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친구를 만났다. 지구 반대편 낯선 나라의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진 마을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더 늦어지기 전에 좀 고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그는 막상 생각하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자 짐작하지 못했던 장애물이 여러 가지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마음속에 오랫동안 품고 있던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돈을 모았고, 시간을 만들었지만 부모, 형제들의 반대가 상당히 완강했다. 무엇보다 떠날 날이 다가오는 데 스스로 흔들리는 느낌을 받을 때 힘들다고 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다들 ‘뭐 하러 새삼스럽게 그런 일을 하려고 하느냐?’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그렇지 다 소용 없는 일이다. 너나 먼저 챙겨라’는 모진 말도 들었다. 그렇게 그들의 만류를 듣고 돌아설 때마다 ‘현지 상황을 알지도 못하고 겁 없이 섣부른 도전을 하는 게 아닐까?’, ‘이 나이에 잘 하는 짓일까?’라는 회의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친구는 시작하기 전에 백 번도 더 되묻고 결행했지만 아침저녁으로 “미친 짓이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어,”라고 자신을 다잡는다면서“어서 거기 도착해서 몸이 바빠져야 해.”라고 말하고 가만히 웃었다.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할 때는 작고 춥다. 그 일이 외로운 꿈을 향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돈이 잘 벌리는 일이냐고 묻기를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은 ‘그렇다, 아니다’는 대답만 듣고 ‘나라도 그런 정도면 하겠네.’라고 흔쾌한 표정을 짓거나 ‘돈도 안 되는 일에 왜?’라며 고개를 가로젓거나 한다. 선뜻 되돌아오기 힘든 장소에 자기 자신을 보내놓고 그 안에서 홀로 긴 시간을 보내야 할 친구에게 듣기 좋은 말이 아닌 어떤 분명한 응원을 해주고 싶었다. 나는 맥 바넷과 존 클라센의 그림책 『애너벨과 신기한 털실』을 골랐다.
이야기는 ‘어느 추운 오후, 어디를 보아도 새하얀 눈과 굴뚝에서 나온 까만 검댕밖에 보이지 않는 작고 추운 마을’에서 출발한다. 어느날 애너벨은 갖가지 색깔의 털실이 들어있는 조그만 상자를 하나 발견한다. 애너벨 곁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강아지 한 마리만이 애너벨을 묵묵히 지켜봐준다. 애너벨은 그 상자에서 나온 털실로 스웨터를 뜬다. 자기도 입고 강아지 마스에게도 한 벌 입혀줬지만 털실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강아지와 둘이서 커플 스웨터를 입고 집을 나선 애너벨은 동네 친구 네이트를 만나지만 그는 “너네 정말 웃긴다.”고 비웃는다. 애너벨은 네이트와 그의 강아지를 위한 스웨터를 한 벌 더 뜬다. 애너벨네는 귤색 스웨터를, 네이트네는 푸른 스웨터를 갖게 되었다. 비로소 그들도 멋쩍은 표정으로 웃는다.
털실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애너벨은 학교에 가고 자신을 자꾸만 쳐다보는 같은 반 친구들 모두에게 스웨터를 한 벌씩 선물한다. 이상한 스웨터를 입고 왔다고 나무라는 선생님에게도 스웨터를 떠 드린다. 엄마, 아빠에게, 팬들턴 아저씨와 작은 루이스 아저씨에게도 스웨터를, 스웨터를 절대 입지 않는 크랩트리 아저씨에게는 털모자를 선물한다. 애너벨이 사는 작고 추운 마을은 점점 포근한 것들로 뒤덮인다. 강아지, 고양이, 나무, 지붕, 벽까지도 애너벨의 스웨터를 입게 된다. 털실은 끝없이 남아 있었다.
애너벨이 사는 마을은 더 이상 작고 추운 마을이 아니었다. 따뜻한 스웨터에 관한 소문은 멀리까지 퍼졌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먼 나라의 귀족은 애너벨에게 그 털실상자를 팔라고 말한다. 애너벨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안 팔아요.”
귀족의 콧수염이 흠칫 떨렸어요.
“20억을 주마.”
애너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안 팔아요.”
“100억을 주마! 이래도 안 팔겠느냐?”
귀족이 소리쳤어요.
“안 팔 거예요. 이 털실은 절대로 안 팔아요.”
애너벨은 자신이 가진 털실 상자에 욕심을 부린 것일까? 그렇게 읽는다면 책을 단단히 오해한 것이다. 애너벨이 털실 상자를 팔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 결코 돈 따위와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이면 다 된다고 세상이 말하는 것은 어쩌면 돈으로 다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사람들을 돈 앞에 억지로 붙잡아 놓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끝내 미련을 접지 못하고 도둑을 고용해 애너벨의 털실상자를 훔쳐간 귀족은 상자를 열어보고 깜짝 놀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남 좋은 일'이라는 말이 핀잔으로 쓰이고 '돈 안 되는 일'이라면 죽어가는 생명의 목숨을 살린다고 해도 한 발 물러서라고 가르치는 얼음 같은 세상이다. 이 황금의 냉동고 안에서 내가 오늘 얼어 죽고 버틸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 묵묵히 스웨터를 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스웨터를 뜨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면서, 때로는 그 어리석음을 비웃으면서 하루를 산다. ‘얼마면 되겠어?’라는 말에 휘둘리면서 살아가는 우리들도 사실은 다 안다. 이 서릿발 같은 마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금고를 등지고 앉아 누군가를 위해 홀연히 스웨터를 짜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돈은 언젠가 떨어지겠지만 상자속의 털실은 남아있을 것이다.
작고 먼 마을로 떠나는 친구는 팔 수 없는 것을 향해서 간다. 나는 그가 지금 지닌 꿈을 돈과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지금은 비록 불안해보이지만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것임을 믿는다. 영양제를 챙기고 가볍고 따뜻한 스웨터 한 벌을 꾸러미에 함께 넣어서 『애너벨과 신기한 털실』을 선물한다. 지금은 추위가 우리를 다 끝장낼 것 같지만 뜨개바늘을 든 사람이 있는 한 털실은 남아있을 테니까.
맥 바넷 글/존 클라센 그림 | 길벗어린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가지게 되는 재물과 재주는 털실과도 같습니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쓰는지에 따라 빈상자가 될 수도, 털실로 가득찬 상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재물과 재주는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말해주세요.
● 함께 선물하면 좋은 책
채인선 저/강을순 그림 | 창비
이 책은 작은 역할극의 대본 같은 형식의 동화책이다. 애너벨과 또 다른 이유로 뜨개질을 시작한 섬마을의 도마뱀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귀여운 토끼와 거북이가 등장하는 이 사랑스러운 이야기는 꼭 어린이가 아니더라도 읽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바쁘고 고단한 삶일수록 ‘마음의 혈당 수치’를 올려주는 이야기가 고마워지는 순간이 많다. 먼 곳으로 떠나는 친구에게는 눈물 날 때마다 다른 것 잊어버리고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두고두고 힘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에 귀여운 것이란 언제 어디에 가든지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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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동화작가)
김지은. 동화작가, 아동문학 평론가. 어린이 철학 교육을 공부했다. 『달려라, 그림책 버스』,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을 함께 썼고 EBS '라디오멘토 부모'에서 '꿈꾸는 도서관'을 진행했으며, 서울시립대, 한신대, 서울예대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