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제 3의 공간', 책을 지붕 삼아 이루는 삶이라는 건축
새로운 도서관의 모범으로 불리는 느티나무 도서관의 안정희 북큐레이터가 『도서관에서 책과 연애하다』의 출간을 기념하여 독자들을 만났다. 책을 통해 도서관을 활용하는 방법과 책 읽기의 의미를 이야기한 그녀는, 이번 강연회에서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실마리로서의 문화'를 강조했다. 안정희 작가에게 문화는 자신의 내면에 '제 3의 공간'을 만드는 질료이다.
“가정을 제 1공간이라고 하면, 돈 벌이 내지는 뚜렷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관계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제 2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 1의 공간은 나와의 거리감이 전혀 확보되지 않죠, 따라서 나를 성장시키기 어려운, ‘경계가 사라진 공간’입니다. 반면 제 2의 공간은 너무나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에, 그 목적 이외의 것들을 탐하기 어려운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 3의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곳은 나와의 적정한 거리가 확보되고, 내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으며, 강제된 목적이 없지만 사회와 나 사이의 관계 맺기에 도움이 되는 공간입니다.”
안정희 작가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제 3의 공간으로, 최근 이슈가 된 현대카드 트래블 라이브러리, 북 카페, 책방이음과 같은 서점 등을 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들은 외부에 있고, 타인이 만들어놓은 공간이라는 한계가 있다. 이곳들을 활용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만의 ‘제 3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안정희 작가는 내 안에 제 3의 공간이 있을 때 비로소 책을 지붕 삼아 나의 삶이라는 건축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토리텔링 시대에 이러한 '제 3의 공간'은 상상력의 원천이자 사고의 전환을 이끄는 실마리 역할을 한다.
스토리 텔링의 시대, 그림,문학,영화에서 실마리를 찾다
“우리가 현재 스토리텔링, 상상력의 시대를 살고 있고, 특히 요즘 ‘인문학 열풍’ 얘기를 많이 듣죠. 그런데 ‘열풍’이라는 말은 동전의 뒷면처럼 ‘위기’를 수반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열풍이라는 것은 현재 이것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이것이 필요하다’는 절망의 표현이죠. 따라서 스토리텔링, 상상력의 시대라는 것은 현재 스토리텔링과 상상력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늘 출제자의 의도만 미친 듯이 연구하고 살았거든요.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나만의 스토리텔링을 할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창조적이지 못하고, 창조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교육은 획일적으로 받았지만 인간은 원래 자신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이를 전달하고 싶어 못 견디는 존재에요. 책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모두 다들 ‘내 이야기 좀 들어줘’하는 사람들이죠. 결국 이러한 스토리를 어떻게, 어떤 계기로 이끌어내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고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실마리가 필요할 뿐입니다.”
안정희 작가는 이러한 실마리를 그림,문학,영화를 통해 설명했다. 우선 안정희 작가는 대니 그레고리의 '그림'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설명했다.
“『모든 날이 소중하다』를 펴낸 뉴욕의 일러스트레이터 대니 그레고리는 원래 평범한 직장인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부인이 철로에 떨어지는 사고로 하반신 장애인이 되고, 이에 대니 그레고리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림을 그리다 보니,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사실 우리가 눈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물을 제대로 보고 있지는 않죠. 보통은 전경이나 배경으로 볼 뿐, 통찰력이 필요한 본질적 ‘바라봄’이 없어요. 평소에는 그 대상을 ‘힐끗’ 보니까요. 대니 그레고리는 그림을 그리면서 이를 발견하게 돼요.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 동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잘 알지 못했던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그림을 통해 대니는 산다는 것 자체의 일상성과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보게 되고, 이를 그림과 함께 엮어서 글로 쓰게 돼요. 결국 대니는 우리에게 창의력, 상상력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있고 단지 그것이 어떤 계기로 구현되는지에 대한 문제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을 바꾸는 '이야기'의 힘
안정희 작가는 '그림'에 이어서 '문학'을 통해서도 스토리텔링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녀는 '인종차별'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킨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언급하며, 이야기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앵무새 죽이기』는 1931년 발생한 '스코츠보로 재판'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 재판에서 흑인 소년 9명은 백인 여성 2명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를 받는다. 의사가 강간의 흔적이 없다는 진료 기록을 제출하고, 나중에 피해자들마저 강간 당한 사실을 부인하지만 이 모든 '사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이다.
"미국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을 보여주는 1931년 '스코츠보로 재판'을 모티브로 하퍼 리가 『앵무새 죽이기』를 썼어요.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사건은 동일하게 흘러가요. 책에서는 백인 여학생이 강간당한 일이 없다고 말을 번복하고 이에 부합하는 진료 기록도 나오지만 흑인이 사형선고를 받아요. 그리고 그는 억울해서 도망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죠. 62년도에 『앵무새 죽이기』가 영화화된 후 이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 역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아카데미상은 '대중적인' 작품에 주는 상이죠, 따라서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는 것은 미국의 사회의식이 변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이러한 변화는 '사실'이 아니라 소설이 불러일으킨 거죠. 소설은 이런 힘을 가지고 있어요, 이야기의 힘인 거죠. 실제 1976년 스코츠보로 재판 결과가 번복되었어요. 이러한 결과는 인종차별과 같은 문제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인간의 의지가 문화를 통해 사회 인식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림,문학,영화와 같은 문화가 미래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거죠."
내재된 창의력의 증거, 인간의 '호기심'
마지막으로 안정희 작가는 인간에게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로서 영화 <아일랜드> 이야기를 꺼냈다. 이 영화는 미래에 사람들이 생명연장을 위해 자신에게 맞는 장기와 신체부위를 제공할 복제인간을 만든다는 내용이다. 복제인간들은 지구 상에 생태적인 재앙이 일어났고, 자기들만이 유일한 지구 종말의 생존자라고 믿도록 세뇌된다. 그들은 지구에서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은 희망의 땅 '아일랜드'에 추첨이 되어 뽑혀 가기를 바라며 살고 있지만, 사실 '아일랜드'에 간다는 것은 고객에게 신체부위를 제공하기 위해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것이다.
"영화 <아일랜드>에서는 필요할 때 신체부위를 제공받기 위해 복제인간을 만드는데, 그가 기억은 갖되 생각은 많이 하지 못하게 장치를 해두죠. 그런데 주인공 '링컨 6-에코'가 그런 장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 있었어요. 바로 '호기심'이었죠. 어느 날 바깥 세상에서 들어온 나비를 발견한 그는 생각하죠, '세계가 오염되어 우리만이 살아남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나비가 멀쩡하지? 나비가 멀쩡한 건 바깥 세상이 살만하다는 것 아니야?' 나비 때문에 의문점을 갖게 된 주인공은 몰래 바깥 세상으로 가는 통로를 염탐하게 되고, 거기서 배아 상태의 수많은 복제인간들과 수술대를 보게 돼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탈출을 감행하고, 결국 자신의 실제 인물을 만나러 가게 됩니다."
<아일랜드>에서 복제인간의 2세대는 결국 모두 '호기심'을 갖게 된다. 처음에 링컨 6-에코는 나비를 보고 의문점을 가지게 되고, 그 옆의 사람은 '링컨 6-에코는 아일랜드로 가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사라진 것이지?'라는 질문을 품게 된다. 또 그 옆의 사람은 '저 사람은 왜 저런 생각을 하지?' 의문을 품게 된다. '호기심'이 인간은 본성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이 인간인가', '떼어놓고 도려내더라도 종내 인간이 갖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했어요. 바로 '호기심'이라는 거죠. 보이는 것 너머의 세상을 꿈꾸고, 궁금해하고, 결국 일구어내려는 상상력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인간의 본성 안에 바로 호기심과 상상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당장 눈 앞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인간은 상상력으로 현실을 견디는 시간을 확보해왔습니다. 인류는 수만 년의 시간 동안 상상력으로 현실을 변화시키며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안정희 작가는 '어떻게 하면 책을 지속적으로 읽을 수 있을지' 묻는 독자에게 '책이 도처에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어떤 분이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미국 해변에 갔더니 우리 나라와 다르게 누워서 책을 보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 우리도 영화에서 그런 장면들 많이 봤죠, 인물의 직업이나 상황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누우면 책을 읽죠. 아무 때나 책을 읽는 건데, 이를 다시 말하면 '언제나' 책이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 가지 종류의, 아무 책이나 여기에다 저기에다 두고, 아무 쪽이나 읽다가 덮어도 괜찮은 거죠. 한 줄을 읽더라도 그 한 줄을 깊게 생각해보고 내 삶과 어떻게 연관 지을지 생각해보는 그 시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것 같아요."
안정희 작가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평생 책과 연애하는 까닭'을 밝혔다. 독자 스스로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질문하도록 만드는 구절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도, 시간을 죽이는 도구도 아니다.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려면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담긴, 그래서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는 책이 있어야 한다. 내가 평생 책과 연애하는 까닭이다. ( 『도서관에서 책과 연애하다』,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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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책과 연애하다 안정희 저 | 알마
북큐레이터는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책 속에서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을 고르고, 때로는 몇몇 책을 ‘컬렉션’이라는 방식으로 묶어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문학적 소양 없이는 불가능한 직업이다. 작지만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느티나무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저자는 최고의 북큐레이터라 불릴 정도로 도서관계만이 아니라 도서관을 찾는 이용자들에게도 입소문이 자자하다. 아마도 책 속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경험이 담긴 깊이 있는 조언을 건네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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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은
사람을 지향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