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기억이 사라졌다. 살면서 학습된 필수적인 기억이나 직업인으로 필요한 전문 지식은 모두 남아있지만 정작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가족과 친구의 얼굴, 매일같이 오갔던 사무실도 기억이 나지 않고 하다못해 제 이름 석 자조차 서먹하다. 내가 살던 곳이 모두 낯설고 생경한 신세계가 되었을 때의 그 막막함. 짐작도 힘들다.
출처_ MBC
여기 이런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사람이 하나 있다. <개과천선>의 김석주(김명민 분). 어느 날 피습을 받고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후, 깨어나 보니 자신이 대형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란다. 입에서 술술 나오는 법률 지식이 그래서였구나 납득한 것도 잠시,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길고 지루한 소송으로 가난한 피해자를 포기하게 만드는 비열한 변호사였던 데다, 지나가던 지난 소송의 원고에게는 침을 맞기까지 한다.
아버지는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병원으로 찾아가도 냉랭하기만 하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상상하기도 싫다.몰랐던 제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황망한 표정으로 충격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이 남자, 어쩐지 마음을 잡아끈다. 천천히, 하지만 뜨겁게 끓어오르는 <개과천선>에 대한 지지는 분명 8할 이상 김석주에게 기반하고 있을 터다. 과연 김석주가 시청자들의 지지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로 물론 배우 김명민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어떤 역할을 맡겨도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내놓기로 유명하거니와, 수없이 많은 연기자 중에서도 발음,발성이 좋기로 손에 꼽히는 배우이기도 하다. 김명민은 장군, CEO, 의사, 지휘자 등 시대와 직종을 불문하고 카리스마를 요하는 역할을 수차례 연기했지만 법정물에서만은 한 번도 그 진가를 발휘한 적이 없는데,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왜 여태 변호사 역할을 하지 않았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목소리 자체가 설득력이거니와, 김명민은 저절로 귀를 끄는 발성과 또렷한 발음으로 어려운 대사도 단번에 귀에 꽂히도록 만든다. 법리로 상대방을 승복시켜야 하는 변호사로서 참으로 적절한 배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김석주라는 캐릭터는 연기하기에 참으로 난해한 역이다. 초반부 돈과 권력이라면 불길도 불사하는 냉혹한 변호사 김석주와 3회 이후의 ‘무명남’ 김석주는 전혀 딴 사람처럼 보여야 하는 데다, 배우는 기억을 잊은 석주의 혼란과 방황도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 판이하게 다른 이 두 캐릭터를 그만큼 능숙히 변주할 배우는 김명민 외에 또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김석주 캐릭터 자체에 대한 지지도 뜨겁다. 초반부 비열하고 냉정한 변호사였을 때, 승소를 위해 증인을 매수하고 계획적으로 재판을 연기시키는 김석주에 대한 시청자들의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충격과 분노는 그가 기억을 잃은 후 고스란히 석주에 대한 응원으로 변한다. 기억을 잃은 석주는 지난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순박하고 양심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기억을 잃기 전의 모습과 대비되어 한층 눈길을 끌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은 후의 석주는 내내 과거의 자신에 의혹을 갖는다. 그는 기억을 잃기 전의 냉혹한 자신과 마주할 때마다 눈을 깜빡거리는데, 그때마다 흐려지는 시야는 흡사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듯 뿌옇게 변하는 시야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고 미간을 문질러도 맑아지지 않는다.
30년을 넘게 살아온 김석주의 삶보다 오히려 ‘자신의 상식’안에 있는 무명남으로서의 삶이 편하기까지 하다. “명남씨, 이제 오세요?” 무심코 자신을 무명남이라 부르고 나서 간호사가 멋쩍어하자 “그렇게 부르니까 나도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쁘지 않네요.” 대답하고 웃는 석주의 모습도 그렇다. 수임료 20억원의 소송은 쉽게 포기하지만, 고맙다 전해주는 할머니의 비타민 음료는 받아 들고 웃음 짓는 석주도 시청자들을 미소 띠게 하는 장면이다.
출처_ MBC
쉽고 뻔한 전개라 손가락질을 받을 것을 감수하고도 제작진이 기억상실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한 것도 그런 까닭일 터다. 소재가 흔하디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억을 잊은 후 석주에게 더 열렬한 지지가 쏟아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자신을 잃은 상태에서 석주는 객관적으로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타인의 말과 자신의 시선으로 자아를 재구성한다. 기억을 잊은 인간에게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자연 상태 그대로의 자신이 아닐까? 변호사 김석주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생활하며 인간 본연의 동정심을 잊었다면, 자연인 김석주가 되며 자신 깊숙이 숨겨져 있던 본성을 찾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기억상실을 이야기의 진행을 위한 장치로 보기보단, 김성주 본연의 인간성을 찾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영우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 김석주가 아닌 자연인 김석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돋보이기도 한다. 자연인 김석주가 사회생활을 하며 숨겨온 속내는 따뜻하고 말랑거리는 인간이었던 듯하다. “잘 됐네. 누가 해도 그 변호사보단 나을 거야.” 정혜령(김윤서 분)의 사건에 대해 냉정하게 일별하면서도, 결국 자신에게 침을 뱉었던 그녀의 변호사를 자진해서 맡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동정이나 연민과 같은 인간적이고 비논리적인 감정과 가장 먼 것 같았던 이 남자, 사실은 이렇게 다정하게 흔들리는 사람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속삭임이 대중에게 당연한 지지와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말이다.
결국 <개과천선>은 시청자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초반부 지나칠 정도로 자극적인 설정도 기억을 잃은 후의 캐릭터와 더욱 극적인 대비를 위한 밑거름이었음을 이해하게 되는 데다, 브라운관 뒤에서 무대를 짜는 제작진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토록 인간적이고 다감한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물음에 단호히 손을 내저을 시청자는 몇 되지 않으리라. 벌써부터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에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것을.
가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보여 우리를 의아하게 만드는 작품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개과천선>이 내보이는 자신감만큼은 믿어도 될 듯하다. 든든히 무게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김석주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우니, 두말해 무엇 하랴. 이상한 나라에서 홀로 애쓰며 자신과 세상을 마디마디 다시 쌓아올릴 이인(異人) 김석주의 행보를 응원하고 싶다. ‘개과천선’해 자신이 등에 업었던 권력과 황금을 상대로 분투할 김석주의 싸움은 분명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테지만, 힘겹게 손에 쥔 승리는 그가 쫓던 어떤 권력과 황금보다도 값진 것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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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사람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길어 주절거리는 것이 병이 된 사람. 즐거운 책과 신나는 음악, 따뜻한 드라마와 깊은 영화, 그리고 차 한 잔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