과도 같은 이후의 활동은 그 나름대로 큰 의의가 있지만 이 말은, 이 때 보여준 장르적 세공술이 점점 헐거워 졌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감독은 점점 커져 가면서 작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됐다. 이 작품은 그 때를 볼 수 있다. 스케일의 맹주가 아니라 장르의 맹주, 신상옥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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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호
네이버(에서 전혀 유명하지 않은)파워블로거, 대학졸업생, 딴지일보 필진, 채널 예스에서 글 쓰는 사람. 혼자 작품을 보러 다니길 좋아하고 또 그런 처지라서 코너 이름을 저렇게 붙였다. 굳이 ‘리뷰’ 라고 쓰면 될 걸 뭐하러 ‘크리티끄’ 라고 했냐 물으신다면, 저리 해놓으면 좀 고상하게 보여서 사람들이 더 읽어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거 보시는 분들 글 마음에 드시면 청탁하세요. 열과 성을 다해 써서 바칠께요. * http://sega32x.blog.me *
앙ㅋ
2015.02.28
언강이 숨트는 새벽
2014.12.10
극의 후반이 가물해서 왜인가 했더니..맥거핀이 원인였군요!
다시 찬찬히 훝어 볼 필요가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