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408>스틸컷
호러로 피서를!
바야흐로 호러의 계절이 돌아왔다. 초여름 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더운 요즘, 식구끼리 혹은 친구끼리 둘러앉아 무서운 이야기 서 너 개쯤 나누다 보면 선풍기가 필요 없게 된다. 호러 영화를 보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 불 꺼진 방안, 모니터나 텔레비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빛이 기괴한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화면 속에서는 관절염을 앓는 머리 긴 귀신이, 전기톱을 든 살인마가, 이빨을 드러낸 뱀파이어가, 사악한 악마와 그보다 더 무서운 이웃의 연쇄살인마들이 활개를 친다. 우리를 더위를 힘껏 날려주겠다는 듯.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고, 호러 영화를 보는 것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피서는 책 한 권을 끼고 선풍기 앞에 앉는 것이다. 나는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밤이면 혼자 거실에 앉아서 호러 소설을 꺼내든다. 호흡이 긴 장편보다 재기발랄하면서도 섬뜩한 작품들을 모아 놓은 단편집이 더 낫다.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틀고 차디 찬 얼음물 한 잔을 앞에 두고 호러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새 더위는 가시고 스멀스멀 찬 기운이 몰려온다.
문득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면 거실 저편 불빛이 닿지 않는 그곳이 유독 어둡게 느껴진다.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목덜미의 솜털이 자글자글 일어선다. 누군가,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가 있는 것만 같다.
“거기 누구요?”
한 번쯤 물어보고 싶지만 어둠 속에서 허연 손이 쑥 튀어나올까 봐 모른 척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때가 되면 호러 소설 속 이야기들은 더 이상 책갈피 속에서만 펼쳐지지 않는다. 현실이 된다. 책을 비집고 나와 내 심장을 직접 움켜쥐고 귓가에다가 차디 찬 기운을 불어넣는 것이다.
활자만이 줄 수 있는 공포는 따로 있다. 바로 상상력이다. 단어와 단어 사이, 행간과 행간 사이, 그리고 문단과 문단 사이의 그 짧은 빈틈을 우리는 상상력으로 메운다.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하고, 귀신이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영화보다 한 편의 호러 소설이 더 큰 공포를 선사하는 이유는 활자를 통해 머릿속에 싹트기 시작한 두려움이 시간이 지나면서 상상력이라는 자양분을 통해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라난 공포는 이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다.
무릇 훌륭한 호러 소설이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공포를 심어주어야 한다. 그 공포의 종류야 얼마든지 다양하다. 상실감, 불안감, 초조함, 슬픔, 좌절감, 고통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어두운 감정 대부분이 공포로 치환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걸작이라 칭송받을 만 한 호러 소설의 조건을 꼽자면 단순히 공포뿐만이 아니라 경각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마지막에는, 그러니까 독자가 책장을 덮었을 때는 일말의 안도감도 선사해야 한다.
문제는 그런 조건을 갖춘 호러 소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외는 물론 국내 작품도 독자들의 외면 속에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기꺼이 무섭게 만들기 위해, 혼자서 화장실 가는 일이 망설여지게 만들기 위해, 꿈자리가 뒤숭숭하게 만들기 위해 작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써 낸 좋은 작품들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여기서 올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 줄 몇 작품을 소개한다.
『해가 저문 이후』, 『여름 빛』, 『한국공포문학단편선』
‘스티븐 킹’은 수많은 호러 소설을 발표했는데 그의 장편보다 오히려 단편 혹은 중편을 선호하는 독자들도 많다. 영화로 만들어져 성공을 거둔 <미스트>나 <1408>,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등도 스티븐 킹의 중단편을 원작으로 한 것들이다. 『해가 저문 이후』는 가장 최근에 엮어져 나온 스티븐 킹의 단편집이다. 두툼한 두께의 이 책에는 총 14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 아주 무시무시하다. 스티븐 킹은 호러 소설의 대가답게 단편 안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한다. 귀신이나 괴물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헬스 자전거가 공포의 매개가 될 때도 있고 한밤 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마주친 남녀가 불편한 공포를 선사하기도 한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에서 무서운 상황으로의 전환이 아주 매끄럽다. 방심하고 읽다가는 심장이 내려앉는 경험을 여러 번 할 것이다. 물론, 이 열정적인 노(老) 작가의 소설이 우리나라 사람 정서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이 느끼는 공포의 지점이 다르다는 사실도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충분히 섬뜩하고 특히 몇몇 단편들은 그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을 정도이다. 이 작품 『해가 저문 이후』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스티븐 킹의 다른 단편집도 도전해 보길. 초기작품들은 더 무섭다.
『여름 빛』은 최근에 나온 단편집이다. 일본의 여류 작가 ‘이누이 루카’가 총 6편의 작품으로 독자들과 만난다. 책 표지에 떡하니 적힌 ‘호러 여왕의 강림’이라는 광고 문구처럼 이 책, 상당히 섬뜩하다. 여성 작가 특유의 부드럽고 세밀한 문체에 방심하고 있다가는 뒤통수 맞게 된다. 특히 표제작인 ‘여름 빛’은 친구와의 우정과 옛 시절의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마지막에 그야말로 끔찍한 반전을 불러온다. 다른 단편들의 분위기도 대게 비슷하다. 그 중 ‘이’는 내가 근래 읽었던 호러 소설 중 가장 섬뜩했다.
일본의 호러 소설은 서양의 그것과는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스티븐 킹으로 대표되는 서양 호러 소설이 투박하지만 육중한 둔기에 가깝다면 일본의 호러 소설은 예리한 메스의 분위기를 풍긴다. 『여름 빛』은 우리의 무더위를 갈라버리기에 충분히 날카롭다. 2006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한국공포문학단편선』 시리즈는 한국 호러 소설의 현 주소를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작품집이다. 현재 5권까지 출간된 상태이고 올여름에 6권이 출간될 예정이다.
『한국공포문학단편선』 시리즈에 실린 작품들은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일들을 섬뜩하게 풀어내고 있다. 즉, 그 시대의 시대상이 반영된 작품들이 많다. 그만큼 몰입도가 높고 여운도 길게 남는다. 매회 새로운 시리즈가 발표될 때마다 그 시점의 사회 문제를 다룬 소설들이 독자의 호평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리즈에 실린 호러 단편들이 죄다 무거운 것만은 아니다. 호러 소설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미덕, 오싹함, 기이함, 미스터리함, 그리고 무엇보다 끔찍하고 섬뜩한 기운들이 가득하다.
서양의 호러 소설이 둔기이고 일본의 호러 소설이 메스라면 한국 호러는 바늘에 가깝다. 뾰족한 바늘 끝으로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것이다. 무심코 읽다가 마음속 어딘가에 맺힌 핏방울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 작은 틈새로 공포가 스며들어가는 것이다. 『한국공포문학단편선』 시리즈의 가장 큰 미덕은 우리네 이웃에서 벌어질 법 한, 혹은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다룬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읽고 난 후 가장 찜찜한 것 또한 『한국공포문학단편선』 시리즈이다.
이 외에도 ‘슈카와 미나토’의 『도시전설 세피아』나 ‘조 힐’의 『20세기 고스트』, ‘오츠 이치’의 『ZOO』 등도 더위를 날려줄 아주 강력한 호러 소실집이다. 올해는 초여름부터 푹푹 찌는 걸 보니 보나마나 더위가 기승을 부리리라.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놓고 시원하게 지내는 사치를 부린다면야 좋겠지만, 전기세 걱정에, 그리고 전력량 부족이라는 범국가적인 걱정에 그마저 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는 책 한 권이 적당하다. 표지부터 서늘한 느낌을 한껏 뿜어내는 호러 소설을 읽고 있자면 더위는 금세 잊을 것이다.
단, 한 가지만은 조심해야 한다. 밤에 혼자 읽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도 절대 뒤돌아보지 말 것!
-
해가 저문 오후 스티븐 킹 저/조영학 역 | 황금가지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의 최신 단편집『해가 저문 이후』가 출간되었다. 2000년대에 쓰인 최근작 위주로 총 1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브램 스토커 상과 미국 도서관 협회에서 선정하는 알렉스 상을 수상한 이 책은 킹의 탁월한 상상력과 필력이 여전함을 보여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스턴 글로브》는 “여전히 날카롭고 다재다능하다.”고 했으며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공포 소설의 거장이 최전성기에 있다는 걸 보여 준다.”고 평가했다.
- 여름 빛 이누이 루카 저/추지나 역 | 레드박스
전쟁으로 인해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모두 황폐해지는 가운데 날씨만은 아찔할 정도로 눈부신 여름날이 이어진다. 그 속에서 소외된 소년끼리의 애처롭고도 싱그러운 우정. 그 우정을 깨뜨리려는 또다른 소년 집단의 잔인하고도 끔찍한 폭력. 한 소년이 죽음을 예지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 미추(美醜)의 경계를 오가는 탐미적이면서도 추악한 현실의 묘사력을 통해 소년 소설에서 어느 순간 처참하고 끔찍한 호러 소설로 돌변하며 읽는 이에게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 한국공포문학단편선5 김종일,이종권,장은호 등저 | 황금가지
SF와 판타지, 추리 요소들이 접목된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된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 그 다섯 번째 모음집이다. 이번 작품집에는 공포 소설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머리 긴 여자 귀신이나 흐릿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 대신 좀 더 친숙한 소재, 마치 어디서나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은 작품들이 실려 있다. 김종일, 이종호, 우명희, 장은호 등 기존의 인기 작가들 외에도 계속해서 신인 작가들의 작품도 실려 있어 다양한 작품들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관련 기사]
전건우
남편, 아빠, 백수, 소설가, 전업작가로 살아간다. 운동만 시작하면 뱃살이 빠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서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황당한 꿈을 꾼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단편을 실었다.
향초
2014.06.24
감귤
2014.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